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영화

영화 빠삐용(Papillon) ]

조용한ㅁ 2015. 3. 25. 11:27

영화  빠삐용(Papillon) ]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문득 떠오르는 영화가 바로 이 영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렇다 할 여자 주인공 없이도 150분의 상영시간이 결코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영화, 그리고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는 의식주(衣食住) 외에 또 한 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자유라는 것을 깨우쳐주는 영화,

 

 

 

 

 

그리고 또 하나의 메시지….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 중 하나, 살인죄 누명을 쓴 빠삐용이 사막 한가운데로 걸어오고 맞은편에 재판관과 배심원들이 앉아있습니다. 그는 “나는 살인을 하지 않았어요. 나는 결백합니다.”하고 무죄를 주장합니다.

 

그러자 재판관은 “그건 맞지만 너에게는 분명 죄가 있다, 네 죄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다. 그것은 인생을 낭비한 죄다.” 하며 유죄를 선고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시인합니다.

 

 

 

 

 

바퀴벌레를 잡아먹는 끔찍한 장면이 나오는 영화 <빠삐용(papillon)>에서 주인공이 꾼 꿈의 한 장면입니다.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큰 죄라는 강렬한 메시지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합니다.

 

가슴에 새긴 나비 문신 때문에 빠삐용(나비라는 의미)으로 불리던 프랑스 청년 앙리 샤리에르는 1931년 유흥가에 놀러갔다가 이상한 사건에 연루되어 살인자의 누명을 씁니다. 종신수(終身囚)가 된 그는 남미 적도 부근에 있는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명 높은 형무소에 수감되죠.

 

 

 

 

 

거기서 11년 동안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혹심한 더위 속에서 강제노역을 하다 여덟 차례에 걸쳐 탈출을 시도하게 되는데….

 

영화 <빠삐용>은 앙리 샤리에르의 동명(同名)의 자서전을 토대로, <혹성탈출(1968년)>과 <패튼대전차군단’(1970년)>을 연출한 거장 프랑클린 J. 샤프너 감독이 1973년에 만든 미국영화입니다. 개성이 뚜렷한 두 캐릭터(빠삐용과 드가)를 등장시켜 고립상황에서의 인간의 심리변화와 대응양상을 심도 있게 탐구한 걸작입니다.

 

 

 

 

 

빠삐용으로 나온 스티브 맥퀸과 드가로 나온 더스틴 호프만의 명연기가 일품이었고, 주제가 ‘Free as the wind(바람처럼 자유롭게)'도 이 영화를 살려주는데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 화면으로 보는 영화 줄거리 ]

 

 

 

무죄를 주장하는 빠삐용은 포주 살해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남미의 적도 부근에 있는 프랑스령인 기아나 형무소로 호송됩니다. 호송되는 배안에서 빠삐용은 지폐 위조범으로 체포된 드가를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드가에게 돈이 많다는 정보를 입수한 빠삐용은 드가의 생명을 위협하는 다른 죄수들로 부터 그의 신변을 보호해 주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하며 둘은 서로 협력자의 관계가 됩니다.

 

 

기아나 형무소에 도착한 빠삐용은 드가로부터 약속받은 돈으로 억울한 형무소 생활을 탈출할 계획을 세우며 수감생활에 적응해 갑니다.

 

 

 

하지만 노역근무 중에 위험에 처한 드가를 구하려다 탈주범이 된 빠삐용은 체포되어 말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먹고 마시는 것도 제한된 혹독한 독방에 2년동안 갇히게 됩니다.

 

 

 

자신 때문에 독방에 갇혀 고생하는 빠삐용을 위해 드가는 배식때마다 코코넛 열매를 빠삐용 방에 몰래 넣어 줍니다.

 

 

 

그러나 코코넛 반입은 형무소 소장에게 발각되고 누가 코코넛을 보냈는지 범인을 추궁했지만 빠삐용은 범인을 누설하지 않습니다. 이에 격분한 소장은 모든 햇빛을 차단하고 식사량도 반으로 줄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어둠과 굶주림의 공포로 빠삐용은 점점 기력을 잃어가고 급기야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바퀴벌레까지 잡아 먹으며 지옥같은 독방생활을 참고 견뎌냅니다.

