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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수필.기타

허수경

 

허수경 :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길>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등이 있으며, <동서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폐병쟁이 내 사내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 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 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워주고 싶었네
산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 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 뿐이랴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허수경, <실천문학사, 1988>





왜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면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꿈 같은가 현세의 거친 들에서 그리 예쁜 일이라니

나 돌이켜 가고 싶진 않았다네 진저리치며 악을 쓰며 가라 아주 가버리라 바둥거리며 그러나 다정의 화냥을 다해

온전히 미쳐 날뛰었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 등꽃 재재거리던 그 밤의 폭풍우의 밤을 향해

나 시간과 몸을 다해 기어가네 왜 지나간 일은 지나갈 일을 고행케 하는가 왜 암암적벽 시커먼 바위 그늘 예쁜 건 당신인가 당신뿐인가

인왕재색커든 아주 가버려 꿈 같지도 않게 가버릴 수 있을까,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내 몸이 마음처럼 아픈가


『혼자 가는 먼 집』허수경, <문학과 지성, 1992>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 라디오작가 일을 하며 시를 썼던 허씨는 1992년 갑작스럽게 독일로 건너갔고, 뮌스터대에서 고대 근동고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역사적 민중성과 현실성이 결합된 우리 민족의 한의 정서를 놀랍도록 서정적인 언어로 갈무리해 담아낸 그의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1988)는 시단에 충격을 주며 허수경이란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킨 시집이었다.

독일로 간 후에는 전공인 고고학적 사유와 국제적 시야를 결합해 반전, 문명비판적 주제의식으로 시 세계의 확장을 보여주었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등은 그가 독일에 있으면서 쓴 시집이다. 그는 <끝없는 이야기>(미하일 엔데), <사랑하기 위한 일곱번의 시도>(막심 빌러)를 번역하는 등 독일문학 소개에도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