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 시 모음 2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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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은 말
유안진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 버릴까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 해버릴까 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사류로
오염될까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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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을
유안진
이제는 사랑도
추억이 되어라
꽃내음 보다도
마른풀이 향기롭고
함께 걷던 길도
홀로 걷고 싶어라
침묵으로 말하면
눈 감은 채 고즈넉이
그려보고 싶어라
어둠이 땅속까지
적시기를 기다려
비로써 등불 하나
켜 놓고 싶어라
서 있는 사람은
앉아 있어야 할 때
앉아서 두 손안에
얼굴을 묻고 싶을 때
두귀만 동굴처럼
길게 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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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꽃
유안진
지난여름 동안
내 청춘이 마련한
한줄기의 강물
이별의 강 언덕에는
하 그리도
흔들어 쌓는
손
그대의 흰손
갈대꽃은 피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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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익는 마을은 어디나 내 고향
유안진
섶 다리로 냇물을 건너야 했던 마을
산모롱이를 돌고 돌아가야 했던 동네
까닭없이 눈시울 먼저 붉어지게 하는
아잇적 큰 세상이 고향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희망도 익고 익어 가느라고
감 따는 아이들 목소리도 옥타브가 높아가고
장마 끝 무너지다 남은 토담 위에 걸터앉은 몸 무거운 호박덩이
보름달보다 밝은 박덩이가 뒹구는 방앗간 지붕에는 빨간 고추밭
어느 것 하나라도 피붙이가 아닐 수 없는 것들
열린 채 닫힌 적 없는 사립을 들어서면
처마 밑에 헛기침 사이사이 놋쇠 재터리가 울고
안마당 가득히 말라 가는 곶감 내음새
달디 단 어머니의 내음새에 고향은 비로소
콧잔등 매워오는 아리고 쓰린 이름
사라져가는 것은 모두가 추억이 되고
허물어져 가는 것은 모두가 눈물겨울 것
비록 풍요로움일지라도 풍성한 가을열매일지라도
추억처럼 슬픈 것, 슬퍼서 아름다운 것, 아름다워서 못내 그립고 그리운 것
그렇게 고향은 비어가면서 속절없이 슬픈 이름이 되고 있다
허물어져 가면서 사라져가고 있다
사람 떠난 빈 집을 붉게 익는 감나무 저 혼자서 지켜 섰다
가지마다 불 밝히고 귀 익은 발자욱소리 기다리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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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유안진
들꽃처럼 나는
욕심없이 살지만
그리움이 많아서
한이 깊은 여자
서리 걷힌 아침나절
풀밭에 서면
가사장삼 입은
비구니의 행렬
그 틈에 끼어든
나는
구절초
다사로운 오늘 볕은
성자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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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지는 날에
유안진
열매 맺기 위해서
꽃은 떨어져야 한다
된서리를 맞아야
열매 또한 무르익음을
이 확실한
자연법칙을 믿으며
인간 세상
눈비 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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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유안진
차라리
내가 반쯤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철따라
궂은 비 뿌리는 내 울안
벙어리 되어 흘려 보낸
어두운 세월의
어느 매듭에서
눈먼 혼을 불러
풋풋이 움 틔우며
일월을 거느려
그대 오는가
목숨과 맞바꾸는
엄청난 이 보배
차라리
내가
온채로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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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쌓인 길에서
유안진님
한 번 더
나를 헐어서
붉고 붉은 편지를 쓸까 봐
차갑게
비웃는 바람이
내 팽개친들 도 어떠랴
눈부신 꿈 하나로
찬란하게
죽고만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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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유안진
사람이 그리운 날엔
눈사람을 만들자
꿈의 모습을
빚어보자
수묵화 한 폭속에
호젓이 세워놓고
그윽히 바라보며
