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가던 길 멈춰 서서 |
발행일 : 2004-03-13 D8 [Books] 기자/기고자 : 장영희 |
어느 상가를 지나는데 아주 화려하고 예쁜 잠옷이 걸려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꽤 고가품 같았다. 얼마냐고 물으니 주인여자가 ‘손님이 입으실 거 예요?’ 하고 되물었다. 사실 나는 호기심에 값만 물어본 것이지만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여자는 대답 대 신 밑에서 내복 한 벌을 꺼내 앞으로 툭 던지며 “재고 남은 건데 만이천원 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장애인이 니 가난해서 고가의 잠옷은 엄두도 못 낼 거고, 목발까지 짚은 별로 아름답지 못한 몸에 예쁜 잠옷이 가당찮다 는 생각에서 그 여자 나름대로의 배려와 친절이었을 테지만, 난 적이 불쾌했다. 어느 해 여름 방학에 잠깐 귀국해 있는 동안 동생과 명품을 많이 판다는 패션 가를 지날 일이 있었다. 난 학교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낡은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어 떤 옷가게 쇼윈도에 걸린 옷을 보더니 동생이 기필코 한 번 입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 가려고 했으나 입구에 턱이 너무 높아 동생만 들어가고 나는 문 밖에 서 있었다. 주인 여자는 착의실에 들어간 동생을 기다리다가 문득 문간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대번에 낯색이 변하더니 “동전 없어요, 나중에 오세요 ” 하는 것이었다. 그제나 이제나 눈치 없기로 소문난 나는 그 여자의 말을 못 알아듣고 눈만 껌벅이고 서 있었 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더욱 표독스럽게 “영업 방해하지 말고 나중에 오라는데 안 들려요?” 하는 것이었다. 그때 동생이 옷을 반만 걸치고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뭐예요! 우리 언니를 뭘로 보고 그러는 거예요?” 난 그 제서야 주인여자가 날 거지로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걸인시인’으로 알려진 영국시인 W H 데이비스(1871~1940)는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조모 밑에서 가 난하게 자랐다. 열세 살 때 친구들과 도둑질을 하다 체포된 후 퇴학을 당하고 액자공장에서 도금 기술을 배우지 만, 그 일을 혐오해서 몰래 책을 읽다가 들키기 일쑤였다. 조모가 죽자 그는 고향을 떠나 일정한 직업 없이 걸 식을 하면서 방랑한다. (후에 그는 이때의 생활을 “문학을 하고 싶은 야망으로 저주받지 않았다면 나는 죽는 날까지 거지로 남았을 것”이라며 걸인 생활에 대한 향수를 토로한다) 그러나 28세 되던 해 그는 금맥이 터졌다 는 소문을 듣고 미국으로 가서 서부로 가는 화물기차에 뛰어오르다가 떨어져서 무릎 위까지 절단한 장애인이 된 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외다리로는 걸인생활을 하기 힘들어지자 시인이 되기로 작정, 서너 편의 시를 종이 한 장에 인쇄해 집집마다 다니며 팔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자비로 출판한 ‘영혼의 파괴자 외(外)’를 계 기로 그는 특이한 삶을 산 방랑걸인 시인으로 서서히 관심을 끌기 시작하고,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그의 대표작 ‘가던 길 멈춰 서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잠 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인생일까? 나무 아래 서 있는 양이나 젖소처럼 한가로이 오랫동안 바라볼 틈도 없다면 숲을 지날 때 다람쥐가 풀숲에 개암 감추는 것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햇빛 눈부신 한낮, 밤하늘처럼 별들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아름다운 여인의 눈길과 발 또 그 발이 춤추는 맵시 바라볼 틈도 없다면 눈가에서 시작한 그녀의 미소가 입술로 번지는 것을 기다릴 틈도 없다면 그런 인생은 불쌍한 인생, 근심으로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 온 세상이 풍비박산 나는 듯 시끄러운데 강물에 몸을 던질 만 큼 괴로운 일이나 내 몸에 불지를 만큼 악에 바칠 일도 없이, 가던 길 멈춰 서서 나뭇가지에 돋는 새순을 보고 하늘 한 번 올려다 볼 수 있는 이 작은 여유는 크나큰 축복이니까.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 ,,,,,,,, ...................................................................................
Leisure / Davies
개암을 숨기는것을 볼수 없다면
************************************************* 가던 길 멈춰 서서 바라볼 시간이 전혀 없는
조금 더 높은 자리, 조금 더 넓은 집, 그때는 한가롭게 여행도 가고 남을 도우며
아픈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진다면
(장영희의 영미詩 산책 시집 '생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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