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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수필.기타

과월절 전날에 돌아가시고 묻히신 예수

예수께서는 안식일 준비일, 곧 금요일에 돌아가시고 묻히셨다. 이 점에 있어 마르코 수난사와 요한 수난사의 기록이 온전히 일치한다. 마르코는 예수의 장례 일시를 다음과 같이 명기했다. “이미 저녁이 되었고 실은 준비일, 즉 안식일 전 날이었다”(마르 15,42). 마르코의 예수 장례기를 보면, 서산에 해가 지면서 안식일이 시작되기에 그 전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서둘러 예수의 시신을 안장했다는 느낌을 준다(마르 15,42: 참조 14,8).

마르코가 채록한 예수 전승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예수 전승을 채록한 요한 역시 두 차례에 걸쳐 이르기를, 예수께서는 금요일에 돌아가시고 묻히셨다고 한다. 예수의 죽음과 관련해서 요한은 이렇게 적었다. “실은 그 날은 준비일이었고 그 안식일은 큰 날이었으므로 , 유대인들은 (사형수들의) 몸들이 안식일에 십자가 위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려고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들을 꺾지 않고 군인들 가운데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 즉시 피와 물이 나왔다.”(요한 19,31-37).

또한 요한은 예수의 장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런데 그 날은 유대인들의 준비일이었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거기에다 예수를 안장했다”(요한 19,42). 마르코와 요한이 제각 채록한 예수님의 종생에 관한 전승들이 일치하는 점으로 미루어 예수께서는 분명히 안식일 전날 금요일에 돌아가시고 묻히셨다.

과월절 전날에 돌아가시고 묻히신 예수

   
▲ 십자가상의 예수. 에피오피아, 1450 AD.
우리네 날짜 계산법으로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목요일 저녁 때 제자들과 함께 최후만찬을 드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선 일몰에서 다음날 일몰까지를 하루로 보는 까닭에 예수께서 목요일 일몰 후 제자들과 더불어 잡수신 최후만찬 날짜는 안식일 전날이었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최후만찬이 과월절 만찬이었다고 한다(마르 14,12-16). 그러니까 최후만찬, 체포, 최고의회 심리, 빌라도의 사형언도, 사형집행 등 일련의 예수 종생 사건들이 유대 월력으로 니산달 15일 과월절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 설을 따르는 신약학자들이 적지 않은데 대표적으로 다음 분들을 꼽겠다.

·J.예레미아스, Die Abendmahlsworte Jesu, Gottingen 1936, 4 Aufl, pp. 35-36.
·R.페쉬, Das Markusevangelum, 2. Teil, Freiburg 3. Aufl. 1980, pp.323-328.
·T.홀스, jesus aus Nazaret. Was wissen wir von ihm, Zurich 1981, p.116.
·J.그닐카, Jesus von Nazaret. Botschaft und Geschichte, Freiburg 1990, pp.282.316.
·S.레가세, Leproces de Jesus. L'histoire, Paris 1994, pp.113-118.


예수의 최후만찬 날짜가 니산 15일 과월절 만찬이었다는 학설은 다음 다섯 가지 이유로 오설이라 여겨진다.

첫째, 이스라엘 최대 명절인 과월절에 체포, 처형 등 일련의 예수 사건들을 치루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둘째, 두 가지 오래된 최후만찬기(마르 14,22-25: 1고린 11,23-26)에 무교병, 어린 양, 쓴 나물 등 과월절 음식이 전혀 나오지 않고, 어느 회식 때나 상에 오르는 보통 빵과 술이 나온다. 최후만찬 절차도 유대교 회식 절차와 잘 어울린다.

셋째, 문헌 비평적으로 볼 때 최후만찬 준비 이야기(마르 14,12-16)와 예루살렘 입성 준비 이야기(마르 11,1-6)는 내용과 표현에 있어 같은 점이 많다. 내용으로 일치하는 점은 예수께서는 예언자적 혜안으로 앞일을 환히 내다 보셨다는 것이다. 표현상으로는 두 기사에 같은 낱말들이 많이 나온다(14,13a.14.16과 11,1.2.3.4.6비교).

전승사적으로 볼 때, 제자들이 예수의 명을 받잡고 예루살렘 시내에 있는 어느 집 큰 이층방에 과월절 만찬을 준비했다는 이야기(마르 14,12-16)는 전승과정 중에 최후만찬기의 서문으로 덧붙인 것이라 하겠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입성 준비 이야기(마르 11,1-6)역시 전승과정중에 예루살렘 입성기의 서문으로 만들어 덧붙였다고 생각된다.

넷째,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과월절 전날에 처형되셨다고 한다(요한 18,28: 19,14.31). 정확히 말해서 성전에서 어린 양들을 도살하는 시각에 예수께서는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인데, 이는 예수를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간주한 요한 복음작가의 사상을 반영한다(요한 1,29.36; 19,33-36). 그러니까 신학리(神學理)임에 틀림없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신학리’ 라고 보아 무방하겠다. 사건이 먼저 있었고 ‘신학리’는 나중에 생겼다는 말이다.