이 겨울을 견디리
꿈이여 언제나
꿈으로만 사라져도
못내 춥고 그리운 날엔
사람 하나 지어 눈 맞춤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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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유안진
엄동 눈바람에
어쩌자고
피느냐
좋은 세월
다 놓치고
이제야 피느냐
목숨마저 켜 드는
등불임에도
별무리마저 가슴 죄어
차마
지켜 새우는
겨울 뜨락의
한 자루 촛불
나의 신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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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유안진
한얼산
기도원 올라가는 길에
소슬히 웃고 선
막달라 마리아
멸시를 이기더니
통곡을 삼키더니
영원한 남성의
영원한 사랑을 획득하고 만
여자
어리석은 그 여자가
지혜롭게 곰삭인
잘못 살아온 세월의 빛깔
보라빛 연보라
천상의 웃음 띠고
마중 나오신 성녀
막달라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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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있기에
유안진
멀어서 나를
꽃이 되게 하는 이여
향기로 나는 다가갈 뿐입니다
멀어서 나를
별이 되게 하는 이여
눈물 괸 눈짓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멀어서 슬프고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사랑이여
죽기까지 나
향기 높은 꽃이게 하여요
죽어서 나
빛나는 별이게 하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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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유안진
저 쉬임 없이 구르는 윤회의 수레바퀴 잠시
멈춘 자리 이승에서 하 그리도 많은 어여쁨에
흘리어 스스로 발길 내려놓은 여자
그 무슨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내 이제
사람으로 태어났음이라
머언 산 바윗등에 어리운 보랏빛 돌 각담을
기어오르는 봄 햇살 춘설을 쓰고 선 마른
갈대대궁 그 깃에 부는 살 떨리는 휘파람
얼음낀 무논에 알을 까는 개구리 실뱀의 하품
소리 홀로 찾아든 남녘 제비 한 마리
선머슴의 지게 우에 꽂혀 앉은 진달래꽃......
처음 나는 이 많은 신비에 넋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내 그리움의 방황
아지랑이야 어쩔 셈이냐 나는 아직 춥고
을씨년스런 움집에서 다순 손길이 기다려지니
속눈썹을 적시는 가랑비 주렴
너머 딱 한번 눈 맞춘 볼이 붉은 소년
내 너랑 첫눈 맞아 숨박꼭질 노니는 산골 자기에는
뻐꾹뻐꾹 사랑 노래 자지러지고
잠든 가지마다 깨어나며 빠져드는 어리어리
어지러움증 산아래 돌부처도 덩달아 어깨춤
추는 시방 세상은 첫사랑 앓는 분흥 빛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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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꽃
유안진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쓴다
붙이지 못할 기인 사연을
작은 이 가슴마저
시려드는 밤이면
임자 없는 한 줄의
시를 찾아 나서노니
사람아 사람아
등만 보이는 사람아
유월에도 녹지 않는
이 마음을 어쩔래
육모 서리 꽃
내 이름을 어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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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에 즈음하면
유안진
송년에 즈음하면
도리없이 인생이 느껴질 뿐입니다
지나온 일년이 한생애나 같아지고
울고 웃던 모두가
인생! 한마디로 느낌표일 뿐입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자꾸 작아질 뿐입니다
눈 감기고 귀 닫히고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어
모퉁이길 막돌맹이보다
초라한 본래의 내가 되고 맙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신이 느껴집니다
가장 초라해서 가장 고독한 가슴에는
마지막 낙조같이 출렁이는 감동으로
거룩하신 신의 이름이 절로 덤겨집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갑자기 철이 들어 버립니다
일년치의 나이를 한꺼번에 다 먹어져
말소리는 나직나직 발걸음은 조심조심
저절로 철이 들어 늙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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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할 수 있는 용기
유안진
눈부신 아침은
하루에 두 번 오지 않습니다.
찬란한 그대 젊음도
일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어질머리 사랑도
높푸른 꿈과 이상도
몸부림친 고뇌와
보석과 같은 눈물의 가슴앓이로
무수히 불 밝힌 밤을 거쳐서야 빛이 납니다.
젊음은 용기입니다.