 

 

 

소장의 잔인한 체벌을 견디며 처절했던 2년간의 시간을 끝낸 빠삐용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마침내 독방문을 나섭니다.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은 빠삐용에게 진정한 우정을 느낀 드가는 초죽음이 되어 독방에서 나온 빠삐용을 극진하게 보살펴 줍니다. 또한 자신의 아내와 변호사를 통해서 빠삐용의 형량을 3년 정도로 낮출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빠삐용은 3년이란 시간도 자신은 기다릴 수 없다며 탈출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드가는 빠삐용을 설득하지 못하고 그의 탈출을 적극적으로 돕기로 합니다.

 

 

 

마침내 형무소에서 음악회가 열리는 밤 시간을 틈타 빠삐용과 일행은 탈출을 시도하고 망을 봐주던 드가는 빠삐용과 일행이 경비병에게 발각될 위험에 처하자 경비병을 제압하고 형무소 담을 넘어 함께 탈출을 감행합니다.

 

 

형무소 담을 넘은 빠삐용 일행은 우여곡절 끝에 나병 환자의 도움으로 배를 구해서 강을 건너 콜롬비아로 탈출합니다.

 

 

 

콜롬비아 해안에 도착해서 성공을 코앞에 둔 순간 빠삐용 일행은 해안을 지나던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도주하지만 드가와 일행은 붙잡히고 빠삐용만 군인들의 추격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군인들에게 쫓기던 빠삐용은 원주민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위기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안락한 생활을 누립니다. 하지만 빠삐용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안락한 삶이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원주민촌을 떠나기로 합니다.

 

 

 

빠삐용은 삼엄한 검문을 젊은 수녀의 도움으로 무사히 통과하고 천신만고 끝에 수녀원에 몸을 숨기게 됩니다. 자신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원장 수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빠삐용은 원주민에게 얻은 진주를 원장 수녀에게 맡기며 자신의 결백을 호소합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원장 수녀의 신고로 빠삐용은 다시 군인들 손에 넘겨지고 그토록 갈망했던 탈출은 실패로 끝납니다.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빠삐용에게 원장 수녀는 말합니다.

 

 

"만일 당신이 죄가 있다면 굶주린 아이들에게 많은 양식을 주었으니 속죄하는 것이고, 죄가 없다면 잡혀가도 두려워할 게 없겠죠."

 

 

결국 빠삐용은 2차례의 탈출시도에 대한 벌로 다시 그 지옥같은 독방에서 5년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5년간의 독방생활을 마치고 나온 빠삐용은 무기수들만 사는 그래서 살아서는 어느 누구도 그 섬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악마의 섬으로 보내집니다.

 

 

 

 

 

빠삐용은 그 곳에서 가축을 키우고 밭을 일구며 정착해서 살고 있는 드가를 발견합니다. 드가는 자신의 아내가 모든 재산을 빼돌리고 자신의 변호사와 결혼했다는 배신감에 모든 희망과 꿈을 포기한 채 그 섬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죠.

 

 

 

 

어느 날 절벽 아래에서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던 빠삐용은 코코넛을 담은 자루를 이용하면 7번째 오는 큰 파도를 이용하면 섬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드가와 함께 탈출하기로 합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조류가 밀려오는 날이 되자 빠삐용과 드가는 코코넛 자루를 들고 절벽 위에 올라섭니다. 하지만 4번째 파도가 왔을 때 드가는 빠삐용에게 자신은 뛰어 내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드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빠삐용에게 말합니다.

 

"자넨 죽을거야."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빠삐용이 대답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힘껏 마지막 포옹을 나눕니다.

 

 

 

7번째 파도가 왔을 때 빠삐용은 자유를 찾아 절벽 아래 파도치는 바다를 향해서 한 마리 나비처럼 몸을 던집니다.

 

 

 

빠삐용을 실은 코코넛자루가 높은 파도를 넘어가자 드가의 얼굴에 미소가 띠는가 싶더니 일순간 걱정과 회한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뀝니다. 빠삐용을 실은 코코넛 자루가 멀어지자 드가는 자신의 코코넛 자루를 뒤로한 채 쓸쓸하게 발길을 돌려 자신의 삶으로 향합니다.

