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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가 추구한 여성상 '팜므 파탈'

클림트가 추구한 여성상 '팜므 파탈'



 

오스트리아 출신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는 신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화가였다. 그의 표현주의에는 고대와 현대를 연결하는 고리가 있어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고대 신화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필요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19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아르 누보와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황금 빛의 화려한 화면과 풍부한 장식성을 추구함으로서 신비스러운 관능적 이미지를 창출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 다양한 비전문적  애호층을 만들었다.

클림트에게서 여성 누드는 성적 대상이라기보다 자신이 추구하는 회화적 표현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수단이었다. 그에게 누드는 자유와 평화의 여신을 의미했고, 대상을 이상화하고 미화한 에로스 그 자체였다.  조금 더 나아가 여자를 성적인 자기 환상에 도취되어 남자를 자극하는 매혹적이면서도, 치명적인 파멸의 독을 품은 적 존재로 그렸다.   

그의 작품들은 당대에도 이미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살았던 세기말의 시대는 그의 작품보다 더 퇴폐적이었다. 부르주아의 청교도적인 도덕률은 제국주의와 함께 오간데없이 사라졌고, 매독은 창궐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면 그의 작품에서 어째서 그토록 많은 여인들이 등장하며 다소곳한 표정의 수줍게 고개 숙인 누드가 아니라 에로틱한 자세로 도발적인 분위기를 내뿜는가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정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그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역사 속의 정숙한 여인이자  유대 민족을 구원한 유디트는 여전사가 아닌 금방 정사를 끝낸 여인의 몽롱한 눈빛을 취하고 있다. 클림트다운 적 해석의 정수라 아니할 수 없다.



유디트 1(1901)

19세기 말 대다수 예술가들을 미치게 만들었던 팜므 파탈로 새롭게 태어난 클림트의 유디트는 분명 자신이 흠모하는 '여성성'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녀의 몽롱한 눈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벤 유태민족의 영웅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불타는 쾌락적인 욕망의 표출 바로 그것이다.



다나에(1907~08)

바람둥이 신 제우스는 다나에의 매력에 푹 빠졌고, 황금비로 변해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다.

이 그림은 바로 그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일찍이 많은 예술가들이 이 소재를 자신의 작품속에 즐겨 다루었지만 클림트만큼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한 순간을 포착해낸 사람은  결코 없는듯 하다..



입맞춤(1907~08)

남자의 마른 입술이 빰에 닿아도 여자의 기다림은 끝나지 않는다.

기다림의 표현인듯 반짝이는 꽃과 별, 그속에서 여자의 마음이 기다림의 탑을 만들어 나간다.

이 작품이 풍기는 몽환적 분위기와 신비로운 에로티시즘은 우리에게 낯선 어딘가를 헤매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해준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1(1907)

과 함께 '황금시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 그림은 클림트에게 단순한 초상화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르 누보 특유의 물결 문양, 세모 속에 새겨진 눈, 다양한 무늬들로 구별되는 황금빛 일색의 그림은 마치 세심하게 만들어진 모자이크를 보는 것 같다.

장식이 지나치게 많아 소재를 압도해 버릴 위험도 없지 않지만 아델레의 우아한 모습은 그런 위험이 여기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과시하는 듯 하다..



메다 프리마베시의 초상(1912)

클림트의 열렬한 후원자 부부 딸인 아홉살의 소녀 메다는 두 다리를 벌린 채 한 손을 허리 뒤로 올리고 도전적으로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소녀의 뒤로 펼쳐진 공간에는 여러 색의 꽃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데 이는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해 나가려는 소녀적 환상을 암시하는 듯 하다. 아니면 화가의 '롤리타'적 애정관을 은연 중에 드러내는 것도 같고..



모자를 쓴 여인(1909~10)

이 그림을 보면 왜 클림트를 미인의 숭배자라 하는지를 짐작케 한다. 왼쪽을 향? 시선, 내려 뜬 눈, 차가운 표정.. 그녀의 얼굴은 모자와 머리, 목도리에 의해 가려졌지만 도발적인 죄악의 냄새를 감출 수는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잠시도 시선을 뗄 수 없는 육감적인 생기가 끊임없이 뿜어지고 있다.



