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에서 그만 하직(下直)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난(蘭)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이 작품은, 목월의 두 번째 시집 「蘭, 其他」의 표제작이다. 시집 「蘭, 其他」의 서문에서, “밤이 길어지고 머리에 서리가 치기 시작했다. 인생도 유감(有感)할 무렵으로 접어든 셈이다”라고 시인은 말한다. 인생도 유감할 무렵에 접어든 시인이, 자신의 삶을 조용히 응시하며 앞으로 지니고자 하는 삶의 자세를 난초에 의지하여 생각해본 것이 바로 <난>이라는 작품이다.
<난>은 갑작스런 느낌으로 시작된다. 시인은 갑작스럽게 이쯤에서 하직하고 싶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단호한 뜻을 드러낸다. 그리고 독자들로 하여금 시인은 무엇을 왜 하직하고 싶다고 말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만든다. 이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 곧 이 시를 이해하는 것이 된다.
2행과 3행은, 시인이 생각하고 있는 하직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준다. 시인은 ‘조금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하고 말한다. 즉 자기 삶에서 허락받은 것조차 다 갖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자신이 누릴 수 있고 또 취할 수 있는 것을 전부 갖지 아니하고 조금 남았을 때 여유있게 끝내고 그것으로 만족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가질 수 있는 것도 다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애석하고 섭섭한 일이다. 그것은 시인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애석하게 버린 것’ 또 ‘섭섭한 뜻’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렇지만 시인은 애석함과 섭섭함을 스스로 선택하고자 한다. 그러한 애석함과 섭섭함을 통해서만이 더 큰 가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분수를 아는 삶의 소중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자기 자신의 삶에서 허락받은 것만 가지고자 하는 삶은 분수를 아는 삶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시인은 애석하고 섭섭하더라도 그보다 더 작게 갖겠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인생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분수를 알고 지키는 태도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자신의 분수를 지키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욕심을 내는 태도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좀더 작게 욕심을 내는 것은 더욱 겸손한 태도이며 그만큼 더 성숙한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고 그러한 삶의 태도에는 여유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여유란 자신의 능력이나 힘이나 재산이나 시간을 다 쓰지 않고 남겨 두는데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질 수 있는 것조차 다 가지지 않겠다는 것, 그러한 겸허한 삶의 태도가 바로 이 시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구절의 어조에서도 시인의 삶에 대한 겸손한 마음이 잘 드러난다. 시인은 ‘허락받은 것’이란 표현을 썼다. 이 표현 속에는 자신의 삶이 그 누군가가 허락해준 것이라는 겸손한 마음이 들어 있다. ‘양손을 들고’라는 구절 역시 그러하다. 자신의 삶에 대한 한없는 긍정과 겸손이 없이는 이러한 표현들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신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종교적 겸허함이라고도 할 수 있다. 4행과 5행에서 보듯이, 시인은 그러한 태도가 아름답고 훌륭한 삶의 자세라고 다시 한번 확인하고, 스스로 그러한 삶을 살고자 한다.
6행부터는, 그러한 삶의 태도를 난초에 비유하여 부연 설명한다. 시인은 여유있는 하직의 삶이란 것이 난초의 미덕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시인이 보기에, 난초는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가지를 뻗’는다. 자신이 허락받은 것의 일부를 애석하지만 포기할 줄 알고 살아가는 모습을 난초에서 발견하고,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태도도 그와 같이 되기를 희망한다. 또 시인은, 난초의 그윽한 향기가 바로 그러한 삶의 태도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가질 수 있는 것일지라도 여유있을 때 포기하고 버릴 줄 아는 삶은 난초처럼 향기가 높고 고고한 품격이 있는 삶이라는 것이 시인의 전언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러한 난초에서 이상적인 삶의 태도를 배운다.
<난>은 너무나 겸허해서 오히려 고고한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인은 자신의 삶에서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여유 있을 때 돌려보내고자 한다. 이것은 허락받지 않아서 가질 수 없는 것까지 다 가지려하는 보통 사람들의 욕심 많은 삶에 비하면 참으로 고상한 태도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허락받은 것을 최대한으로 가지려는, 우리가 보통 성실하고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태도보다도 한층 의젓한 태도이다. 삶의 깊은 아름다움과 여유와 품격은 버릴 줄 알고 포기할 줄 아는데서 나온다. 시인은 난처럼 그윽한 향기를 머금고 우아한 자태를 지닌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준다. 그리고 그런 삶을 지향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시는, 버릴 줄 알고 포기할 줄 아는 삶을 난초에 비유한다. 허락한 것도 다 가지지 않는 겸허하고 고상한 삶은 난초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러한 삶은 난초의 향기와 같이 은은한 향기를 멀리 퍼뜨리는 삶일 것이다. 그러나 난초가 어째서 허락받은 것은 다 가지지 않는 삶, 혹은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하게 살아가고, 가지를 뻗고, 꽃망울을 이루는’ 삶인가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이점은 이 시의 약점이 아닐까? 그렇지만 이런 비유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난>이란 시는 겸허하게 성숙한 삶의 향기가 배어나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남호(문학평론가·고려대 국어교육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