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글/시

이기철 생의 노래 외....

조용한ㅁ 2016. 4. 20. 10:33


생의 노래

- 이기철-

움 돋는 나무들은 나를 황홀하게 한다

흙 속에서 초록이 돋아나는 걸 보면 경건해진다

삭은 처마 아래 내일 시집갈 처녀가 신부의 꿈을 꾸고

녹슨 대문 안에 햇빛처럼 밝은 아이가

잠에서 깨어난다

사람의 이름과 함께 생애를 살고

풀잎의 이름으로 시를 쓴다

세상의 것 다 녹슬었다고 핍박하는 것

아직 이르다

어느 산기슭에 샘물이 솟고

들판 가운데 풀꽃이 씨를 익힌다.

절망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지레 절망을 노래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꽃잎 하나씩은 지니고 산다

근심이 비단이 되는 하루

상처가 보석이 되는 한 해를 노래할 수 있다면

햇살의 은실 풀어 내 아는 사람에게

금박 입혀 보내고 싶다

내 열 줄 시가 아니면 무슨 말로

손수건만한 생애가 소중함을 노래하리

초록에서 숨 쉬고 순금의 햇빛에서 일하는

생의 향기를 흰 종이 위에 조심히 쓰며

철쭉꽃 따라 / 이기철


철쭉꽃 따라 산을 넘다
지치면 언덕에 누워 풀피리를 불었다

내 부는 풀피리 소리만큼
하늘은 어깨 위에 내려와 앉고

제 혼자 피고지는 패랭이꽃들에도
내 소년은 즐거웠다

연두빛 기슭에서 내가 연두빛이 되어 돌아오는 저녁엔
목매기와 저녁새들만 내 친구가 되었다

또 봄이 가고 봄빛도 제 물에 회색이 되는 날
철쭉꽃 한 송이 꺾어 나는 뉘에게 바쳐야 하나

들 가운데 놓쳐버린 내 신발짝 간 데 없고
내 어깨를 짓밟으며 험한 세월만 흘러갔다

 

 

나무 같은 사람 / 이기철

나무 같은 사람 만나면 나도 나무가 되어
그의 곁에 서고 싶다
그가 푸른 이파리로 흔들리면 나도 그의 이파리에 잠시 맺는
이슬이 되고 싶다

그 둥치 땅 위에 세우고
그 잎새 하늘에 피워 놓고도
제 모습 땅 속에 감추고 있는 뿌리 같은 사람 만나면
그의 안 보이는 마음 속에
돌 같은 방 한 칸 지어
그와 하룻밤 자고 싶다

햇빛 밝은 저자에 나가
비둘기처럼 어깨 여린 사람 만나면
수박색 속옷 한 벌 그에게 사주고
그의 버드나무 잎 같은 미소 한 번 바라보고 싶다

갓 사온 시금치 다듬어놓고
거울 앞에서 머리 빗는 시금치 같은 사람
접으면 손수건만하고 펼치면 저녁놀만한 가슴 지닌 사람
그가 걸어온 길 발에 맞는 평상화

늦은 밤에 혼자서 엽록색 잉크로 편지를 쓰는 사람
그가 잠자리에 들 때 나는 혼자 불켜진 방에 앉아
그의 치마 벗는 소리를 듣고 싶다.

기다림은 나무를 키 크게 한다 / 이기철

기다림은 나무를 키 크게 한다
햇살이 순금의 얼굴로 찾아오면
길 위를 지나는 사람의 마음이
오전의 풀밭 같이 푸르러진다

꽃들이 열매가 되기까지는
바쁜 마음을 내려놓고
돌멩이처럼 기다리자
바람이 그 여린 손으로 길을 쓸 때까지는,
밤에는 외로움을 이긴 나무들이
욕망을 이긴 성자 같다

바람이 나뭇잎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샘물이 땅 위로 솟는다
물소리는 들길을 씻느라 바쁘고
언덕은 놀 한 겹 다시 거는 일로 분주하다