 

 

 

 

파도가 거세게 부서지는 해안을 벗어난 빠삐용은 세상을 향해 크게 소리칩니다.

 

 

"이 놈들아, 난 아직도 여기 살아 있다구!!"

 

 

 

[ 탈출 후의 빠삐용의 인생 ]

 

 

탈출 성공 후, 영화에서는 보여주지 않은 실제 빠삐용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야자더미 위에 몸을 뉘이고 망망대해를 둥둥 떠가며 "나는 자유다(I am free!)"라고 외쳤듯 정말 빠삐용이 그가 그토록 열망하였던 자유라는 것을 찾기는 찾았을까요?

 

악마의 섬을 탈출한 빠삐용은 베네주엘라에 자유민으로 정착하게 되고, 그곳에서 잠시 광산노동자로 일하지만 제버릇 개 못준다고 그곳에서도 파리에서 갈고닦은 뒷골목 실력을 발휘하여 곧 전당포털이, 은행털이등 어둠의 세계를 전전하다가 아마도 어느 전당포나 은행이나 크게 한탕한 밑천으로 짐작되는 자금으로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제법 큰 규모의 여관과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게 됩니다.

 

그가 60세 되던 해인 1967년 카라카스의 대지진때 빠삐용의 잘 나가던 여관과 나이트클럽은 잿더미가 되는데 정부로부터 한푼의 재해보상도 못 받고 무일푼이 된 것으로 보아 그 영업장들은 아마도 빠삐용식의 불법, 무허가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늙으막에 무일푼이 되자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어 자리잡고 앉아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자서전 형식으로 집필한 것이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돈방석에 앉게 되고 세계적인 명사의 반열에 오릅니다. 그리고 그의 자서전이 영화화되던 1973년 스페인에서 암으로 사망합니다.

 

 

 

[ 나비처럼 자유롭게 살다간 명배우,스티브 맥퀸 ]

 

 

 

 

 

 

< 영화에 데뷰하기까지,영화같았던 삶>]

 

 

스티브 맥퀸은 그의 아버지를 몰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맥퀸이 인디아나주의 비치 그로브라는 곳에서 태어난지 6개월 만에 그를 버렸고, 그는 어머니와도 별로 사이가 안 좋았던 것 같습니다.

 

 

 

 * <대탈주>에서

 

 

 

"어렸을 때 난 스스로 나 자신을 돌보는 법을 배워야 했다. 대화할 상대가 아무도 없었고, 난 늘 혼자였다. 그것이 내가 자립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 것이다."라고 맥퀸은 훗날 가끔 말하곤 했죠. 사춘기에 접어들어 L.A 로 이사온 후 깡패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는데,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인근에 있는 비행청소년 수용시설인 <The California Junior Boys Republic>에 보내 버렸습니다.

 

 

 

그곳에서 맥퀸은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지만(그래서 나중에 <빠삐용>이나 <대탈주>에서 명연기를 한 것은 아닐런지) 잡혀 다시 돌려 보내지곤 했습니다. 맥퀸은 후일 <Boys Republic>이 그를 올바른 길에 올려 놓았다고 공을 돌리고, 스타가 된 이후에도 자주 그곳을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 <산파블로>에서

 

 

1983년에 그를 기려 스티브 맥퀸 센터라고 명명된 빌딩이 세워졌습니다. 건물 안 동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씌여 있습니다.

 

 

 

"스티브 맥퀸은 문제아로 여기 왔지만, 사나이가 되어 떠났다. 그는 나중에 영화계에서 스타 대열에 올랐지만, 이 캠퍼스로 자주 방문하기도 했고 그의 재산도 일부 기부했다. 그의 재산은 이곳 학생들과 앞으로 올 학생들에게 희망과 격려가 되고 있다."

 

 

 

 * <산파블로>에서

 

 

 

18개월간의 Boys Republic 생활을 마치고 그는 1946년 4월 그의 어머니가 보내준 돈으로 당시 어머니가 살고 있던 뉴욕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죠.

