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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그림들/한국의화가 작품

金永太

西洋畵 金永太 畵伯




Kim Young - Tae 畵伯

               미조리에서 65,1 x 53 cm Oil on canvas 1997


Kim Young-Tae 색채로 읽어내는 사물의 진실

김영태 화백의 작품세계 강경호 (시인 문학평론가)
김영태 화백은 1927년 전남 함평군 함평읍 진양리에서 아버지 김수현과 어머니 임순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1년 조선대학교 미술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6.25전쟁 중에는 종군화가로 활동하였고 1949년 ,조선대 부속중학교를 시작으로 이후 1968년 광주공고에서 교직을 물러나 평생 전업 작가로 활동한다.
또한1967년 광주일요화가회를 창립하여 초대부터 제10대 회장 겸 지도교수를 맡아 일을 해왔다.
작품전은 1972년 광주에서 제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해서 100여회의 국내초대전 을 가졌다.
또한 100여회의 외국 스케치 여행을 다녔는데,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지냈다.
김영태 화백은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더 각광을 받는 작가이다. 일본의 모 제과업계의 재벌이 작가를 초청하여 초대전을 갖는등 출품작의 120%를 소진시키기도 하였다.
외국에서는 그림 한점 팔지 못하면서 국내에서 사인과 낙관으로 호황을 누리는 우물 안 개구리식의 작가들에게 일본 및 유럽에서 호평받고 있는 그의 예는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시사하는바가크다.


                인스부르크의 거리 100 x 80,3 Oil on Canvas 1996


대학시절 지도교수였던 김보현 선생에게 유화를 배운 그는 초기에는 사실주의 화풍을 보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인상파의 대가인 오지호 화백에게 사사한 후 인상파 화풍으로 변화를 가진다. 그 때 그는 자연을 통해 자기의 개성과 시각, 이미지와 영감에 따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조형적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인상주의 화풍에서 예술의 진수를 맛 볼 수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연유로 "회화의 모든양식상의 근간을 이루고있는 것은 인상파 예술이다. 오늘의 회화를 이끌고 있는 종합예술은 인상파계열의 회화이며,지금이야말로 세계는 인상파 화풍의 절정을 이루고있다".는 이주장은 그의 신념처럼 여기던 조형사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그의 생각에 좀더 여유가 있다. 즉 "창작행위로 이루어지는 예술양식을 굳이 어떤 이즘이나 화풍이라고 하는 카데고리에 넣어 꿰어 맞추는 것이 바람직 한 것만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신자연주의, 신구상주의, 또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새로운 화풍 등 얼마든지 이름을 붙일 수 있고, 굳이 용어상의 문제가 형식에 얽매이는 것 같아 창작 본래의 의미가 희석되는 느낌을 갖게한다." 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이는 예술이나 인생이나 할것 없이 모든 것이 어떤 경계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그는 노년에 들어 원숙의 경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때 묻지 않고 연륜이 더해질수록 젊어지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그것은 진실에 접근하려고 하는 작업태도와 예술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주의를 실현하려는 그의 미학적인 조형사상 때문이다. 그는 "주어진공간은 절대적인 것이며, 그공간속에 얼마만큼 작가가 염원하는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킬 수 있을 것인가가 작가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제이며, 그는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소재에서 절대해방을 주창하고 있다. 이른바 사진처럼 묘사하는 것은 단순한 재현일 뿐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정된 캔버스에서 화면을 생략하고 소재를 단순화 시켜 캔버스를 절제시켜 미를 창출하는 것이 그의 화면구성이며 예술성을 발현시키는 방법인 것이다. 또한 김영태 화백은 스스로가 아름다움을 표출해내는 최대의강점이 색채미학이라고 주장한다. 색채의 늬앙스나 조화, 배색과 대비 등이 색채공간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고있다. 색채를 통하여 비춰지는 그의 작품세계에서 물상의 현장개념은 큰 의미를 갖지못한다. 그 옛날 유럽의 인상파에서는 주로 팔레트 색을 그대로 썼다. 그러나 김영태 화백은 철저하게 팔레트에서 쓰고자 하는 색을 섞어 사용하다보니 색깔이 부드럽고 화면이 간결해 보인다. 유럽의 인상파가 주로 사물의 표면에 칠해진 빛을 포착하고 그 빛의 움직임을 그리는데 열중한 반면 김영태 화백은 색채를 통해 사물의 진실을 발견해 내는데 관심이 있다.



