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그림들/외국의화가의 작품

에드바르 뭉크

조용한ㅁ 2012. 3. 5. 23:41

에드바르 뭉크
                                                                                                  출처: 위키백과 사전.

에드바르  뭉크(노르웨이어: Edvard Munch, 1863년 12월 12일 - 1944년 1월 23일)는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이자 판화 작가이다.

작품 〈절규〉를 그린 화가로 유명하고, 노르웨이에서는 국민적인 화가이다. 그의 초상이 1000 크로네 지폐에도 그려져 있다. 생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인간 존재의 근원에 존재하는 고독, 질투, 불안등을 응시하는 인물을, 인물화를 통해 표현했다. 표현주의적인 화풍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Scream

[절규]"The Scream",

1893, tempera and casein on cardboard, 91.3 x 73.7 cm,

Nasjonalgalleriet, Oslo

 

작가가 생전에 붙인 이름은 독일어로 <Der Schrei der Natur>이나 흔히 <The Scream>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유화 작품을 그린 뒤에 3점의 작품을 더 제작해 총 4점의 연작이 있다. 유화 작품은 오슬로 국립 미술관이 소장 중이며, 템페라 작품과 판화 작품은 오슬로 뭉크 미술관이, 그리고 또 하나의 작품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은 오슬로 국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유화 작품이다.

"친구 둘과 함께 길을 걸어 가고 있었다. 해질녘이었고 나는 약간의 우울함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자리에 멈춰선 나는 죽을 것만같은 피로감으로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핏빛하늘에 걸친 불타는 듯한 구름과 암청색 도시와 피오르드에 걸린 칼을 보았다. 내 친구들은 계속 걸어갔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 소리를 들었다." 뭉크가 1892년 1월에 남긴 글은 매우 유명하다.

화자의 절망적인 심리상태를 곡선으로 표현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붉은 구름으로 나타내었으며, 화면 하단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인물은 마치 유령과 같은 모습을 띠고 있는데, 뭉크는 깊은 좌절에 빠진 사람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와 같은 형태의 왜곡을 하였다고 한다.

한편 <절규> 연작은 도난과의 지독한 악연으로 유명하다. 1994년 4명의 괴한이 오슬로 국립미술관의 창문을 깨고 사다리를 타고 넘어와 유화 버전의 작품을 훔쳐갔었다. 그들은 "Thanks for the poor security".라는 메모를 남겨 놓고 유유히 사라졌다. 3개월 뒤 구매자를 가장한 경찰의 함정수사로 다행히 붙잡혔고 작품은 손상되지 않은 채 돌아와 다시 오슬로 국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2004년에는 3명의 복면 무장강도가 백주대낮에 오슬로 뭉크 미술관에 난입해 당시 관람중이던 수십여명의 관람객을 위협한 뒤 너무나 간단하게 템페라 버전의 <절규>와 <마돈나>를 훔쳐갔었다. 이들 두 작품은 2006년에 다행히 되찾기는 했지만 노르웨이 경찰은 되찾은 과정에 대한 발표를 거부했고 이는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절규>는 왼쪽 하단부가 약간 습기로 손상되었고, <마돈나>는 오른쪽 테두리 부분이 좀 찢어지고 마돈나의 팔에 두개의 구멍이 뚫린 채 회수되었다.

 

Madonna

[마돈나] Madonna,

1894-95,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Oslo.

 

Girls on a Bridge

Girls on a Bridge, 1899-1900

[다리위의 소녀들]girls on a bridge


불안



병든아이



빨간 덩굴풀



사춘기



아모르와 프시케



The kiss



앉아있는 모델



어머니와 딸



입맞춤



입맞춤



자화상-시계와 침대 사이에서



흡혈귀



저승에서, 자화상



EYE IN EYE











girl on the beach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2.12~1944.1.23) 


 

                                                                   출처:    http://cafe.daum.net/jsseo43/DTlW/988

“남자들이 책을 읽고, 여자들이 뜨개질하고 있는 따위의 실내화는 더 이상 그릴 필요가 없다. 내가 그리는 것은 숨을 쉬고, 느끼고, 괴로워하고, 사랑하며, 살아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보는 사람은 이 주제에서 신성함과 숭고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모자를 벗을 것이다.”