 

 

1년간 그는 뉴욕에서 선원생활을 하다가 해병대에 입대하여 알라스카 근방에서 군사훈련 중, 운송선 한척이 모래톱에 부딪치면서 탱크 몇 대와 그 속의 승무원들이 얼음물 속으로 내팽겨진 적이 있었습니다.

 

 

 

 * <겟 어웨이>에서

 

 

 

많은 해병대원들이 바로 물에 빠졌으나, 탱크로부터 나올 수가 없었죠. 맥퀸은 차가운 북극의 바닷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 거의 동사 일보 직전의 병사 다섯명의 목숨을 혼자 구해냈습니다.

 

 

 

맥퀸은 이 영웅적인 행동으로 대통령으로부터의 무공훈장 수여와 함께, 당시 대통령이었던 트루만의 요트를 경비하는 the Honor Guard의 일원으로 선발되었습니다. 그는 1950년 4월 제대 했습니다.

 

 

 

 * <겟 어웨이>에서 알리 맥그로우와...촬영이 끝난후 두사람은 결혼에 골인

 

 

 

< 영화배우가 되기까지 >

 

 

"해병대에서 제대한 후 난 텍사스로 가서 유전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캐나다로 올라가 벌목꾼으로 일했다. 그 후 뉴욕으로 가 한달에 19달러를 주고 샤워실도 없는 아파트를 구하고 TV가게에서 배달일이나 신발가게에서의 일을 했다. 가난하면 먹고 살기위해 일해야 한다. 원하는 일만 할수는 없다."라고 나중에 맥퀸은 말했죠.

 

 

 

 * <네바다 스미스>에서

 

 

 

 

당시 맥퀸과 데이트하던 어느 여배우 지망생이 그에게 연기를 해볼 것을 제안했고, 다행히 그는 뉴욕의 유명한 연기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는 그곳에서 3년을 공부했습니다.

 

 

"난 열심히 공부했으며, 다른 농땡이꾼들과는 달랐다. 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길 원했으며, 내가 하는 일에는 뛰어나야 했다. 나에겐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 <네바다 스미스>에서

 

 

 

 

"연기학교의 학비는 매우 비싸, 난 학비를 대기위해 야간에 우체국 트럭을 모는 직업을 가졌다. 초저녁부터 새벽 2시 반까지 운전하고, 아침에는 학교에 가는 생활을 1년을 했는데,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연기학교를 졸업한 후 브로드웨이의 연극무대를 거쳐 할리우드로 진출하게 됩니다.

 

 

 

 * <블리트>에서

 

 

 

 

< 나비처럼 자유롭게 살다간 스티브 맥퀸 >

 

 

스티브 맥퀸은 헐리웃 영화계에서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액션물'의 첫번째 스타였죠. 30-50년대의 고전적인 스튜디오풍 헐리웃 영화시대가 끝나가면서 60년대에 접어들면서 빌딩, 도시, 오토바이, 자동차, 형사 등이 등장하는 현대 도시적 스타의 이미지에 그는 썩 잘 어울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 <블리트>에서

 

 

 

말을 타고 권총을 타는 서부극이 아닌 오토바이나 스포츠카를 사정없는 모는 터프한 남자들, 멋진 연미복을 입고 귀부인과 춤을 추고 파티를 하는 신사가 아니라 점퍼를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도시를 배회하는 터프가이들,그렇게 영화의 주인공이 변해가고 빌딩숲의 도시가 본격적인 영화의 배경이 될 때 스티브 맥퀸은 그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이죠.

 

 

1956년 폴 뉴만이 주연한 <상처뿐인 영광>에서 메인 타이틀에도 올라가지 못하는 단역으로 출발한 스티브 맥퀸은 불과 2년 뒤에 주연급 배우로 올라섭니다.