실패를 겁내지 않는
실패도 할 수 있는 용기도
오롯 그대 젊음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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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고백
유진하
먼 어느 날 그대
지나온 세상 돌이켜 제일로 소중했던 이
그 누구였느냐고 묻는 말 있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당신이라 말하겠습니다
먼 어느 날
꽃잎 마저 어둠에 물들어
별리의 문 닫힌 먼 어느 날
그대 두고 온 세상 기억 더듬어
제일로 그리웠던 이
그 누구였느냐고 묻는 음성 들리면
나는 다시 주저 없이 그 사람
당신이라 대답하겠습니다
혼자 가는 길 끝에
어느 누구도 동행 못하는
혼자만의 길 끝에 행여 다음 세상 약속한 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내겐 늘 안개 같은 이름
당신을 말하겠습니다
당신 사연 내들은 적 없고
내 사연 또한 당신께 말한 적 없는 그리운 이
세월 다 보내고 쓸쓸히 등 돌려 가야 하는
내 막다른 추억 속에서 제일로 가슴 아픈 사랑
있었느냐고 묻는 말 있으면
그 사랑 당신이었노라고
내 마지막 한 마디
그 사랑 당신이었노라고
고백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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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기도
유안진
아침마다
눈썹 위에 서리 내린 이마를 낮춰
어제 처럼 빕니다.
살아봐도 별수없는 세상일지라도
무책이 상책인 세상일지라도
아주 등 돌리지 않고
반만 등 돌려 군침도 삼켜가며
그래서 더러 용서도 빌어가며
하늘로 머리 둔 이유도 잊지 않아가며
신도 천사도 아닌 사람으로
가장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따라 울고 웃어가며
늘 용서 구할 꺼리를 가진
인간으로 남고 싶습니다.
너무들 당당한 틈에 끼여 있어
늘 미안한 자격 미달자로
송구스러워하며 살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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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도 하 많은 고향 들녘 뜸
유안진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아서
고향은 신비로운 동화의 세상
그래서 꿈도 희망도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 세상
산봉우리, 고갯마루, 산골짜기, 냇물과 바윗돌, 한 그루 나무에까지
전설을 품어 신비로운 힘과 꿈과 위로과 웃음의 비결이 되었지
집채만한 거북이가 마을로 기어드는 거북바위마을도
입향조가 이름하신 구입리 씨족마을
거북처럼 오해 살며 번성하는 장수마을 거북바위는
생남 등과 와 승진 합격 치병들
어던 소원도 다 이루어준다는 거북바위는 주민의 신령스런 종교가
되어,
거북들, 거북뜸, 거북봉, 거북재, 거북골, 거북내, 거북다리목...
조상들의 함자도 구봉이 구형이 구문이 구동이 구호 구식 구놈이
구순이...
그 어르신네 고손자들 아명도 거복, 거남, 거북, 거돌, 거식,
거남, 거봉...
새댁네 모두는 아이 아닌 거북새끼를 낳으니
거북처럼 크게 되어 돌아오는 정기 서린 길승지 명당마을
어떤 가뭄에도 풍년농사가 된다는 거북뜸을 들녁으로 농사지어
사는 농촌마을
태풍과 장마에도 거북뜸 올벼는 잘도 익은 풍년
도깨비와 불귀신과 서낭신도 거북을 닮아서
어른 아리 없이 한 두가지 이야기를 지어 보태는 이야기꾼 마을
아무리 초라하고 볼품 없어져도
고향은 이렇게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아서 더욱 고향다웁고
알수 없는 영험스런 힘으로 타관 땅 어디에서도 굳세게 살아
성공하여 돌아가는 주인공이 되게 하는 바로 그런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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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해지는 날
유안진
살았던 곳들은
모두 다 고향들이었구나
괄시받은 곳일수록
많이 얻고 살았구나
행차 지나간 뒤에 나팔 부는 격이지만
갈지자로 세상을 살고 나서
불현듯 마음 착해지는 날은
울고 싶은 사람 뺨쳐주는 적선이라도 하고 싶다
그런 악역이라도 자청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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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을 불어 다오
유안진
이 허황된 시대의 한 구석에
나를 용납해준 너그러움과
있는 나를 없는 듯이 여기는
괄시에 대한
보답과 분풀이로
가장 초라하여 아프고 아픈
한 소절의 노래로
오그라들고
꼬부라지고 다시 꺾어 들어서
노래 자체가 제목과 곡조인
한 소절의 모국어로
내 허망아
휘파람을 불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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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살 같이 빠르다는 한 세월을
그대 부리가 빠알간 젊은 새요
옛 어르신들 그 말씀대로
연약한 죽지를 더욱 의지 삼고
느릅나무 높은 가지 하늘 중턱에다
한 개 작은 둥지를 틀고
햇발이 모자라도록 웃음 웃어 살자
음악이 모자라도록 춤을 추어 살자
휘파람새
봄날 하루 해가
다아 저물도록
어디서 뉘 부르는 휘파람 소리
애국가 제3절 가슴 젖는 옛 곡조를.....