                         24,25 x 24,4 cm  199黑人女人 24,25   Oil on Canvas


그것은 사물의 내면 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김영태 화백은 항구건 산이건 도시건 간에 형태를 그려내는 데에는 관심이없다. 모티브의 형태를 명확하게, 또는 사실적으로 그려낼 경우 오히려 선명한 사물에 의해 감동이 줄어든다 . 사물이 스스로를 모두 설명해 버리기 때문이다. 즉 사실적인 형태를 강조할때는 사물이 간직하고 있는 내면의 진실보다는 외형의 느낌만 전달되기때문이다. 자연의 형태보다는 그것을 보았을 때의 느낌을 그리기 위해서는 사물의 형태를 왜곡한 모습인 부정형하게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의 그림은 형태보다는 색채에 의해 그 느낌이 결정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김영태 화백은 산과 강 그리고 바다와 마을이나 도시를 즐겨 그리지만 그러나 그것은 느낌과 정신을 끌어내기 위한 하나의 모티브에 불과하다. 그것들로 인해 그림그리기 위한 동기유발이 될지언정 사실 그것들이 갖는 의미는 크지 않다. 즉 김영태 화백이 무엇을 그렸는가는 중요하지 않고 그가 어떤 느낌과 정신을 그렸는가가 더 중요하다 가령 바다위에 내리쬐는 햇빛으로 인해 바다가 주는 어떤 영감, 산에 드리워진 그늘이나 햇빛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깊고 오묘한 느낌 등 여태까지 우리가 알고있는 관념의 두터운 벽을 깨고 지금껏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회화의 세계인 것이다.



 
그는 바다와 산 그리고 마을을 즐겨 그린다. 이것은 초기에서부터 지금껏 수십 년 동안 그려온 그림의 소재들이다. 이것들을 잘 살펴보면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모두가 자연이라는 것이다. 불변하지 않는 자연에의 정신을 끊임없이 깨우쳐 주고 있느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다건 산이건 간에 그 겥엔 언제나 마을이나 도가 있다. 즉 자연 곁에 인간이 놓여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김영태 화백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그리고있는 것이다. 바다와 산, 나무, 도시 건물이 하나가 되어 마치 정물처럼 어우러져 있다.
가끔씩 그려내는 꽃과 인물도 우리가 기억하는 꽃이거나 인물이 아니라,빛과 그늘을 가진 색채로써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물의 또 다른 진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더 이상 꽃이거나 사람이 아니라, 색채라는 빛일 뿐이다. 그것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영태 화백이 어쩌면 설치미술이니 행위예술이니 또는 추상미술이니 하는 고루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구상회화를 지키며 끈질기게 천착해온 까닭은 무엇일까? "구상이나 사실주의가 고루하고 진부하다는 논리는 편견이다. 실험적 방법론을 통해 새롭게 모색하고 있는 현대적 시각의 추상주의가 반드시 앞서가는 예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칫 독선이적 허구에 빠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표현양식의 개념 설정문제가 아니고 표현의 결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훨씬 중요하다. 미술사적 측면에서 볼 때 기존질서가 새로운 미술사조에 밀려 몰락하고 새롭게 태동하는 새로운 미의식의 창조가 옛 자리를 메꾸게 된다는 변증법적 논리의 당위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논거는 창작행위를 배제한 이반적인 논리로만 가능하다. 적어도 창작의 세계에서는 옛과 현대가 공존하는 등 상호 견제와 보완의 구실을 하면서 발전할 때 미술은 꽃 피우는 것이며, 예술이 지향하는 그 본질에 접근해 가는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 의한 전통의 현대적 방법론의 수용이나 추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비록 서구적인 매재를 사용하는 유화일지라도 한국성에 천착하는 세계의 예술양식을 모색하는 탐구정신 때문이다.