 

뭉크는 노르웨이가 낳은 가장 위대한 화가로서 사랑, 고통, 죽음, 불안 등을 주제로 하여 내면 세계를 시각화 하였으며, '영혼의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독창성 있는 작품세계를 통하여 미술사의 흐름에 한 전환점을 제기 하였다. 노르웨이 태생의 작가였지만 뭉크는 후진적인 19세기말의 북유럽을 탈피하고자 했다. 그 결과 독일 미술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그 또한 독일의 미술, 특히 표현파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등 독일에서 화가로서의 꽃을 활짝 피웠다. 16세기이래 4세기간 불모의 공백으로 지속되었던 독일 회화계를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은 뭉크의 힘이라고 한다.

 

그래서 현대 "회화의 아버지 세잔"을 본따서 "북구의 세잔"이라고 하기도 한다. 뭉크는 1863년 노르웨이의 전형적인 상류층 가정에서 빈민가의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상성격 소유자이고 다섯 남매 가운데 둘째로서 그가 다섯살 되던 해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집안은 불행을 맞게 된다. 어머니 대신 가정을 맡아 돌봐 주던 한 살 위인 누나 소피에도 뭉크 나이 14세 때 결핵으로 죽는다. 그역시 몸이 무척 약했으며 여동생까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다섯형제 중 유일하게 앙드레아만이 결혼했으나 몇 개월만에 죽고 만다

그 역시 생애를 두고 건강하지 못했다. 늘 자기의 주위에는 끊임없는 악의에 찬 위험이 육박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공포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생활을 하였다.그것 때문에 그는 누차 정신분열 증세까지 일으켰다. 이러한 환경과 병약한 육체가 그의 정신과 작품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삶이 절망스러울 때 누구나가 한 번쯤은 죽음을 생각한다. 그의 아버지는 병약하고 민감했던 뭉크에게 의사가 되라는 말을수없이 했다.하지만 시대의 불안과 공포, 그 안에서 또다른 희망을 추구했던 뭉크는 아버지의 꿈을 저버리고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뭉크는 이 절망과 불안의 삶을 산 화가였다. 하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 뭉크는 죽음 대신 그림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그림을 통해서 인생의 어두운 면을 그려낸 화가였다

표현주의 거장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출처: [행복한 그림]http://cafe.daum.net/love1110

노르웨이 뢰텐에서 가난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는 어린 시절부터 병과 죽음의 분위기속에서 자라 평생 이러한 음울한 주제에 집착했다. 그리하여 병, 죽음, 애수, 질투 등의 주제 그림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그렸다. 다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네살 때는 한살 위 누나조차 갑자기 죽고 말았다. 이처럼 소년시절에 돌발적으로 겪은 가족사적 불행은 뭉크로 하여금 자신이 저주받은 운명을 타고났다 믿게 하였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타고난 재능을 보인 뭉크는 의사나 엔지니어가 되기를 바랬던 아버지의 염원에 따라 1879년 크리스티아냐(현 오슬로) 공과대학에 입학하지만 얼마 후 오슬로 미술공예학교로 전과했다. 여기에서 노르웨이 자연주의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를 만나 사사받으며 프랑스 인상주의의 움직임을 접했다. 1885년 파리를 여행한 뒤 고갱과 로트렉같은 후기 인상파 그림에 깊은 감명을 받고 '봄날의 칼 요한 거리'(1891)나, '저녁 때의 칼 요한 거리'(1892)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뭉크는 이 시절 사회적 관습과 예술에 대해 보헤미안적 개방성을 가진 헨릭 입센, 크누트 함순, 스테판 말라르메 등 유명 문예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살아있는 인간성을 가진 인물의 창조에 커다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유년의 어두운 기억 때문에 자신이 요람에서부터 죽음을 알게 된 사람이라 자주 말한 뭉크는 흔히 '절망의 화가'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인간의 원초적 모습 구현을 통해 평생 동안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는 생명의 신비성을 추구했다.