다섯째, 바빌론 탈무드 산헤드린 43a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과월절 전날 저녁 때 처형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요한복음서의 증언과 일치한다. 바빌론 탈무드 산헤드린 43a의 예수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과월절 전날 저녁 때 예수를 매달았다. 그 40일 전에 전령이 이렇게 외쳤다.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마술을 부려 이스라엘을 오도하고 배신토록 했기 때문이다. 그를 변호할 말이 있는 사람은 나와서 발설하시오’ 그러나 변호하는 말이 없었으므로 과월절 전날 저녁 때 그를 매달았다.” 이 기록을 역사적으로 사실과 어긋나는 전설로 치부하는 이들이 없지 않은데 예로 두 분을 꼽겠다.

J.마이어, Jesus von Nazareth in der talmudischen Uberlieferung. Ertrage der Forschung 82, Darmstadt 1978, pp.219-237.
J.그닐카, Jesus von Nazaret p.282.


이들은 바빌론 탈무드의 예수관련 기사를 역사적 가치가 전혀 없는 것으로 일축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론 전설 속에 역사적 정보들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한다. 예수를 처형한 이유로 “그는 마술을 부려 이스라엘을 오도하고 배신토록 했다”고 하는데, 이는 예수가 기적과 설교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전통 신앙을 저버리게 했다는 뜻인 것 같다. 이는 사실을 반영하는 말이다. 아울러 과월절 전날 저녁 때 예수를 매달았다는 기록은 과월절 전날 오후에 예수를 처형했다는 요한 복음서의 기록과 엇비슷이 맞아 떨어진다.

위에서 열거한 논거들에 따라, 예수께서는 니산 14일, 곧 과월절 전날 오후에 처형되셨다는 요한 복음서의 증언을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는 주석가 들이 대다수인데 예로 다음과 같은 이들을 꼽겠다.

R.슈낙켄부르크 Das Johannesevangelium, 3. Teil, Feriburg 5.Aufl. 1986, pp.39-43.
J.블랑크, Die Johannespassion. Intention und Hintergrunde, in: K.Kertelge(Hrsg), Der Prozess gegen Jesus. Historische Ruckfrage und theologische Deutung, Freibung 1988, p.154n.15.
W.뵈젠, Der letzte Tag des Jesus von Nazaret, Ferburg 1994, pp.84-85.
R.E.브라운, The Death of the Messiah, vol.2, New York 1994, pp.1373-1376.
샤를르 빼로 지음, 박상래 옮김, <예수와 역사>, 가톨릭출판사 1985, 82-84쪽.

예수께서는 서기 30년 4월 7일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리라

예수께서 최후만찬을 드시고 수난하시고 묻히신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난 날은 니산 14일, 곧 과월절 전날 겸 금요일이라는 결론을 앞에서 내렸다. 서기로 환산하면 그날은 30년 4월 7일이겠다. 서기 33년 4월 3일도 과월절 전날 겸 금요일이었기는 하지만, 이는 아무래도 예수의 전도 기간과 덜 어울린다. 루가는 “티베리오 황제 치세 제15년에” 요한 세례자가 세례운동을 벌였고,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다음 공적으로 전도하셨다고 한다(루가 3,1).

시리아 지방의 역산법에 따르면, 티베리오 황제 치세 제15년은 서기 27년 10월 1일부터 28년 9월 30일에 이른다. 예수께서 서기 27-28년에 공생활을 시작하셨다는 루가 3장 1절의 기록은 요한 2장 20절과 썩 잘 어울린다. 여기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께 이렇게 윽박질렀다고 한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이나 걸려서 지었는데 당신이 그것을 사흘 안에 세우겠다 말이오?” 헤로데 대왕이 예루살렘 성전 증축 공사를 시작한 해는 기원전 20-19년이다(요세푸스,<유대고사>, 15, 380). 그로부터 46년간 공사가 계속된 해는 서기 27-28년이다(빼로, <예수와 역사>, 84-85쪽). 이 연대는 티베리오 황제 치세 제15년에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했다는 루가 3장1절의 기록과 신통하리만큼 일치한다.

예수께서 서기 27-28년에 전도를 시작하시고 서기 30년 4월 7일에 종생하셨다는 설이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면, 그분은 2-3년 남짓 공적으로 활약하신 셈이다. 이는 예수께서 공적으로 활약하시는 동안에 과월절을 세 번 맞이하셨다는 요한복음서의 기록(요한 2,13; 6,4; 11,55)과도 어울린다. 예수의 종생 일을 33년 4월 3일 과월절 전날 금요일로 잡는다면 예수의 활동기간은 무려 5-6년으로 불어난다. 이는 아무래도 너무 긴 기간인 듯하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는 서기 30년 4월 7일 금요일, 유대 월력으로 니산 14일 오후에 골고타 형장에서 36세를 일기로 종생하셨다고 하겠다. 

정양모 신부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에서 유학을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1970년부터 2002년까지 광주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공회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지냈다. 2005년부터는 다석학회 회장을 맡아 다석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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