                荏浦 65,1 x 53 cm 1991  Oil on Canvas

상대적으로 아무리 현대라고 할지라도 서구적인 발상이나 아류, 또는 모방으로 일관하는것은 존립의 의미가없으며 이 또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점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주상은 , 지나간것 , 낡은것, 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사조의 미술을 아류나 모방으로 따라간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술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서양의 미술재료인 유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일지라도 우리나라의 독창성을 그려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엇던 서구주의가 퇴색되고 있는 시점에 그가 주장해온 한국성 미학의 중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구상양식의 회화를 끝내 고집하면서 최후의 보류처럼 지켜온 그는 ,숙명처럼 주어진 제한된 공간에 미의 극치를 실현하는 것이 예술의 본령이요, 구극의목적, 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해 온 것처럼 구상회화에 대한 믿음 또한 깊다. 그는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피카소의 게르니카, 렘브란트의 자화상, 고흐의 해바라기 등이 명화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가 고전이요, 구상이라고 하는 예술 양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미의영원한 터미널은 구상회화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설치미술이나 행위에술 등은 결코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을뿐더러 예술의 영원성에 배치되는 일관성, 취양성 때문에 공존의 의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단순한 의미만을 부여하고 있다.



                            印度의 勞動者 24,2 x 33,4 cm 2000  Oil on Canvas


최근 팔순을 맞아 김영태 화백은 화집을 펴내었다. 그가 평생 해온 회화세계를 책을통해 집약시킨 것이다. 그러나1976년 2월 광주시 충장로 2가에 있던 화실의 화재로 인해 모든 작품과 미술서적, 화구, 재료 등 미술에 관한 일채를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1976년 이전으 그림은 한점도 남아있지 않다. 아쉽게도 그의 초기작품을 볼 수 없는 것이 실로 안타깝다. 그러나 그가 거둔 예술적 성과는 한국을 넘어 일본, 유럽 등지에서 평가받고있다. 팔순이 넘어 고령에도 그가 여전히 예술 활동을 하는 것은 야외 사생은 물론 외국 사생까지 하는 그의 부지런함에 있다.
이러한 그의 부지런함은, 즉 현장 사생하는 버릇은 어떤 특정한 모티브를 그려낼 때에도 적용된다. 가령 포구나 묘지가 있는 소나무나 숲 속,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봄 풍경이나 초여름의 신록 등, 한 자리에서 각도의 변화나 이동시점을 통하여 많은 소재를 발견하는 등 경우에 따라서는 수십 점을 그려내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초기인상파 화가인 모네가 해질녘에 짚더미나 수련의 모습을 각도에 따라서, 빛의 양에 따라서 그려내던 것과 같다. 이러한 그림그리기는 김영태 화백만이 가진 비방이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검은 大陸 53 x 45,5 cm     1997  Oil on Canvas

그러나 어떤 때는 하나의 모티브에서도 그림 한 점 그려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지난 40년 동안 법성포를 찾았지만 단 한 점의 작품도 그려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림을 두 점이나 그려와 사인까지 하게됐다." "법성포가 몰라보게 변한 것도 아닌데 왜 옛날에는 그렇게도없었던 소재가 지금은 얼마든지 있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예날과는 시점, 시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들 생활 속에서 보는 것, 듣는 것, 먹는 것 느끼는 것 , 이 모두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시절에 별 맛이 없었던 것도 지금에 와서는 최상의 맛이 될 수 있고, 별다른 흥취를 느끼지 못했던 판소리가 지금에 와서는 우리가락의 무한한 흥취로 느끼게 된 것 등이 그러하다"는 고백에서 알수 있듯이 법성포라는 항구 마을을 40년이나 쫓아다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그의 취향, 즉 그의 시각의 차이에서 온 결과라는 것이다.
팔순이 넘도록 그가 해온 예술은 그는 미의 지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즉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선한 것도 아름다운 것이 빠져버리면 진실도, 착함도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는 작가로서의 예술과 생애를 순결무구하고 숭고하개 살아온 우리 시대의 산 증인이요, 스승 같은 모법적인 사람이다.


