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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수필.기타

되살아나는 귀맛 장석남

 

 

 

Letter 23

지금은 원주에 와 있습니다. 지난겨울 인제 만해마을의 폭설 속에서 첫 소식을 보낸 듯한데 어느덧 무더운 한여름의 옥수수 밭 곁에 와 있네요. 목도리로 얼굴까지 다 두르고도 덜덜 떨며 시냇가를 걷다가 문득 반팔에 슬리퍼를 끌고 오솔길을 오르내리는 느낌입니다. 그 간격이 적지 않았음에도 돌이켜 보면 실로 순간 같습니다. 계절이 두 번 바뀌었으나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았나, 지난 번 이야기처럼 살구 맛이나 한 번 본 것이 다는 아닌가, 자책하기도 합니다. 참, 영화 <시>의 한 장면(살구는 떨어진 것이 맛있다는 이야기)을 이야기하시니 생각나는 것이 있네요.

모든 열매는 올곧게 익어야 떨어집니다. 그 안에 씨앗이 온전한 생명으로 여물어야 익은 거지요. 그때는 홀로 떨어져 나옵니다. 하긴 다 익었는데도 그대로 붙어 있다면 어미 되는 나무는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올 때 그것을 '과감(果敢)하다'고 한답니다. '과감히 실행한다'는 말의 의미가 거기에 있었다고 다석(多夕) 선생 책에선가 본 적이 있습니다.

익고 나서 실행한다! 익기는 얼마나 어려우며 또 실행하는 것은 또 얼마나 고통과 망설임이 따르는 일인지요. 식물학적으로 익은 열매가 달고 향기로운 섭리는 아시다시피 스스로를 멀리 보내기 위한 수단이라니, 모든 만물이 한 꺼풀만 벗겨도 신비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열매의 맛과 향기는 매개자를 유혹하는 수단인 셈이지요. 익은 열매를 따먹는 것에 큰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겠죠? 하하하. 아니 주워 먹어야 맞는 건가요?

겨울날 잎이 다 진 빈 나무에 쭉정이 열매가 말라붙어 있는 걸 볼 때가 있습니다. 인간사에 비추면 그 하찮은 풍경은 심란한 생각까지 일으킵니다. 식물로서야 익지 못하고 도태된 것이니 사실 별스럽지 않은 것인데, 사람에게도 그런 법칙을 적용하려는 측면이 있어 그렇습니다. 부족한 제 생각으로도 사람에게 쭉정이란 없습니다. 모두 온전한 것으로 온 것이 맞을 겁니다. '과감히' 이 세상에 이미 온 것이니까요. 그래서 사람에게 우열은 없는 셈인데 자꾸 단순한 잣대로 우열을 판가름하는 것 같아 갑갑하고 서글퍼질 때가 있습니다. 익지 않은 사회가 늘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사회도 하나의 익은 열매처럼 향기롭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 각각의 몫을 공평하고 고귀하게 인정해야겠지요. 우리를 스스로 불행하게 하는 것은 늘 단순 비교에서 생겨나니까요. 식물에서 많은 것을 배우지만 익지 않은 열매를 아무 여과 없이 인간에 비교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을 때로 한답니다. 살구 때문에 생각난 '과감'이라는 말의 뜻을 이야기한다는 게 너무 무거운 이야기로 흘렀나요? 뻔하고 고루한 이야기가 된 듯합니다만 제 자신에게 제일 크게 하는 이야기이니 너그러이 넘겨주세요.

마침 장마철이라 간간이 비가 뿌립니다. 그때마다 창을 열고 옥수수 밭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를 듣습니다. 여기서는 이 소리가 가장 가까운 벗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후둑하는 소리는 리듬이 좋고, 가늘게 내리는 이슬비 소리는 마음을 순하게 합니다. 바람에 수런거리는 소리 또한 배워 따라하고 싶은 외국어처럼 선선합니다.

강원도이니 이렇게 큰 옥수수 밭을 볼 수 있지 저희 고향 집에서의 옥수수 농사는 그저 밭 가장자리에 스무나문 포기 기르는 게 전부였습니다. 본격적인 농사라기보다 간식거리를 위한 것이었으니 없어도 그만인 일종의 장식 농업인 셈이지요.

헌데 어느 해인가 태풍이 불어 텃밭 가에 심은 옥수수가 전부 꺾이고 부러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풍경은 어린 눈에도 좀 참담해 보였지요. 저녁이면 늘 서걱대며 울던 옥수숫대가 모두 모진 매를 맞은 것 같았으니까요. 늘 저녁나절 밥이 뜸 들 시간 같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텃밭 가장 자리에 옥수수 씨앗을 놓던 어머니를 보았던 터라, 태풍 이후 수척하게 서 있던 그 옥수수 풍경은 이런 생각을 낳게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텃밭 가에 옥수수를 심어 우리 집 울음을 대신 울게 하셨을지 모른다는……. 그것은 부끄럽게도 하나의 시구가 되어 제 시집 어느 모퉁이에 숨어 있을 겁니다.
모처럼 텔레비전 없는 고요한 방에 묵으니 귀맛이 살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많은 기척을 소리로 짐작했던 옛날을 되찾은 듯합니다.

원주에서 장석남

장석남 / 1965년 인천에서 나서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맨발로 걷기>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