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鄭澈 1536-1593)과 황진이(黃眞伊)이 사이에 실제로 애틋한 로맨스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선생의 소설 《자고 가는 저 구름아》에서도 그의 연인(戀人)은 '강아'라는 여인(女人)으로 그려져 있는데, 야담(野談)에 나오는 인물을 월탄(月灘) 선생이 작품화했는지는 몰라도, 공식적(公式的)으로는 실존인물이었는지 아직 입증(立證)이 안 되고 있지요.
송강 정철이 쓴 시가(詩歌)는 대부분 정치적으로 소외(疎外)되어 있을 때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남녀의 연정(戀情)에 빗대어 쓴 충신연군지사(忠臣戀君之詞)였습니다.
송도(松都)의 명기(名妓) 황진이가 교유(交遊)했던 남성들은 설화(說話)에 의하면, 그녀가 파계(破戒)시켰다는 10년 수도(修道)한 지족선사(知足禪師)와 달밤에 유혹하였던 종친(宗親) 벽계수(碧溪水)였고, 그녀의 스승으로 받들었다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정도였습니다.
아, 그리고 가사(歌辭) 《면앙정가》의 작자로 유명한 기촌(企村) 송순(宋純 1493-1583)이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낼 때 시주(詩酒)로 교유(交遊)했다고는 하나 연인(戀人)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설화에 의하면, 황진이가 실로 흠모(欽慕)했던 남성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선생이었다고 하나 황진이를 제자로 거두었을 뿐, 그녀의 유혹은 성리학자(性理學者)답게 뿌리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야사(野史)에 의하면 그가 지은 초막(草幕)에서 그에게 글을 배우러 다니던 황진이를 생각하며, 다음 시조 한 수를 남겼다고 전해지지요.
마음이 어린 후(後)ㅣ니 하난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내 님 오리마난
지난 닙 부난 바람에 행혀 긘가 하노라. <출전 : 진본 청구영언>
<현대어>
마음이 어리석은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석다
구름이 겹겹으로 쌓인 깊고 높은 산(내가 살고 있는 산중 초막에)에 어느 님이 올까마는
(그래도) 지는 잎 부는 바람소리에 행여 그이인가 하노라.
재미있는 것은, 황진이가 죽은 후에 조선 시대 최대의 풍류객(風流客) 남아(男兒)로 유명한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가 평안도사(平安都事)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송도(松都) 개성(開城)에 들러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그녀의 묘(墓)에 술을 뿌리며 다음과 같은 시조를 읊고 애달파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쳣난이
잔(盞) 자바 권(勸)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 하노라.<출전 : 진본 청구영언>
<현대어>
푸른 풀만이 우거진 골짜기 무덤에 자고 있느냐, 누워 있느냐?
젊고 아름다운 얼굴을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느냐?
술 잔(盞) 잡아 권할 이(사람)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백호(白湖) 임제(林悌)는 왕명(王命)을 받드는 관리(官吏)가 죽은 기생(妓生)의 무덤을 찾아가 그 앞에서 울면서 이 시조(時調)를 지어 불렀다하여, 양반(兩班)의 체통을 떨어뜨렸다는 조정(朝廷)의 탄핵(彈劾)을 받아 벼슬에서 파직(罷職)을 당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가위(可謂) 황진이가 어느 정도의 명성(名聲)을 지닌 기생이었는가를 알 만한 일화(逸話)이지요.
그것은 그렇다 치고, 황진이가 만월대(滿月臺)로 종친(宗親) 선비 벽계수(碧溪守)를 유혹하여 그 앞에서 명월(明月)을 배경으로 읊었다는 다음의 시조(時調)는 그녀가 이성(異性)을 향해 읊은 첫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조는 애틋하다기보다는 유혹적인 내용의 작품입니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ㅣ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수여간들 엇더리. <출전 : 진본 청구영언>
<현대어>
푸른 산 속 푸른 골짜기를 흐르는 물이여! 빨리(쉬) 흘러가는 것을 자랑하지 마라
한 번 푸른 바다에 도달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밝은 달이 빈 산에 가득히 비치니 쉬어간들 어떠랴.
다음의 황진이 시조(時調)들은 '임'을 향한 애틋한 여인의 정한(情恨)을 읊은 시가(詩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두 <진본(珍本)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업내
추풍(秋風)에 지난 닙소릐야 낸들 어이하리오.
<현대어>
내 언제 신의 없어 임을 속였기에
달마저 기운 한밤중에 온 뜻이 전혀 없네
가을 바람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찌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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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춘풍(春風)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현대어>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봄바람처럼 향긋하고 따뜻한 이불 아래 서리서리 뭉쳐 넣어 두었다가
정든 님 오신 날 밤이면 굽이굽이 펼쳐놓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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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은 녯산(山)이로되 물은 녯물 안이로다
주야(晝夜)에 흘은이 넷물이 이실쏜야
인걸(人傑)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안이 오노매라
<현대어>
산(山)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밤낮으로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뛰어난 인물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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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다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난 제 구태야
보내고 그리난 정(情)은 나도 몰라 하노라.
<현대어>
아, 내가 하는 일이여! 그리워 할 줄을 몰랐더냐?
있으라 했으면 갔을까만 제가 구태여
보내고 그리워하는 심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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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靑山)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난 님의 정(情)이
녹수(綠水) 흘너간들 청산(靑山)이야 변(變)할손가
녹수(綠水)도 청산(靑山)을 못니져 우러예어 가난고
<현대어>
(변함없이) 푸른 산은 나의 뜻이요, (변함없이) 푸른 물은 임의 뜻이라
푸른 물이 흘러간들 푸른 산이 변할소냐?
(하지만 흘러가는)푸른 물도 청산(靑山)을 못 잊어 울며 흘러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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