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글/시

죄/이기철

조용한ㅁ 2016. 4. 21. 09:55


죄/이기철



요컨대 내 생은 밥숟갈을 위한 노역이었다

나는 누굴 위해 살지 않았고

철저히 나를 위해 살았다

나는 내 월급을 떼어 남에게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든 밥숟갈은 아세(阿世)였고 곡학(曲學)이었다



나는 남을 사랑할 시간이 없었다

내 안에 꽃피는 시간들이 나를 죄짓게 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용서받아야 하는가

다리가 아프도록 서서 읽은 편지

대합실에서 읽던 시



그런데 나는 왜 눈물 흘리는 새에 대해서는

한 줄도 안 썼는가

서리의 예감에 몸을 떠는 나무에 대해서는?

안 굽어지려고 기를 쓰는 분재묘목에 대해서는?

바닥이 즐거운 넙치에 대해서는?

아,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그리운 바보가 된 사람을 위해서는?



이기철 시집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었네 』,[서정시학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