검은 깃털 모자를 쓴 여인(1909~10)

비스듬히 몸을 기울인 채 담배를 꼬나문 여인은 분명 '팜므 파탈'적 캐랙터의 전형이다.

특히 모자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그림의 주인공이 여인인지 모자인지를  묻게 할 정도이다.



아터 운트라흐의 집들(1908)

클림트 풍경화들에서는 원근법이 교묘하게 비틀려 있으며 빛의 방향조차 일정하지 않다. 단지 빛의 확산과 관조적인 정적만이 흐르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름 풍경

클림트의 '모자이크 양식' 풍경화 중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다. 모자이크처럼 작은 붓질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구성하고 있으면서도 하나하나의 붓질이 전체 구성에 거슬리기는 커녕 잘 융화되어 절로 감탄사를 연발케 한다. 그림의 형식과 기법이 하나로 녹아 있는 이 아름다운 그림 앞쪽에 펼쳐진 초원은 세심하게 장식된 융단처럼 부드럽다.



고요한 호수

단지 빛의 확산과 관조적인 울림만이 있는 독특한 분위기이다. 그림 전체를 지배하는 고요함은 인간의 행위나 동적인 에너지가 끼어들 여지를 아예 없앤다.
클림트 풍경화 대부분이 취하고 있는 정사각현 형태가 이 집요한 정적을 강조한다. 움직임과 방향성의 결여는 그림 속 풍경을 초시간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고 물리적 자연을 넘어선 영적인 자연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곳은 어떤 모습 인가. 숲 깊숙한 곳에 듬성듬성 서 있는 나무 수평선이 높게 잡힌 호수 표면에 반사되는 빛의 떨림. 캔버스 가득 펼쳐지는 초원에 피어 있는 꽃과 풀의 반짝임.



석양

사람의 자취는 없이 자연 정경만이 펼쳐지는 풍경화들은 보는 이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힘이 부족하다. 풍경화에서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사람의 자취 적어도 '나' 라는 일인칭 자아에 의해 굴절된 풍경을 바란다면. 그래서 내면의 갈망과 외침이 뚝뚝 묻어나기를 바란다면 클림트의 풍경화는 분명 재미가 없다. 그렇지만 클림트의 풍경화를 그저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이 그림이 보여주는 풍부한 감수성의 세계로 들어서는 문을 미리 닫아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여기에도 클림트 특유의 감성이 펼쳐진 것을 놓치기 때문이다.



아터호의 시골집

나무들과 관목 덤풀, 집은 형체가 불분명하여 신비한 느낌까지 준다. 전혀 사실적이지 않아 보이는 이 그림에서 오히려 현상 배후에 있는 '알 수 없는 그 어떤' 진실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듯 하다.



캄머 城으로 가는 길(1912)

클림트의 풍경화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특성을 지닌 채 그윽한 품격과 내밀한 쾌락적 분위기가 묘하게 어울러지는 매력을 발산한다. 그의 빼어난 자연주의 묘사 기술과 섬세한 색상, 그리고 장식적 요소에는 눈에 즐거운 게 마음도 즐겁게 해준다는 쾌락주의가 강렬하게 배어있다. 이 그림에서도 자연에서 장식적 요소를 뽑아내어 자신만의 쾌락적 운치로  전환시키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십자가가 있는 농가 정원

나무들과 관목 덤불, 집은 형체가 불분명하여 신비한 느낌까지 준다. 그래서일까. 전혀 사실적이지 않고 풍경이 모호하게 뒤섞인 듯한 이 그림에서 오히려 사실적인 그림이 줄 수 없는 어떤 것. 현상 배후에 있는 실제 혹은 진실이 어렴풋이 드러나 있다.
이처럼 실재와 진실이 환기되는 느낌을 받는 것은 이 그림이 가진 완벽한 조화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실제와 진실은 결코 들추어서는 안 된다는 베일 뒤에 숨어 있는 이시스 여신상이 가진 의미와 통한다.



해바라기가 있는 정원(1906)

클림트의 해바라기는 고호의 그것과 다르다.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이글거림은 없다. 태양의 신 아폴론을 연모했던 처녀보다는 아폴론의 구혼을 피해다니다 월계수로 변한 다프네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