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산의 시 모음
노고초(老姑草)
이형산
휘어졌다고 내려보지 마라.
너처럼
꺾이지 않으려고 굽히지 않던 때가 있었고,
멀리 뛰고 추월하려고 굽히던 때가 있었다.
너를 곧게 세우기 위한 흔적이리라.
그처럼
제 몸보다 크게 피운 꽃 보았느냐?
그러하오니,
그 앞에선
머리 숙이든가 무릎을 꿇어라.
*할미꽃·백두옹(白頭翁)이라고도 한다.*
호박꽃 - 이형산
눈물 한 번 흘린 적 없고요
꽃으로 피고 난 후에
천박하게 웃어본 적도 없어요
장미처럼 화려하지 않아서
백합처럼 우아하지 않다고
한 번도 거실로 옮겨지지 않았지만
서러워하지 않을 거예요
탈을 쓴 것처럼
다른 이름으로 개명하지도 않을 거예요
제멋대로 피운 꽃이면 어때요
바위구절초처럼
색깔 바꾸며 살지는 않겠어요
그저 허기진 것들의 입맛이나 맞추며 살 것이니
꽃이니 꽃이 아니니 하는 천박한 언어로
시간 낭비하지 마셔요
황소의 삶 - 이형산
그가 늘 짊어진 것은
멍에였다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것은
고삐였다
그의 유일한 장식품은
신발도 아닌 코뚜레였고
그가 생각을 바꿀 때마다
걸고넘어지는 것은 그 장식품이었다.
그가 지나온 길은
바람 불 때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황톳길이었고
한평생 발 디디고 다닌 곳은
발 빼기 힘든 질퍽질퍽한 땅이었다
그가 파헤친 것은 돌부리 가득한
비탈진 곳이었다
그는 평생을 말하지 않고 살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눈 뜨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처럼 살지 않겠다고
그처럼 살지 않겠다고
잠에서 깰 때마다
되새김질하듯 중얼거리던 내가
그 길을 가고 있다
똑같은 삶을 살고 있다.
한 치 앞인 것 같은데 아득히 멀다
멀리 있는 것 같은데 눈앞에 있다
마음에 와 닿은 것 같은데 어둠만 짙게 깔려있다
- 이형산의 ‘반달’ 에서 -
이름
이형산
내 이력서는
등 푸르렀던 꽁치보다 길다
어물전 꼴뚜기보다 사연 많다
팔려갈 때마다 생겨난 이력
몸은 하나인데 아호도 애칭도 아닌 이름들
자취방을 전전하다 연탄불에 맛이 간 노가리
한때는 거칠 것 없었던 생태
그러다 영하의 날씨에 갇힌 동태
내팽개쳐졌다가 도중에 팔려나갔던 때의 코다리
오랫동안 한직만 맴돌다 얻은 이름 황태
실컷 두들겨 맞고 깨지고 나서 붙여진 이름 북어
처음 이름은 명태라 하오
팔자라고 생각하기엔 참 사연도 많소
나는 누구냐고
나에게 나를 묻다가
뼈아픈 사연 발라낸다
과메기
詩 이형산
무슨 연유로 여기까지 왔을까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떤 것에 의해
무엇 때문에
바람 잘 날 없는 여기까지 왔을까
혹독하기로 이름난 부둣가
보아하니 스스로 선택한 곳은 아닐 텐데
코를 꿰인 채
붙들려 있는 한때는 등 푸르렀던 것
얼었다가 녹았다가 얼기를 여러 번
온기에 녹을라치면
다시 찬바람 불고 눈보라 치고
그러다 몸은 마르고
그렇게 다시
또 다른 이름으로 태어날 것이고
그러다가 또 다른 세상으로
헐값에 팔려갈 것이지만
어디로 가든지 제 몫은 다해
춥고 허기진 것들은
세상은 따뜻해 지겠지.
충남 부여 출생
시집 <들풀처럼 살고, 들꽃처럼 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