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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육필 까세집

책]나의 육필 까세집

세계일보 | 입력 2005.09.10 00:30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영화 시네마천국의 명장면. 알프레도가 잘려나간 필름으로 엮은 영화 속 키스 장면들이 줄줄이 펼쳐진다. 알프레도는 어린 토토가 궁금해하던 비밀 필름을 30년 동안 간직해뒀다. 중년이 된 토토는 알프레도가 남긴 선물에 눈물을 글썽인다.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김성환(73) 화백은 이 책에서 사려깊은 알프레도가 된다. 그는 화단의 거장 111인에게 일일이 부탁하여 받은 '카세'를 독자에게 펼쳐놓는다. 카세(Cachet)란 편지봉투나 엽서에 그린 작은 그림이다. 우표수집가들은 초일봉피(새 우표 판매를 개시하는 날 새 우표를 붙이고 그 날짜 소인을 찍은 편지봉투)를 모으는데, 그 우표에 연관된 그림을 봉투 겉에 그린 것이 카세다.

김 화백은 1960년대 국방부 미술대 종군화가단에 있으면서 원로 화백들과의 친분을 기념하고 싶어 카세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후 40여년간 김기창, 허건, 이상범, 중광 등 작고한 대가와 천경자, 이태길, 하태진, 김창열 등 현재 활동 작가들의 흔적을 '작고 조악한 편지봉투'에 보관해뒀다. 그는 책의 들머리에서 "예술의 목적이 감동을 주는 데 있다면 작품이 반드시 커야 할 이유가 없다"며 카세의 예술성을 섭새김한다.



김 화백은 특유의 정갈한 삽화와 함께 카세를 받을 당시의 회고담을 끼워넣는다. 회고담은 대체로 신문의 부고를 인용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삽화엔 60, 70년대의 익살스러운 풍경을, 글에는 유명을 달리한 화가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 그 곁에 실린 카세엔 작고한 예술가의 체취가 담겨 있어 진한 여운을 느끼게 한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회고담에서는 서로 캐리커처를 그려주며 친분을 나눈 일, 육필 카세를 세 차례나 그려준 화백의 호탕함을 회상한다. 설날에 TV뉴스로 부음을 듣고 달려간 영안실에서 느꼈던 공허함을 묘사한 끝부분은 가슴을 아릿하게 한다.

원석연 화백의 회고담에서는 카세의 주인공이 다른 예술가와 막싸움을 벌였던 일화가 재미있다. 50년대 중반에 활동했던 예술가들의 인간적인 면모와 감정대립을 슬쩍 엿볼 수 있다. 원 화백이 카세로 개미 한 마리를 그려놓고 '고독한 녀석'이라고 이름붙인 대목에서는 예술가의 쓸쓸함이 느껴진다.


그 쓸쓸함 감정이 작은 종이에 그려진 개미 그림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이 책의 묘미다.

김 화백이 고바우란 명칭을 사용하는 식당간판이 반가워 "내가 원작자"라고 밝히면 "20년 동안 상호를 써왔기 때문에 문제 없다"고 지레 경계하는 업주들의 태도도 재미있는 일화다. 그는 서운해하며 한국인의 피해의식을 언급한다. 한 화가가 사회에 대해 느낀 단상과 그가 간직한 예술가들의 체취를 두루 감상할 수 있는 그림 에세이다.

심재천 기자 jayshim@segye.com

◇왼쪽부터 故 변종하 작, 故 홍종명 작, 故 김영주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