 

 

 

 

 * <대탈주> 촬영장에서...왼쪽부터 제임스 코반,존 스타제스 감독,맥퀸,찰스 브론슨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주목받는 스타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스타덤에 오르고 6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인기배우가 된 것은 명장 존 스타제스 감독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존 스타제스 감독은 3편의 영화에서 스티브 맥퀸을 출연시켰습니다.1959년 프랭크 시나트라와 지나 롤로브리지다 주연의 <전쟁과 애욕>에 조연으로 출연했고, 여기에 함께 출연했던 찰스 브론슨과 함께 율 브리너가 주연한 걸작 서부극인 <황야의 7인>에 비중있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 <대탈주>에서

 

 

그리고 3년 뒤인 1963년 드디어 같은 존 스타제스의 영화에서 제1주연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탈주영화의 대명사가 된 <대탈주(The Great Escape)>가 바로 그 영화였죠. <대탈주>에는 <황야의 7인>에 함께 출연하였던 찰스 브론슨과 제임스 코반도 다시 함께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대탈주> 이후의 스티브 맥퀸은 그야말로 순탄대로였죠. 계속 주인공 역할만 맡았으며 터프하고 고독한 현대 도시의 남자 역할을 맡게 됩니다. 캐리 그랜트나 존 웨인, 게리 쿠퍼 시절의 헐리우드 주연배우들은 예의바르고 정의로운 남자들이었지만 스티브 맥퀸, 말론 브란도,폴 뉴만의 시대가 되었던 60년대는 약간 삐딱하고 거칠고 터프하고 아웃사이더적인 스타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 <황야의 7인>에서 

 

 

 

맥퀸은 65년 <신시내티 키드>에서 뒷골목 도박사로 나와서 에드워드 G 로빈슨과 멋진 한판대결을 벌였고, 66년 <네바다 스미스>라는 서부극에서는 부모를 살해한 원수인 칼 말덴을 찾아서 복수를 불태우는 청년으로 등장합니다. 같은 해에 <사운드 오브 뮤직>의 감독 로버트 와이즈의 전쟁 로망스 대작인 <산파블로>에서 주인공역을 맡기도 합니다.

 

 

1968년에는 카 레이스의 전설이 된 영화인 <불리트>에서는 주인공 형사 불리트 역을 맡아 스피디한 원조 카레이스 장면을 멋지게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 <황야의 7인>에서

 

 

 

스티브 맥퀸의 강렬함이 돋보인 영화는 1972년 작품인 <겟 어웨이>였습니다. 폭력의 미학으로 유명한 샘 페킨파 감독의 범죄 액션물인 <겟 어웨이>에서 스티브 맥퀸은 <러브 스토리>의 알리 맥그로우와 짝을 이루어서 은행털이 역할을 맡아서 엄청난 액션과 터프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두사람은 나중에 결혼하기에 이릅니다.

 

 

 

70년대에 들어와 출연한 <빠삐용>은 그의 영화 이력에서 큰 획을 긋는 작품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빠삐용=스티브 맥퀸이 될 정도로 이 영화는 세계적인 히트를 쳤고, 국내 개봉시에도 재개봉관에서 조차 빈 좌석이 없을 정도로 인파를 이루었습니다. <빠삐용>에서 맥퀸이 바퀴벌레를 잡아먹던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죠.

 

 

 

 * <타워링>에서

 

 

 

<빠삐용> 이후 출연한 존 길러민 감독의 대작 패닉물인 <타워링>에서 그는 역시 대단한 톱 스타인 폴 뉴만과 공연하게 되는데, 두 사람간의 묘한 신경전이 느껴질 정도로 두 사람은 열연을 보여주었습니다. <타워링>은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고, 아카데미 3개 부문상을 수상하였습니다.

 

 

 

 

1963년 <대탈주>부터, 1974년 <타워링>까지 11년간은 스티브 맥퀸의 전성기였죠. 그러나 <타워링> 이후 그는 단 3편의 영화에만 출연하였고, 6년 후인 1980년에 50세의 나이로 그는 심장마비로 이승을 하직하게 됩니다. 50세라는 짧으면 짧은 인생을 살았던 그는 언제나 <빠삐용>의 주인공처럼 나비처럼 자유롭게 살아갔던 스타였습니다.

 

 

 

 

 * <타워링>에서

 

 

 

 

 

* 영화의 마지막 장면 동영상, 그 아래는 앤디 윌리암스가 부르는 영화 주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