                 페루의 여인 40,9 x 31,8 cm  1997  Oil on Canvas


金 永 太 略 歷

1927 全南 咸平 出生
1950 육군 종군화가
1951 조대 미술과 졸업 (1회)
1967 광주일요화가회 창립 지도교수1963
1973 호남예술제 심사위원 (미술부문)
1974 문화예술진흥원 지방작가 초대전 출품
1974 미술전(한국 예총회장상 수상
1976 일본 서부시연회 장려상 수상
1977 일본 시연회 입선(동경도 미술관)
1977 일본 구류미연합문화회 초청개인전
1978 일본 시연회 입선(동경도 미술관)
1978 호남 미술전 초대 출품 (서울 신문회관)
1978 부산 현대화랑 초대전 / 무등미술제 초대 출품
1979 서울 리화랑 세종화랑 5인초대전
1979 전라남도 문화상 수상
1980 대만 초대전
1981 日本 島根縣立博物館 個人展
1981 구라파 미술여행
1983 일본 아세아현대미술제 연5년 초대작품 (동경도미술관)
1984 일본 아세아현대미술제 20주년기념행사 현지 참가
1984 현대화랑 초대전 (광주)
1985 Seoul 지하철 3,4호선 개통기념 초대전 출품 (중앙청역)
1986 Seoul Gallery 소품초대전 (서울 신문사)
1986 Seoul Lotte 미술관 초대전
1987 인재미술관 개관기념 초대전
1988 3,27 KBS TV 미술관 전국방영(50분간)/5.1재방영
1988 Seoul Lotte World, 200호 제작
1988 광주 . 전남 미술50년전 초대출품(조대 미술관)
1989 전남미술초대작가전 출품 (광주예총)
1990 동아일보사 70주년기념 백두산 실경사생에 초대
1990 영호남 미술교류전 연6회 초대 출품
1990 영호남 원로미술인 초대전 (89,90)(부산미협)
1991 동아일보사초대 백두산전 (서울예술의 전당)
1991 Fenny 미술관 초대전
1991 광은 미술관 개관기념 초대전 출품
1991 日本國兒島九電 IRIS 화랑 초대전 출품
1981 부산 Tower 미술관 개관 7주년기념 초대전
1992 광주일보사 40주년 기념초대전
1992 광주시립미술관 개관초대전 (초대작가 지정)
1992 영호남 100인 초대전(광주 대구)
1993 NEPAL SKETCH 여행
1993 韓露작가전 참가(MOSCOW)
1993 북구 각국 미술관 순례
1993 광주 鹿兒島교류전 참가 (鹿兒島市立美術館)
1993 전일미술관 개관 초대전 (전남일보)
1993 동아GaIIery 北歐 백야전 초대
1994 NEPAL SKETCH 여행
1994 4.16~22 광주조은문화관 NEPAL 실경전


                          마사이 女人 24,2 x 34,4 cm  1995   Oil on Canvas


1994 Seoul 西湖 Gallery 초대 NEPAL 실경전
1994 5.11~17 Seoul 靑鶴미술관 초대전(상형전)
1994 5.12~6.12 한일 교류전 (광주시립미술관)
1994 Seoul Lotte 화랑 3인전
1994 일본 광도 ASIAN GANE FESTIVAL 국제미술전 현지 참가
1994 대구 鳳成 Gallery 초대출품(상형전)
1994 부산 Tower Gallery 33인 초대출품
1994 Seoul 600년 국제현대미술전 초대출품 (국립현대미술관)
1994 전주 예술회관 초대 출품(상형전)
1995 제주 HANSOL Gallery 초대 출품 (상형전)
1995 무등일보 Gallery 초대출품(상형전)
1995 BULGARIA 초대전 출품 (SOPIA)
1995 구라파 및 AFRICA 미술여행
1995 광주 BIENNALE 호남현대작가 초대전 출품
1995 월간 "인간과 산" 초대 HIMALAYATKS전 출품 (Seoul 德元 Gallery)
1996 서울지구촌 겔러리 소품초대전 출품
1996 제주 HANSOL 화랑 소품초대전 출품
1996 서울 종로 겔러리 초대전 출품
1997 호남미술 100인전 초대출품(조흥문화관)
1997 대한민국 원로작가 초대전 (서울 시립미술관)
1997 남미, 구라파 SKETCH 여행
1997 독일 Frankfurter 시장초대전 출품 현지참가
1997 제2회 광주 BIENNALE 기념 광주화랑협회 초대전 출품
1997 대한민국 구상미술 사단체전 (서울 예술의전당)
1998 광주 Lotte 화랑 개관전 초대출품
1998 韓佛 國際總畵 Seoul 展 출품
1998 PARIS,Le Salon 전 초대출품
1998 일본 광도 국제미술전 초대출품
1998 신세계화랑 소품전 초대출품(광주)
1999 인도, 동구 4개국 sketch 여행
1999 독일 BERLIN 시장초대전 출품
1999 전업작가회원전 출품
1000 NEPAL,인도 SKETCH 여행
2001 SPEIN SKETCH 여행
2001 중국청도 시립미술관 초대전출품
2004 광주문화방송 40주년 기념 초대전
2005 일본 미자시 백화당 화랑에서 父女二人展
2005 일본, 대산, 신주 등 SKETCH 여행
2006 10. 일본盛岡市 암산미술관 초대전
2006 11.화집출판기념 개인전 (창 겔러리)
2006 12.광주광역시 문화상 (오지호 미술상)
2007 5. NEPAL TIBET SKETCH 여행 (12일간 )
2007 광주시립미술관선정 2007년작가전 (2007.5.25~6.4)
2008 1.南INDIA SKETCH 여행(14일간)
2008 3.SEOUL SUM GALLERY 원로5인 초대전
2008 4.日本鳥取縣 美術家협會 招請講演
2008 7.北印度 LADAKH 지방 SKETCH 여행 (15일간 )
2008 10.일본광도 요꼬다 화랑전시 ( 6일간 )