애국하다 요절한
총각귀신 새가
일본순사 칼 맞고 엎뎌진 학생
절대로 죽지 않는
뉘댁 삼대독자(三代獨子)가
어린 목청
돋워가며
거퍼 부는 휘파람.
떡 잎
조용히 門을 여는 한 왕조(王朝)를 본다
두 연인(戀人)이 일으키는 어린 왕국(王國)이여
저마다의 생애는 영광과 비극의 대 서사시(大敍事詩)
봄 아지랑이 황홀한 춤 앞세워
모든 인연(因緣)이 움돋았건만.
바다, 받아
우주의 첫 생명체가 시작되었다는
아폴리디데가 태어났다는
바다에, 밀물이 들고 있다
뜨거운 것이 짜거운 것이
뜨겁고도 쓰라리게 목젖까지 차 올라
어머니!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산에 묻힌 어머니(母)를 바다(海)에서 부르다니
하해(河海)같은 어머니라고 해서 그랬을까
세상의 강물이란 강물을 다 받아주어서
세상의 무엇이나 다 받아 주는
아무리 받아 주어도 넘치지 않는 바다는
천만 가지 세상높낮이들 가리지 않고
받아준다고 바다이지
천만가지 이름으로 천만번을 불러도
다만 바다일 뿐
받아주는 어머니(母)가 있어서
어머니의 눈물(?)이 있어서 바다(海)이지.
박수갈채를 보낸다
겨울은 최후까지 겨울을 완성하느라 최선을 다했다
핏뎅이를 쏟아내며 제 철을 완성하는 동백꽃도 피다 진다
칼바람 속에서도 겨울과 맞서 매화는 꽃 피었다, 반쯤 넘어 벙글었던 옥매화는 폭설을
못 이겨 가지 채 휘어지다 끝내는 부러졌다, 겨울 속에 봄은 왔고 봄 속에도 겨울은 있었다
두 시대가 동거해야 하는 불운은 항상 앞선 자의 몫이었다
정작 봄이 무르익었을 때는 매화는 이미 꽃이 아니었다
앞서 가는 자는 항상 이렇다
불행하지 않으면 선구자(先驅者)가 아니다
지탄(指彈)받는 수모(受侮)없이 완성되는 시대도 없다
춘설도 동백꽃도 꽃샘추위도
제 시대를 완성하고 죽는 후구자(後驅者)그 사람들.
세한도 가는 길
서리 묻은 기러기 죽지로
밤하늘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五十嶺) 고개부터는
추사체(秋史體) 뻗친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짱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다보탑을 줍다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多寶塔)을 주웠다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橫財)를 했다
석존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간 행인(行人)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를 떨구면 세상은 아무데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 없는 10원짜리
그렇게 살았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비 가는 소리
비 가는 소리에 잠 깼다
온 줄도 몰랐는데 썰물소리처럼
다가오다 멀어지는 불협화(不協和)의 음정(音程)
밤비에도 못다 씻긴 희뿌연 어둠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뒤축 끌며 따라가는 소리, 괜히 뒤돌아다보는 실루엣 같은 뒷모습의, 가고 있는 수묵 빛 밤비소리, 이 밤이 새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 모양이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어느 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죄다.
안경, 잘 때 쓴다
자기 전에 안경을 닦는다
책 속에만 꿈이 있는 줄 알고
책 읽을 때만 쓰던 안경을
총기가 빠져나간 눈에
열정이 빠져나간 눈에
덧눈으로 씌운다
잠은 어두우니까
더 밝은 눈이 필요하지
감긴 눈도 뜬눈이 되어
지나쳐버리는 꿈을 놓치지 않게 되고
꿈도 크고 밝은 눈을 쉬게 알아볼 것 같아서
자투리 낮잠을 잘 때도 반드시 안경을 쓰는데
꿈이 자꾸 줄어드니까
새 꿈이 안 오니까
꿈을 더 잘 보려고
꿈한테 더 잘 보이려고
멋진 새 안경을 특별히 맞췄는데
새 안경이 없어졌다
다리는 새 걸로 바꾸지 말걸 그랬어.
