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가을 ........................................황동규
"더 비린 사랑 노래 2"
..............................- 황동규 시인 -
오늘은 안개비가 내리다 말고 다시 공중으로 올라갔습니다. 먼지 너무 많아 땅을 채 적시고 싶지 않았을까요. 많은 사람 속에서 안 보이는 사람이 되어 거리를 걸을 때 그중 편안합니다. 두리번대며 상점 속을 살피기도 합니다. 얼마 안 가 안개비도 나를 피하겠지요. 그때 나는 내 몸 적실 비를 찾아 계속 사람 속을 헤매겠습니다.
# 黃東奎 詩集(문학과지성 시인선ㆍ131) 『미시령 큰바람』중에서
"가 을 엔"
.......................- 황동규 시인 -
가을엔 이별의 앞차를 타리. 길 뚫려 미리 터미널에 나가 시간 채 안 찬 차 타듯. 길 양편에서 손짓하는 억새들을 지나 그 뒤를 멋대로 색칠한 단풍들을 지나 낯익은 도시의 바뀐 모습에 한눈 팔다가 광장 한구석 조그맣고 환한 과일 좌판 위에 낙엽 한 장으로, 혈맥(血脈) 한 장으로, 내리듯 과일에 닿기 직전 바람을 놓치고 한번 맴돌며 왜 이곳에 왔나를 환히 잊듯 그렇게 살다 가리.
떠남의 한 모습.
- 同詩集에서 -
■ epilogue -
욕심을 계속 줄였다. 늘 마시던 밤술을 오랜만에 안 마시고 깜빡 시계 차는 것을 잊어버리고 직장에 갔다. 타인의 시간이 내 시간보다 덜 예민했다.
베란다의 벤자민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밑둥에 귀뚜라미도 와서 살고 또 봄이면 민들레씨도 몇 날아와 자리잡고 꽃을 피우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보리수 아래서가 아니라 벤자민나무 아래서도 깨달음이 이룩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트 속이 잠시 적막해진다.
허구fiction만이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희망 자체도 허구가 아닐까?
미완(未完)의 시를 쓰고 싶다. 미완의 태양계를 살다 가고 싶다. 젊은 날 내 혼을 빼앗던 저 성(聖) 베드로 성당의 초완성(超完成)'피에타'보다는 같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죽은 예수를 안고 처연히 앉아 있는 마리아 등뒤에 익명의 순례자가 서 있는 미완의 '피에타'들을 만들다 가고 싶다. 예수와 마리아는 손도 못 대고 순례자만 정으로 치다가 말면 또 어떤가? 미완일 수밖에 없는 작품들에 매달려 끌려가고 싶다. 배와 가슴으로.
이제 시간의 얼굴이 보일 것이다.
"더 비린 사랑 노래 3"
.....................- 황동규 시인 -
그대를 노래에 등장시키지 않으려고 여러 세상을 돌아다녔습니다. 동해에도 가고 남해에도 갔습니다. 해남군 토말에도 갔습니다. 한번은 트럭을 피하려다 차를 탄 채 바로 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안경이 벗겨져 차 속에 뒹굴었고 벨트 맨 어깨가 얼얼했을 뿐 정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엔진을 막 죽인 상처난 차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서 구경했습니다.
- 同詩集에서 -
"더욱더 비린 사랑 노래 1"
......................- 황동규 시인 -
한때는 얼음낀 강물 속까지 들어가 무거운 돌들의 얼굴들을 파 모았지만 이즈음은 소리없이 다니면서 새가 남기고 간 깃털을 모읍니다. 낯익은 까치의 목도리감도 주웠고 이름 모를 새의 노란색 소매 한 깁도 챙겼습니다. (날고 싶었을까요?) 솔개에게 먹힌 참새나 명새의 깃도 모았습니다. 깃에 말라붙은 피, 그 형체는 깊은 침묵이었습니다. 수화(手話)로도 말을 걸 수가 없었습니다.
- 同詩集에서 -
"풍장 45"
................- 황동규 시인 -
며칠 병(病) 없이 앓았다. 책장문들이 모두 열렸고 책들은 길 떠날 채비하고 줄 서 있었다. 더러 외투 껴입고 있는 놈도 있었다.
문밖을 나서니 시야의 초점 계속 녹이는 가을 햇빛. 간판들이 선명해라 지나치는 사람들도 선명해라 책을 들고 걷는 저 여자의 긴 손, 차도(車道)에 바싹 나와 아슬아슬 저 흙덩이의 어깨까지 선명해라, 그 어깨를 만지는 시간의 손가락도. 눈이 밝아졌구나, 아 눈이.
