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운사 洞口 *
서정주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 동백 *
강은교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오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 동백 *
김재화
벼랑을 짚고 섰는
등 굽은 동백나무
기다림에 발이 저려
그리움은 새파란데
잠깐 머물다 가는
동박새 한 마리
놓고 간 울음빛이
더욱 붉어라
* 동백꽃 *
유치환
그대 위하여
목 놓아 울던 청춘이 이 꽃 되어
천년 푸른 하늘 아래
소리 없이 피었나니
그날
한장 종이로 꾸겨진 나의 삶은 죽음은
젊음으로 말미암은
마땅히 받을 벌이었기에
원통함이 설령 하늘만 하기로
그대 위하여선
다시도 다시도 아까울리 없는
아아 나의 청춘의 이 피꽃!
* 동백 *
문정희
지상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뜨거운 술에 붉은 독약 타서 마시고
천 길 절벽 위로 뛰어내리는 사랑
가장 눈부신 꽃은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이라
* 허공 *
김영미
어디를 들이받는지 옷을 벗다보면
늘상 여기저기 피멍이다
통증이 피었다
진 자리
떨어진 동백 서너 송이
어디에 심하게 받쳤는지
석달 열흘 내내 정신이 멍하다
장산역을 내렸을 때
필히 들고 와야 할 전화번호를
탁자 위에 두고 왔음을 깨달았다
멍청은 허공의 다른 말
멍청해진다는 것은
몸에
허공의 개수가 늘어난다는 말
내가 지금 나온 곳이 9번 출구던가
오락가락 헤매기를 한참
7번 출구 밖 다리를 쉬었던 돌부리에
거적때기로 버려져 있다
그 속에
팔다리가 없는
몸뚱이 하나가 누워 있다
허공을 올려다보니
머리와 가슴이 없다
내가, 허공이다
*백 련사 동백숲길에서 *
고재종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 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예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 붉은 동백 *
문 태준
신라의 여승 설요는
꽃 피어 봄마음 이리 설레 환속했다는데
나도 봄날에는
작은 절 풍경에 갇혀 우는 눈먼 물고기 이고 싶더라
쩌렁쩌렁 해빙하는 저수지처럼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어도
봄밤에는 숨죽이듯 갇혀 울고 싶더라
먼발치서 한 사람을 공양하는
무정한 불목하니로 살아도
봄날에는 사랑이 살짝 들키기도 해서
절마당에 핀 동백처럼 붉은 뺨이고 싶더라.
'아름다운글 >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까짓것, 봄/ 장근배 (0) | 2013.03.19 |
---|---|
바람부는 날..김종해 (0) | 2013.03.19 |
동백 (0) | 2013.03.11 |
- 박목월, ‘난’ (0) | 2013.03.11 |
야생화 이 선 (0) | 2013.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