그림자도 반쪽이다
편두통이 생기더니
한 눈만 쌍꺼풀지고 시력도 달라져 짝눈이 되었다
이명도 가려움도 한 귀에만 생기고
음식도 한쪽 어금니로만 씹어서 입꼬리도 쳐졌다
오른쪽 팔다리가 더 길어서 왼쪽 신이 더 빨리 닳는다
모로 누워야 잠이 잘 오고 그쪽 어께와 팔이 자주 저리다
옆가리마만 타서 그런지 목고개와 몸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기울어진다는 것
그리워진다는 것
안타까워진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아프고 아픈 것
아픈 쪽만 내 몸이구나
아플 때만 내 마음이구나
남이 아픈 줄은 내가 어찌 알아
몸도 마음도 반쪽만 내 것이라서
그림자도 반쪽이구나
그런데 나머지 반쪽은 누구지?
조금만 덜 용서해주십시오
용서해 주시옵고
용서해 주시옵기를
지워서 잊어버려 주시옵기를
그러나 그러나
스스로를 용서해버릴 만큼은
저절로 다 잊어버릴 만큼은
마시옵기를
조금은 남겨 두시옵기를
용서 구할 거리를 또 만들지 않을 만큼은
때때로 울 수 있을 만큼은
흐린 자국 몇이라도 남겨두시옵기를.
운동화, 두 귀에 신기다
암만 기도해도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자, 그럴 리가 없다는 수녀님은
기도할 때 두 귀에 운동화를 신겨보라고 했다
새 운동화에 신이 난 두 귀가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금방 하늘문밖에 도착했는데, 바로 그때 문안에서 걱정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는가
“ 글라라의 전화는 언제나 통화 중이라서
도무지 통화를 할 수가 없단 말이야
게다가 가슴에는 빈틈이라곤 한치는커녕 반치도 없어서
응답을 보내도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번번이 되돌아와 버리니 정말 큰일이야
저 잡념자루를 어쩐다? “
까마귀의 길
어두워야 보인다지
눈을 감고 기도하는 까닭이라지
토굴 속에 들어가서 도(道) 닦는 까닭이라지
하늘의 달도 밤길을 더 잘 가는 까닭이라지
선견자 중에 맹인이 많은 까닭이라지
영험할수록 판수(判數)가 많은 까닭이라지
불을 끄고 눈마저 감아야
대낮에 잃은 길도 찾아낼 수 있다지
기나긴 깜깜 어둠 깊고 깊은 캄캄 밑바닥에서
나만이 나의 길인 것을
나만이 나의 미래인 것을
어둠만이 촛불을 꽃 피울 수 있다는 것을
찾은 길을 잃지 않으려면
여름도 겨울보다 춥게 살아야 한다지
눈발이 그쳤다
밤중도 늙으면 새벽이 되지만
만년을 늙어도 터럭 한올 흴 수 없다
섣달 그믐밤 얼어붙은 가지 끝을 체온으로 녹이는 도래까마귀
울음 한 번 떨치면 반경 600리 밖에까지 몸서리치는 고독의
선사 이래 백설보다 순결한 검은 세계를 살며
영민과 고독과 숭고함의 길을 가는 사제로서 전령사로서
밤과 겨울의 검은 치마 시인으로서.
손대지 마라
깨트려 파계(破戒)시키지 마라
돌팔이 땡초로 환속(還俗)시키지 마라
그저 한낱 돌덩이 바위로만 보이느냐
하늘이 지으신 바 이대로가 부처니라
창조의 손바닥 그 체온에 뺨 부비는 바람과
구름도 묵묵히 읽고 가는 섭리는
햇볕이 달궈놓고 눈서리가 식혀내는
불과 얼음의 길, 인생과 다르지 않아
밤마다 달빛 별빛에 씻고 말린 몸에
풀과 꽃이 향기 풍겨 재롱 떨고
풀버러지 나방 새들 알 까고 새끼 치는
무릎 정강이를 이불 덮고 뿌리 묻어 크는 나무
다들 함께 한 이 자리 이대로가
완벽(完璧)이니라
神의 비밀스런
온갖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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