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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수필.기타

[아버지의 추억] 마종기

[아버지의 추억]

시인 마종기


눈물 닦는 뒷모습에 매맞은 아픔 사라지고…

아버지는 항상 뒤돌아선 곳, 안 보이는 곳에서 우셨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했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보셨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뒤에야 보고 싶고, 그 분의 말씀은 불가능한 곳에서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옛날 우리에게 아버지는 누구였고, 지금 우리에게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 실종 시대를 걱정하는 이 시절,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아나선다. /편집자

 

 

 

1963년 마종기씨가 공군 군의관 시절 아동문학가인 부친 마해송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문학과 지성사 제공
나는 아버지가 34세 때 태어났고, 아버지는 61세에 돌아가셨다. 내가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아버지라는 존재를 한 인간으로 만나게 된 것은 언제쯤일까. 아마 내가 열살 쯤은 되고 난 뒤가 아니었을까. 한국전쟁 중 피란살이 2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헤어져 살았던 것까지를 헤아린다면 이 세상에서 내 아버지와의 만남은 겨우 15년이 될까말까한 짧은 기간이다.

그 15년 중 크게 기억나는 아버지와의 관계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된다. 겨울이 유난히 춥던 대구 약전골의 작은 한옥에 세들어 피란살이를 할 때다. 아버지, 어머니와 두 동생까지 다섯 식구가 함께 누우면 한 끝에서 다른 끝이 붙어버리는 한 칸 방 작은 곳에서 살던 어느날 나는 아버지께 혼쭐나게 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 피란 시절 주인집에서는 일간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다. 그 시절 일간 신문을 구독하려면 제법 여유 있는 집에서만 가능했다. 거의 매일 그랬듯이 나는 그날도 주인집에 배달된 석간 신문을 집어서 주인 없는 틈을 타 마당에서 잠시 읽고 주인집 마루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 주인집 아주머니가 큰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오늘 온 신문을 네가 읽고 어디에 두었느냐,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혼비백산한 나는 그때부터 온 집안을 뒤졌지만 신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시던 아버지는 주인집에 정중히 사과를 하시고 나를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매를 내리셨다. 나는 생전 처음 온몸에 매를 맞으며 땅바닥에 넘어지기까지 했다.

매를 끝내신 아버지는 책임질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남의 물건을 귀하게 여겨라, 남에게 야단 맞고 멸시받는 인간이 되지 않아야 한다 등등의 훈계를 하셨고, 나는 반쯤 듣는 척하며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있다가 우연히 고개를 드니 아버지가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닦으며 울고 계셨다.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처음 본 나는 너무 황당해서 삽시에 매맞은 아픔도 잊고 맑게 새로 복받치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용서를 빌었다.

아버지는 그 즈음부터 학교 공부만큼 중요한 것이 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할 줄 아는 여유라시며 내가 그 방면에 관심 갖기를 바라셨다. 그 어려운 피란생활 중에도 나를 가끔 다방에 데리고 가셔서 베토벤을 듣게 해 주셨고, 음악을 설명해 주셨고, 좋은 미술 전람회에 가도록 주선해 주셨다. 내 글쓰기에는 별로 관심을 주지 않으셨지만 좋은 책을 읽도록 책도 많이 구해주셨다.

몇년 간의 고달픈 피란생활을 마치고 명륜동의 작은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한국 최초의 발레리나였던 어머니가 대학에 출강하기 시작하시면서 가계를 도우셨고, 그래서 점심을 자주 굶어야 했던 피란 시절의 배고픔과 쓸쓸함은 차츰 잊혀 갔지만 우리 세 형제의 학교 등록금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으셨던 것 같다. 우연한 기회에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작은 집도 통째로 은행 담보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안 형편이 빠듯했던 것에 비하면 나는 상당히 풍족한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내게 용돈을 많이 주셨고, 용도를 밝히면 거의 거절하지 않고 돈을 주시면서 몇 말씀을 곁들이셨다. 돈에 너무 집착 말고 어른이 되어도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 돈은 편리한 생활의 방편일 뿐이다, 돈은 약과 같아서 적당량은 좋지만 많으면 독이 되어 사람을 죽인다, 평생을 사귈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네가 돈을 써서라도 사귀도록 하라, 돈 때문에 친구에게 지저분한 인상을 주지 말라…. 그러나 나는 이런 말씀을 구실삼아 좋은 친구는커녕 껄렁한 술마시기에 흥청거린 적이 더 많았다.

의대를 졸업하고 돈 많이 준다는 미국에서 의사 수련을 하기 위해 군의관을 하던 중 아버지와 관련된 큰 사건이 하나 터졌다. 그 당시 군사정권이 굴욕적인 조건으로 한·일 회담을 하려는 것에 반대하는 재경 문인 105명이 한·일회담 반대 선언을 냈는데, 아버지와 함께 너댓 분이 주동이 된 이 선언문은 도하 신문에 서명 문인들의 이름과 함께 대문짝만한 기사로 나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이름도 그 명단에 들어 있어서 군인(군의관)이 정치에 관연했다는 죄목으로 나는 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아버지는 그 일을 자책하시며 금고 2년형과 의사면허증도 빼앗기게 된다는 소문에 소주를 매일 한 되씩 드셨다. 그 얼마 후 감방에서 운좋게 풀려난 나는 미국으로 도망치듯 떠났고, 아버지는 내가 떠난 지 4개월반 만에 갑자기 뇌일혈로 돌아가셨다. 아마 술 탓이었을 것이다.

미국 병원서 보내준 비행기표로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타고 아버지가 어렵게 마련해주신 미화 50달러를 가지고 미국에 온 나는 비행기표 살 돈 한푼 없고, 돈 빌릴 곳도 없어 큰아들이면서도 아버지의 임종은커녕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제 당신이 돌아가신 지도 어연 37년. 나는 거의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매일 아버지의 영혼을 위해 짧은 기도를 바쳐 왔다. 내가 아직도 가장 존경하는 분, 내게 영향을 가장 많이 주신 분인 아버지를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는 간절한 희망을 아직도 고히 간직한 채 살고 있다.

(마종기 시인)

 

 

 

▲ 마해송·마종기 부자는…

미국에 사는 마종기(1939~)씨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고 의사이며 시인이다. 그의 아버지 마해송(1905~1966)씨는 동화집 ‘떡배단배’로 유명한 아동문학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