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게, 작게 그리고 아름답게
홈
태그
방명록
전시. 공지/게시물
늙어가는 아내에게 황 지우
조용한ㅁ
2009. 6. 23. 01:27
< 늙어 가는 아내에게 >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 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황지우-
공유하기
게시글 관리
낮게, 작게 그리고 아름답게
'
전시. 공지
>
게시물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땡벌'을 부르는 마이클잭슨
(0)
2009.07.03
산할아버지 구름모자 썼네
(0)
2009.06.27
가장 행복한 나라 부탄의 최연소 국왕
(0)
2009.06.19
Joanna Sierko의 그림
(0)
2009.06.17
체리의 계절
(0)
2009.06.10
티스토리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