30대에 들어서는 문화 후진적인 19세기 말의 북유럽을 탈피하고자 베를린으로 건너가 독일 표현파와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1892년 독일 미술계로부터 초청받아 개최된 베를린 개인 전시회에서 대다수의 관객으로부터 예술에 대한 모독이라는 야유를 받았지만, 소수이긴 해도 새로운 예술적 시도라는 호의적 반응도 끌어내었다. 이때부터 1908년까지 독일생활을 한 뭉크는 1920년대에 접어들어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 되었다.

 

나치스 시대에는 나치정권으로부터 초기 정치선전적 목적에서 상당한 환영을 받았지만, 뭉크가 이 정부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자 퇴폐 작가로서 크게 폄하되는 수모도 겪었다. 화가로서 뭉크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 내면의 불안과 공포감을 구체성을 띤 상징 속에 표출하고자 했다. '절규', '생명의 춤', '흡혈귀', '죽음의 소녀' 등은 이런 회화적 개성을 잘 드러낸 작품으로 여러 상징주의파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발산했다.

 

그의 그림들은 마치 지옥의 유황불에서 방금 건져낸 것처럼 흐물흐물하고, 등장 인물들은 금방이라도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며 화폭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차가우면서도 빛바랜 붉은 색조들은 마치 오로라의 극광처럼 너울거리며 현실 공간조차 환상의 환영으로 만들어버리는 충격의 느낌을 만들어 내었다.

 

뭉크에게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죽음의 사선을 넘나드는 일이었다. 우리는 뭉크를 통해 한 개인의 우울을 발견하지만 더 나아가 그가 살았던 세기 말의 시대적 우울감도 추출해 낼 수 있었다. 그 어떤 개인도 자신의 시대와 동떨어져 살 수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가 그의 그림 구석구석들에서 거장의 솜씨로 재현된 것이었다

 

 

뭉크 Edvard Munch 의 일생


                                                             아래글은 http://llemons.egloos.com/1329932에서 옮김
    

이 연재는 노르웨이에 있는 뭉크기념 박물관 홈페이지에 있는 뭉크의 일생 (영문본)을 번역한 글입니다. 저는 미술에 대한 조예가 거의 없어 특별히 뭉크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장정일의 소설 「아담이 눈뜰 때」를 일다가 자주 등장한는 뭉크라는 화가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겼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제가 어디선가 본 그림들도 있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박물관 홈페이지까지 찾게 되었고요, 처음엔 3-4장 되겠지 했는데 워드파일로 복사해 놓고 보니 일생을 써놓은 글이 무려 10장이 넘었습니다;ㅅ;! 현재 계속해서 번역중이고 내용을 보고 제 임의대로 연재물로 끊을 수 있을 정도에서 한번 씩 끊어 번역 연재 하도록 하겠습니다. 뭉크에 관심 있으신 분이라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o;

* 뭉크 기념 박물관 홈페이지
   - http://www.munch.museum.no/?lang=en
   - http://www.munch.museum.no/?id=&mid=&lang=no



뭉크 Edvard Munch 의 일생 1 - 유년기


 “성직자와 뱃사람 같은 두 힘의 합은 웃음거리가 이다.”

이것은 에드바르트 뭉크가 스스로 자신의 정신적 무게추로써 물려 받은 상충하고 있는 힘에 대한 시각을 말한 것이다.

그의 가족 내에서 성직자와 뱃사람으로 대표되는, 이 문자 그대로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이 두 가지의 힘은 그의 인생을 특징지었다고 할 수 있다.

뭉크는 어린 시절의 자기 삶에서 뚜렷이 드러나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예술에서 나타나게 되는 이 대조와 간극의 핵심을 완전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주 성공적인 비유는 아닐지라도, 뭉크는 그가 물려 받은 기질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지배하였는지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내가 나의 인생의 항해로 내던져졌을 때, 나는 아주 낡고 썩은 재료로 만들어진 배 같았다. 그것은 만든 사람에 의해 폭풍우가 치는 바다로 보내졌고 몇 마디 말이 보태졌었다. ‘네가 조난당하게 된다면 그것은 네 스스로의 잘못이고, 그리고 너는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에서 타게 될 것이다.’”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Hedmark의 Løten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면허의사였던 그의 아버지 Christian Munch는 그곳 군수비대의 의무관이었다. 그의 동료였던 Elverum의 의사 Munthe의 집에 방문했을 때 그 집의 하녀로 고용되어 있던 Laura Cathrine Bjølastaddhk와 알게되었다.