어찌하면 저 굳게 닫힌 집들의 입을 열어
나와 함께 맑은 노랠 부르게 할까
아침이 오면 금새 밝아지는 마을과
오래된 집들에 새 문고리를 달아주자
그들의 하루가 햇빛처럼 신선해지도록
그들의 하루가 노래처럼 즐거워지도록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이기철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 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처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이 기 철

 

요컨대 내 생은 밥숟갈을 위한 노역이었다

나는 누굴 위해 살지 않았고

철저히 나를 위해 살았다

나는 내 월급을 떼어 남에게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든 밥숟갈은 아세였고 곡학이었다

 

나는 남을 사랑할 시간이 없었다

내 안에 꽃피는 시간들이 나를 죄짓게 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용서받아야 하는가

다리가 아프도록 서서 읽은 편지

대합실에서 읽던 시

 

그런데 나는 왜 눈물 흘리는 새에 대해서는

한 줄도 안 썼는가

서리의 예감에 몸을 떠는 나무에 대해서는?

안 굽어지려고 기를 쓰는 분재묘목에 대해서는?

바닥이 즐거운 넙치에 대해서는?

아,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그리운 바보가 된 사람을 위해서는?

 

 

이기철 시집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중에서


생가 1

 

                                 이  기  철

 

이곳에 오면

서쪽 길이 잘 보인다

무너진 다릿목도 보이고

다릿목에서 죽은

물새의 꿈도 보인다

 

백 년 전에 핀

안개꽃이 보이고

동구 밖에 묻힌

흰 달빛도 보인다

 

이곳에 오면

늙은 느티나무의 생애가

보이고

서쪽 길이 잘 보이고

가을에 우는 새의

그리움이 잘 보인다

 

 

이기철 시선집 <청산행> 중에서


인물



이기철 시인, 대학교수
출생
1943년 1월 9일 (만 73세)경남 거창군
학력
영남대학교
수상
2002 대구시 문화상 문학부문  외 1건
경력
1998 영남대 문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이 기 철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꽃이 피고 소낙비가 오고 낙엽이 흩어지고 함박눈이 내렸네
                                             발자국이 발자국에 닿으면 
                                             어제 낯선 사람도 오늘은 낯익은 사람이 되네
                                             오래 써 친숙한 말로 인사를 건네면
                                             금세 초록이 되는 마음들
                                             그가 보는 하늘도 내가 보는 하늘도 다 함께 푸르렀네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면 모두는 내일을 기약하고
                                             밤에는 별이 뜨리라 말하지 않아도 믿었네
                                             집들이 안녕의 문을 닫는 저녁엔
                                             꽃의 말로 안부를 전하고
                                             분홍신 신고 걸어가 닿을 내일이 있다고 
                                             마음으로 속삭였네
                                             불 켜진 집들의 마음을 나는 다 아네
                                             오늘 그들의 소망과 내일 그들의 기원을 안고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가네


이불


이기철



누군가는 떨어지는 꽃잎에도

가슴을 다쳤다고 하지만


투명하고 아름다운 죄가 있다면

나도 풋순 같은 죄를 지어 보고 싶다


사람이 죽는 날까지 사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친 사람이 내겐 없어

무명베 같은 마음 씻어 놓고 섬돌 아래 분꽃 심는다


나는 죄지은 사람을 만나진 못했지만

죄지은 사람의 등도 따뜻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대가 이른 길이, 일생이 무죄여서

그대에게도 통증이 있는지 궁금하다


그대를 사용하는 나는

무통보다 통증이 반가워서


묻는다

이불이여

천부적인 더움이여


나는 언제 그대처럼 가장 낮은 곳에 반듯이 누워

주저 없이 추운 몸을 받을 수 있느냐



이기철 시집『나무, 나의 모국어』, 민음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