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그림/때로는 나도

Happy birthday for me

조용한ㅁ 2014. 8. 17. 15:18

 

내 생일에 맞추어 난이 꽃을 피워올렸다.

재작년, 내 개인전 축하선물로 내가 지기로 있는 카페의 운영자인 지봉님께서 보내주신 꽃.

무엇에고 매이고 싶지않은 성격이어서, 강아지 한마리도 안키우고

꽃 한송이도 심지않는 나에게 개인전 축하선물로 보내온 난초 화분 여섯개가 영 부담스러웠으나

팔리지않은 그림과 함께 내집으로 실려와서 살아온지 2년여.

영양제는 커녕, 물한번 제대로 주지않는 주인을 만나 처음의 우아함은 오간데없어졌지만, 때때로 깜빡 잊고 있었다는듯 차례로

꽃대를 밀어올려 조롱조롱 꽃을 피우며 무척이나 매력적인 향기로 집안을 채우곤 하더니, 그 중 하나가 내 생일에 맞추어 피어준것.

 

내가 태어난 정확한 날은 아무도 기억하지못한다.

해방되던 해.

인지면사무소의 서기였던 나의 아버지는 서산군청의 어느부서로 승진발령을 받아두고 계셨는데,

일본이 패망하면서, 그 기회가 사라졌다고....

4살 위인 내 언니의 기억에 따르면, 경찰서 싸이렌대 아래서 놀고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만세를 부르더라고한다.

그리고 집에 와 보니, 내가 태어나 있더라고.

엄마의 기억속엔,

나를 낳아놓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셔서, 공출을 피하려고 땅에 묻어놓았던 놋그릇들을 파 내놓으면서, '다 틀렸다' 라고 하시더라고.

내나라의 광복이 일본차하에 순응하여 공무원으로 일하던 아버지에겐 또다른 혼란을 가져왔던것.

그 후, 6.25 동란이후까지,

좌익인 삼촌으로 인하여 우리가족은 가난과 혼란속에 지냈던것같다.

나는 순사가 긴 칼로 할머니네 볏섬을 찌르고 다니던것과,

내 새끼 내 놓으라고 울부짓던 할머니의 기억과, 

해미 부엉마위 마을 외갓댁에서 빨개벗고 놀던 기억과,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장삿길에 나섰던 엄마의 기억 따위가 전부다.

 

더 자라서는 간혹 기억되거나 혹은 잊혀지는 나의 생일이

호적에 있는대로 8월15일이라면 "추석날"이어야 하지 않은가 부모님께 물었었다.

물론 추석날은 아니고, 아마도 해방후 몇일날이었던듯.

고모는 내 생일이 칠월열사흣날이라고 하셨고, 엄마는 열나흘날 아니냐고 하셨다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해보니 8월20~21일)

그래서 내딴엔 기억하기 좋으라고 광복절을 내 생일로 해달라고 했던것.

 

그리고 긴 나날이 지나갔다.

해마다 8월이되면, 달력의 안그래도 빨간 광복절날에 수없이 동그라미 치며, "엄마생일"을  아이들에게 주입시키고,

따로 용돈을 더 주며 엄마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라고 부탁하곤 헸다.

예를 들면, 천원을 용돈으로 주면, 500원짜리 손수건을 사오는 등....

그리고 남편에겐 반지 한개씩을 꼭꼭 사다달라고했다.

오직 나만을 위한 선물로는 보석이 최고겠지만, 예나제나 짜디짠 남편이 값비싼 보석을 사올리 없으므로 금반지면 좋겠다고했더니,

몇해동안 한돈짜리 금반지를... 어떤때는 아기돐반지를 늘려서 사올때도 있었다.ㅋㅋㅋㅋ

올해는 100만원을 주었다. 다른이의 1억만큼이나 어렵사리 결심한 돈.

 여행갈거냐고 자꾸만 묻던 아이들 셋은  내 여행경비에 좀 더  보태서 즈이들 아빠의 차를 바꿔주었다.

 

70이란 나이는 특별한가?

때때로 그만 살고싶곤 했던 나로선 참 오래 산 나이.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침울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렇지만,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이만한것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