44살의 의사 Christian Munch와 23살의 결핵환자였던 Laura는 1861년 결혼한다.

 뭉크의 부모는 다른 배경과 다른 환경출신의 사람들이었다. Laura의 아버지는 성공한 선장이자 목재상이었다. 그는 나중에 그의 재산을 잃는다. 결핵은 그들 가족에게 대대로 물려졌다. 뭉크는 그의 주치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목축업을 하던 강한 의지력의 가족 출신이었다. 그러나 결핵으로 뼛속까지 썪썩어들어간 가족이기도 하였다."

반면 뭉크의 가족은 중산층, 성직자, 그리고 예술로 특징지어진 가족이기도 하다.

뭉크는, “나의 아버지는 시인 집안 사람이었다. 그것은 천재라는 신호이기도 하였지만, 타락의 증거이기도 하였다." 라고 말했다.

뭉크의 부모는 어쨌든 신에 대한 경건한 믿음을 같이 하였고, 그것은 이 가족의 삶과 가정을 모두 특징지었다.

'저는 우리가 함께 가족으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이 신의 의지였다고 믿습니다.'라고 뭉크의 아버지는 그의 장인에게 편지 썼었다.

 뭉크의 부모들이 결혼한지 일년이 되었을 때, 첫번째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다. 이 Johanne Sophie와 이듬해에 태어난 아들은 이들이 빌린 Engelhaug 농장에서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이 아이는 병약해 보였고, 집에서 세례받기 위하여 목사가 즉시 호출되었다. 후에 봄이 되어서야 이 세례는 Løten 교회에서 재차 확인되었다. 뭉크는 가족이 Løten으로 이사를 갔을 때 겨우 만 1살이었다.

 1864년에 뭉크의 아버지 Christian Munch는 Kristiania의 Akershus 주둔지의 의무관으로 임명되었다.(당시에 노르웨이 수도를 Oslo라고 불리게 되었다)

뭉크의 가족은 수도에서의 생활을 기대하였다. 그들은 주둔지와 가까운 아파트로 이사를 갔고, 그곳은 다른 세 자녀들이 태어난 곳이었다. 1865년에 Peter Andreas, 1867년에 Laura Cathrine, 1868년에 Inger Marie가 태어났다.

아이들의 어머니는 그러나 계속해서 쇠약해져 갔고, 마지막 출산을 살아서 견딜지 기대하기 힘들었다. 1868년 1월 12에 그녀는 그녀의 가족들에게 작별의 편지를 썼고, 그것을 그녀의 장녀가 먼저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녀는 편지에서 '하느님께서 하나로 묶어 주신 우리가 다시 헤어지지 않도록 천국에서 만날 것'이라는 희망을 적었다. 이 편지는 자주 가족들이 모였을 때 큰 소리로 읽어졌으며, 뭉크의 아버지 Christian Munch가 자녀들을 양육하는 지침이 되었다.

 같은 해에 뭉크의 가족은 Pilestredet 30에 있는 좀 더 나은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그 곳은 도시의 끝자락에 있는 전원적 환경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여기서 뭉크의 어머니는 1868년 12월 29일에 사망했다. 뭉크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마지막으로 갖고 있는 기억은 바로 이 집의 거실에 존재한다.

“성탄절 나무에 불이 켜져 있었고, 어머니는 검은색 두꺼운 치마를 입으신채 소파의 한가운데 앉아계셨다. 창백하고 조용하게. 5명이 어머니의 주변에 둘러섰고, 아버지는 마루를 왔다갔다 하시다가 어머니가 계신 소파옆에 서셨다. 그녀는 미소지으셨고, 눈물이 그녀의 뺨에 흘렀다." 
 