                백목단 53 x 45,5 cm  Oil on Canvas 1993

개인전수회, 광주광역시 미술대전 양화부분 심사위원(89)
전국무등미술대전 우영위원(89.95),동 초대작가, 전라남도 미술대전 심사위원장(90)
광주광역시 건축상 심사위원(90,92),현산문화상 심사위원장(90)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90), 국립현대미술관 방문 미술초대전 출품(91)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상형전 공모전 심사위원, 미술세계대상전(3회) 심사위원(92)
상형전 회원 (운영위원), 황토회 회원, 한국미술협회 리사 역임,
한국미술 광주광역시지부장 역임, 광주광역시 건축위원, 대한민국 미술대전 운영위원 역임
무등미술대전 심사위원장(94), 광주일요화가회 名譽會長 겸 지도교수, 광주미협고문
광주예총자문위원, 광주시립미술관 운영자문위원, 무등미술대전 심사위원장(2000)
광주시립미술관 미술강좌담당(2000~2001),백민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작품소장


               秋月山 53*45.5cm Oil on Canvas 1989


일본인 친구에게 건넨 금잔화 한 점

선생은 일본과 각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선생의 그림 인생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할 수 밖에 없는 게 바로 일본이다.
"일제시대에 농업학교 다닐 때 100명중에 20명은 일본 학생이었으니 한 반에 너댓명은일본인친구였지, 졸업후 바로 해방이되어 자기 나라로 돌아갔는데 그로부터 30년후인76년도에 그때의 동기동창생들이 모교 구경하러 광주에 온다는거에요 해서 동기생들끼리 모여접대를 해주고 지나간 이야기도 하며 즐거운시간을 보냈는데 돌아가는 그친구에게 마땅히 줄께 없어요 당시는 그림이 잘 안 팔리던 시절이라 무척 가난했으니까. " 고민끝에 그림을 선물하기로 했다."내가 너에게 줄것은 그림밖에 없다. 액자에 넣어주면 부피가 커지니 일본가면 액자 를 끼워보관하라" 는 말과 함께 금잔화를 그린 4호짜리 정물 한 점을 친구에게 건넸다. 당시 시청계장으로 근무하던 친구는 일본으로 돌아간 후 과연 한국인 친구가 준 그림이소장가치 가 있는지 작품성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대가인 우찌노선생을 수차레 찾아가 마침내 그림한점을 그 앞에 내 밀었다. 당시66세로 일본에서 유명한 화가였던 우찌노선생은 한국에서 온 그림 한 점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睡蓮 26 x 16,5 Oil on Canvas 2006


우찌노선생과의 인연

"이 작가는 어디에 있느냐" "너하고는 어떤 사이냐" "이 그림은 최고의 액자에 끼워넣어라" "이 사람을 만나게해 줄 수는 없느냐" 는 등 우찌노선생의 질문이 이어질수록 일본인 친구의마음도 함께 흥분 되여갔다. "우리가 가면 마날수 있다" 는 친구의 말에 우찌노선생은 그러면 10월에 함께 광주에 다녀오자고 만남 주선을 요청했다. 그해10월, 친구와 우찌노선생이 마침내 한국을 찾았다. 선생의 화실을 둘러본 우찌노선생은 4호짜리 1점과 15호짜리 1점등 2점을 직접 챙겻다. 동경도미술관에서 열리는 일본의 미술단체 시현회 그림전에 이들 두 작품을 출품 하겠다는 것이었다.
묘하게 우찌노선생이 가져간 작품은 시현회에서 장려상을 수상했고 시간이 지나 상패와 상장이 도착했다. 일본과의 인연은 이렇게 작은 그림 선물에서 시작됬다.


