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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수필.기타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 2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보랏빛 노을을 가슴에 안았다고 해도 좋아.

혹은 하얀 햇볕 깔린

어느 도서관 뒤뜰이라고 해도 좋아.

당신의 깨끗한 손을 잡고

아늑한 얘기가 하고 싶어.

아니 그냥 당신의 그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마구 눈물을 글썽이고 싶어.


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

피곤하고 피곤한 그리움이여.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1950년대 <학원>잡지에서 전국의 문예지망 고교생들을 상대로 공모한 ‘학원문학상’ 수상 작품인 이제하의 시 <청솔 그늘에 앉아>. 이 시는 유경환 시인과의 사연이 얽힌 작품이다. 마산에 살던 이제하 학생은 <학원>지에 사진소설의 모델로 나왔던 서울 학생 유경환을 동경했다. 헌데, 그 유경환이 당시 <학원>에 투고한 이제하의 소설을 보고 편지와 사진을 보내 왔다고 한다. 이제하 학생이 그 화답으로 쓴 시가 이것이고, 1954년, 학원문학상을 수상했다.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유명한 시. 당시 경기고와 서울고에서 글발을 날리던 황동규와 마종기가 '마산 시골뜨기'의 글이 학원문학상을 타서 심하게 놀랐다고 한다.  

이제하 선생님이 직접 들려주신 또 하나의 낭만적인 이야기.

여튼, 이 시가 <학원>지에 실리고 나서 마산의 이제하 학생집엔 여학생들의 팬레터가 하루에 20여통씩 왔단다. (조영남 씨가 "최고전성기는 그때였군요"라고 말했다) 천편일률적으로 "저희 오빠가 되어 주세요" "너무 감동했어요"라는 식의 유치한 편지들이었는데, 딱 두 통의 작문이 이제하 청년의 눈에 들어왔다. 하나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로 시작하는 당돌한 글이었고, 하나는 지독히 냉정하게 자기 방의 풍경을 묘사한 글이었다고. 당장에 두 편지에 답장을 보냈다. 그런데 그 두 여학생은 경기여중에서 같이 문학반 활동을 하던 동기였다. 졸지에 '양다리'를 걸친 셈이 된 것이다. 한 여학생에게 절교장을 받았다.

시간이 흘러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여학생은 유명한 외교관의 부인이 되었다. 절교장을 보낸 냉철하고 지적인 여학생은 전혜린의 동생 전채린이었다.

그랬다고 한다. 그런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낭만이 넘쳐흐르던 옛날 옛날 이야기다.

by 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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