오랜시간 동안 아이들을 도우며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 어머니의 여동생 Karen Bjølstad는 뭉크의 집으로 이사를 와서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Pilestredet에 관련된 우울한 기억들에도 불구하고, 뭉크는 이 시기를 행복했던 시절로 떠올렸다. “우리는 그곳에서 건강했으며, 그 마을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1875년에 뭉크의 가족은 다시 이사한다. 이번엔 Grünerløkka라는 수도의 동쪽 끝부분의 교외였다. 그곳은 춥고 외풍이 심한 공장 직원들, 장인 또는 미혼의 점원이나 행정원들을 받는 아파트 구역이었다. 하지만 뭉크 아버지의 비교적 형편이 나은 친척은 수도의 서쪽에 보다 환경이 나은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뭉크의 아버지는 새로운 마을에서 개업의로서 군대에서 받는 적은 소득을 늘리고 싶어했다. 뭉크의 가족이 매우 가난했던 사실은 아마도 뭉크의 부친이 경제적 관념이 매우 부족했거나 경제적 수단이 매우 제한적인 환자들을 만났을 때 약해지는 마음때문이었을 것이다.

 

 Karen Bjølstad는 뭉크의 가정을 완고하지만 사랑의 손길로 돌보았다. 그녀의 현명함과 상상력에 힘입어 뭉크의 가족은 아직 중산층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인을 부리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뭉크의 가족은 실제로 물질적인 부족을 겪진 않았다. Karen Bjølstad는 이끼와 나뭇잎을 이용하여 콜라쥬를 만들었다. 그것은 그 마을의 가게에서 많은 인기를 끌며 팔렸다. 이 작업은 결국 가계에도 중요한 기여를 하였고, 가정의 아이들에게도 중요한 활동이 되기도 하였다. 그들의 이모로부터, 그들은 종이에서 실루엣을 따내는 법을 배웠고, 이끼와 갈대 줄기 등을 가지고 하나의 완전한 풍경을 만들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또 아이들이 그림을 그려 볼 수 있도록 고무한 사람이었다. 아이들의 작품은 상당히 의미있게 취급되었고, 후손들이 볼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보관되었다. 뭉크는 당시의 작품들 하나하나를 기억했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집안 어딘가에 있는 특별했던 어린시절의 그림을 찾는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뭉크가 그린 가장 오래 보존된 그림, 예를 들어 집안 모습을 그린 그림 등은 그가 이미 12세의 나이에 아주 체계적으로 작업했음을 알 수 있다. 어린시절 뭉크 작품의 대부분은 작품의 모티브를 집주변에 있는 가구나 다른 객체들에서 끌어오고 있다. 모험이나 역사로부터 끌어온 모티브 또한 나타나고 이것은 그의 아버지가 큰 소리로 읽어주었던 책들이 아주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뭉크의 아버지는 문학과 역사에 대한 아주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전설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그의 형제 P.A.에 의해 쓰여진 노르웨이 역사에 대한 주요 저작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뭉크는 가족들 사이에서 큰 소리로 들었다. 자주 읽혀진 것들 중에는 모험담과 귀신 이야기도 있었다.

 

 1877년에 뭉크의 가족은 새로운 비극을 겪는다. 장녀인 Johanne Sophie가 결핵으로 사망한 것이다. 뭉크는 자신도 어린 시절에 자주 병치레를 했고, 그는 만성 기관지 천식으로 고통받았으며, 류머티즘에 의한 고열을 여러번 겪었다. 이 겨울 중 오랜 기간 동안 그는 집안에만 있어야 했고 그는 개인 교습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의 어린시절은 모든 측면에서 집이 그의 일생의 중심이었다. 그가 그의 어린시절 교육을 받고, 그의 회화 교육을 받도록 준비한 것도 바로 집이었다. 더불어 현대 작가로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영감들을 제공하게 된 곳도 바로 가정과 집에서의 경험들이었던 것이다.

 

 

 

<출처;kr.blog.yahoo.com/narah_kim> 

 

 http://blog.daum.net/doyota91/1616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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