                           印度의 女人 53 x 45,5cm  1999   Oil on Canvas


지금도 잊지못하는 생애 첫 일본전시

그해 크리스마스 다음날 일본에서 묵직한 서류봉투가 날아들었다. 당시만해도 해외 나가기가 쉽지않은 시절이라 해외 전시는 꿈도 꾸지못하는 시절이었다. 영사관을 경유한 공증서까지 들어있는 초청장 안에는 일본 구류미연합문화회의 초청으로 77년 4월초에 당신의 개인전을 열태니 작품30여점과 함께 직접 일본에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일본에서 첫 개인전을 한다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태어나서 처음으로 간 일본행 이었으니 우여곡절도 많았다.일본가기 전까지 서울을 40번 이상 오고 가야 했을만큼 고속도로를 발닳아지게 다녔고 그림 30점을 싣고 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전시 개막 바로 전날 일본에 도착 할수 있었다. 한달간의 비자를 받아 도착한 일본에서 선생은 유창한 일어실력으로 주위 사람을 또 한번 놀라게 했다. 일제시대 이후 30여년이 더 지난후에 하는 일어인데도 묘하게 말이 솔솔 잘 나와 공항 사람들 조차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전시회는 대 성공 이 었다. 가져간 30점 중 20여점이 팔려 나갔고 일본 언론에서도 대서 특필했다. 그도 그럴것이 일본 친구에게 그림 한 점을 준 것이 인연이 되어 일본초대전까지 갖게된되다 전시회도 성황리에 열렸으니 관심이 높을 수 밖에 없었다.
, 한달간 예술의 가교, ,본인 염원 첫 개인전, ,동급생 힘써 한국인 화가 우정의 개인전, 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대대적으로 일본의 언론에 보도된 이 기사를 선생은 이제는 빛바랜 당신앨범에 차곡차곡 정리해 놓았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지자 선생은 "이왕 일본에 온 거 한달동안 일본 구석구석을 돌아보겠다 는 생각으로 한달 연장신청을 제출, 두달간을 일본에서 보내고 귀국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지독히도 가난했던 그 시절, 일본에서 그림을 판 돈으로 무등산 자락 아래 땅을 샀다. 그 땅이 바로 지금 살고있는 소태동 집터가 됐다.


지역 미술계의 산 증인

모름지기 진정한 예술가라면 저렇게 살아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외길 그림인생을 살아온 김영태화백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하지만 정신적인 즐거움을 자신의 최대 재산으로 간직하면서 호방하면서도 중후한 화풍을 견지하고 있는 선생은 호남화단의 대표적인 원로이다.
조선대 미대 1회에 미협 창립회원 등 선생의 하나 하나가 지역 미술사와 함께 한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지역 미술계의 산 증인이기도 한 선생이지만 당신의 이름 석자 알리는 일에는 참 무심하게 살아왔다. 드러내놓고 자랑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성격인지라 언론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았고 "묵묵히 내 갈 길 가면 그뿐" 이라는 생각에 그림 이외의 돈버는 일에도 별반 관심이 없었다. 덕분에 문화부기자 생활 12년동안 선생을 찾아뵐 기회가 없었으니 새삼 죄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일년이면 수도없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잘 나가는 예술가대신 큰바위처럼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견지하며 한 우물을 파는 진정한 예인을 만나러 가는 길 소매끝을 파고드는 청량한 기운과 길가에 늘어선 코스모스의 하늘거림, 어제보다 한 뻠 올라간 비취색 하늘이 가을이 오고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8월말의 도심은 한여름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늘그랬듯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역시 자연이다. 개절에 따라 짙어젔다가 연해지기도 하고, 맑고 깨끗하기도 하고, 소슬하고 쓸쓸하기도 한 개절의 변화 앞에서 사람들은 외로워하기도 하고 겸허하기도 한다. 그래서 화가는 고흐의 말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인도하는 심미안을 잦고 있어야 하며 치열한 작가적 탐구력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 모른다. 자연만큼 위대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안다루티아 風景  45,5 x 53 cm   2001   Oil on Canvas

"이정도면 행복한 인생"

선생은 5녀1남을 두었다. 딸 다섯은 모두 미대로 진학했고 아들만 컴푸터공학과에서 박사코스를밝고있다. "아버지처럼 가난하게 살고싶지 않다" 며 택한 길이었다. 지금은 작품에대한 열정이 대단한 둘째딸 두례씨만 서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화력60년 큰 돈은 벌지 못했지만 선생의 인생은 행복하다고 자부한다.
"친구들 대부분 저 세상으로 갔고 살아있는 친구들 또한 정년 후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방안퉁수로 지내고 있어요. 그에 비하면 나는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내 작업실에서 언제든지 그림 그릴 수 있고 바람 쐬고 싶으면 스케치여행도 다닐 수 있고 이 정도면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에 "그림 그리는데 지장이 없는 생활적 여유만 갗춰지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선생은 "건강하고 내가 좋아서 택한 길이니 후회란 있을 수 없다" 고 잘라 말했다.