- 同詩集에서 -
"풍장(風葬) 51"
..................- 황동규 시인 -
수인선(水仁線) 협궤차를 내려 걷는다. 하늘에서 문득 기러기 소리 그치고 산 뒤에 숨는 수척한 산 채 사라지려다 만다, 조 숱 적은 머리끝. 철길이 동네 마당을 막 지나가고 있다. 아무 일도 없다, 동네 토종닭들이 겨울 땅을 할퀴고 있을 뿐. 팔목시계 하나가 발톱에 걸려 나오려다 만다. 뽑아본다. 침이 가고 있군.
시간 뒤에 숨어 있는 시간?
- 同詩集에서,
"꿈 꽃"
..............- 황동규 시인 -
내 만난 꽃 중 가장 작은 꽃 냉이꽃과 벼룩이자리꽃이 이웃에 피어 서로 자기가 작다고 속삭인다. 자세히 보면 얼굴들 생글생글 이빠진 꽃잎 하나 없이 하나같이 이쁘다.
동료들 자리 비운 주말 오후 직장 뒷산에 앉아 잠깐 조는 참 누군가 물었다. 너는 무슨 꽃? 잠결에 대답했다. 꿈꽃. 작디작아 외롭지 않을 때는 채 뵈지 않는 (내 이는 몰래 빠집니다) 바로 그대 발치에 핀 꿈꽃.
- 同詩集에서,
"지구껍질에서"
................- 황동규 시인 -
오랜만에 시골서 묵는 밤 잠이 오지 않아 창문을 연다. 저수지 가득 피어오르는 밤안개 속에 새 우는 소리 그 소리 귀에 익지만 이름 잊었다. 소쩍샌가, 자규샌가, 아니면 안개 속에 길 잃은 외로운 가수(歌手)인가?
나도 자주 길을 잃었다. 때로는 사는 동네에서 길 잃고 헤맸다.
마음 구석구석 더듬어도 얼굴과 이름 떠오르지 않는다. 죽지 않고 지구 껍질에서 헤매다보면 다시 만날 날 있으리. 혹시 서로 못 알아보더라도 미소 머금고 지나가리.
- 同詩集에서,
"늦가을 빗소리"
................- 황동규 시인 -
물방울 하나하나가 꽃에 잎에 인간의 몸에 그리고 저희끼리 몸 부딪쳐 만드는 소리 아닌, 땅 위에 뒹굴며 내는 소리 아닌, 서로 간격 두고 말없이 내려와 그냥 땅 위에 떨어져 잦아드는 저 빗소리. 그 소리 마냥 어두워 동공(瞳孔)이 저절로 넓어진다. 나무들의 뿌리들이 보인다, 서로 얽히지 못하고 외로이 박혀 있는 뿌리도. 내 잘못한 일, 약게 산 일의 엉켜진 뿌리들도 보인다. 멧비둘기 한 마리가 푸덕이고 날아간다. 마음 바닥에 잦아드는 저 빗소리.
시간이 졸아드는 소리.
- 同詩集에서,
"풍장 39"
................- 황동규 시인 -
복수(複數) 여행, 항구 끝의 여관들, 저 불면의 밤들, 아무리 취해도 코고는 일행을 끝 점검하고 비로소 자리에 눕던 저 불면의 밤들, 불면의 끝, 혼자 창 열고 가로등과 함께 훔쳐본 파도에 몸 던지기 직전 눈발 춤추던 바다!
그러나 이제는 여행 꾸러미 속에서도 가볍게 누워 잠든다, 고추잠자리 마른 풀잎에 내려 졸 듯. 마지막 술잔에 내장(內臟)을 하나씩 맡기고 누군가 옆에서 인생과 문학을 갖고 놀면 귀 열어논 채 잠든다.
- 同詩集에서,
"풍장 46"
................- 황동규 시인 -
내 관악산 북녘에 살며 때로는 산이 안개 속에 숨는 것을 보았다. 이슬비가 안개를 벗기기도 안개가 이슬비를 다시 감싸기도 했다. 언젠가 마음속 간직해온 것과 헤어져야 할 때, 마음의 것들 마지막으로 책상 위에 벌여놓을 때, 서가에 꽂힌 책 사이에도 끼워넣을 때, 눈앞에서 금방 사라질 것들! 꺼내놓으라면, 관악산부터 내어놓으리. 다녀온 암자도 암자의 약수 그릇도 내어놓고, 늦가을 저녁 어둡기 직전 익숙한 솜씨로 땅을 더듬다 말던 가랑비도.
- 同詩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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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黃東奎 1938- ) 시인. 교수.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과와 동대학원 졸업. <현대문학>에 “즐거운 편지”등이 추천되어 등단. 문명적 소재를 취하면서도 새로운 서정의 세계를 구축하여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높이고 있음. 시집에 <어떤 개인 날>, <비가(悲歌)>,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풍장(風葬)> 등이 있으며 평론집으로 <사랑의 뿌리>, <김수영의 문학>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