A.P 판화


"화가는 작업 성과로 승부해야"

후배들에게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요즘 후배들 보면 너무 서둘러요 빨리 출세하고 싶어, 이름 알리고 싶어 조급해 하지요
그러나 화가에게 중요한 건 본인이 만족할만한 작업적 성과예요. 내가 열심히 해서 좋은 작품 그리면 서두르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 나서지 않아도 밖에서 인정을 해 주는 법이예요 내자신을 먼저 다지고 기다릴 줄 아는 여유가 있었으면해요"
"화실이 작가의 정신세계를 쏟아붓는 장소가 되어야지 공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고 강조하는 선생은 "지금도 작품 하나 가지고 며칠씩 씨름하기도 한다" 며 "아직도 배워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꼭 이루고 싶은 한가지 꿈이 있다면 그동안의 작업성과물을 집대성한 화집을 발간하는것 그러나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아직은 구체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돌아서는 길 그림에 대한 변치않은 정열과 충만된 예술혼으로 그림인생 60년을 일군 선생의 순수한 삶이야말로 그무엇에 비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은

60년 畵道, 感動的 色彩와 想念의 世界

光州美術 지켜온 元老, 金永太 畵伯 제목의 글 중

에서

김경희 / 한국언론재단 미디어교육팀


                                     무등산  Oil on Canvas



             金 永太의 藝術과 生涯 


剛直한 性稟에 올곧은 生涯 살아온 우리시대 師表的人物

珠玉같은 作品 남긴 韓國頂上의 元老, 藝術魂 歷史와 함께

2006년 병술년이 저물어 가는 11뤌, 金永太 화백의 藝術과 생애 를 집약한 화집 출판과 함께 팔순을 기념하는 大祝祭展이 광주시동구 금남로에 소재한 창겔러리 에서 있었다. 현대구상미술의 선구지 월간 아트코리아가 기획하고 創 겔러리가 후원하는 이날 전시회는 500여명의 하객과 참관객이 전시장을 꽉 매웠으며 멀리 일본에서 일본인 지인과 평소 작가의 작품을 애장하고 있는 콜랙터들이 10여명 방문하여 이 축제전은 열기와 하객들의 담소로 흐믓한 꽃을 피웠다. 이날 開幕展에서 테이프 커팅을 한 인사들은 전 吳炳文 교육부장관, 전 고창현 조선대총장, 전 전남의대 孫哲 박사, 월간 아트코리아 발행인 김남수, 일본 가고시마 前畑省三 교수, 제자인 김종수 전 미술대학장, 화가 小谷悅夫화백, 일본 건설업계 다네사장내외(種社長), 제일실업가 崔炳都씨, 미협지회장 朴智澤씨 등이며 축사로는 오병문 장관, 전 조창현 조선대총장, 김남수 미술평론가, 일본의 마에하다 교수, 소곡열부 등이 숭고하게 살아온 작가의 예술과 생애에 관한 끝없는 찬사를 보냈다.
 세계 각국의 미술관, 박물관 등을 섭렵해온 오병문 장관은 축사에서 金永太 화백의 작품세계는 한국에서는 물론이요,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훌륭한 한국의 예술인이라고 격찬했다. 또한 일본의 小谷悅夫 화백은 예리한 名刀로 짜른듯 한 날카로운 작가의묘사력은 실로 세계적인 수준이며 세계 각국 등에서 스케치를 해온 선생의 아뜨리에는 과연 세계가 선생의 작업 현장이라고 역설했다.





          航口 Oil on Canvas, 97 x 130.3cm, 1990            바다의 美를 예찬하는 畵家            





         안나푸르나  Oil on Canvas, 60,6 x 72,7cm, 1994




          統營에서 Oil on Canvas, 53 x 65,1cm,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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