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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시

바람부는 날..김종해

 

 

 

 

 

바람부는 날..김종해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 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욱 여린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내 사랑은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사랑이 사랑만으로 채워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사랑하는 일도 괴롭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일도

괴롭지 않을 텐데, 하지만 어쩌겠는가,

제일 괴로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못 보는 것이니.

 

중요한 것은 지하철을 타고 가서 내릴 역이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이라는 사실, 왜냐하면 내 사랑은 나밖에 모르는 것이다.

혼자 가야 하기에 외롭고 두려운 길이지만, 오로지 나만이 알고

있기에 비밀스럽고 아늑하며  황홀한 길이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이 아무리 간절하더라도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 알 수 없음이 나를 미칠

만큼 괴롭게 하지만 그 괴로움의 힘으로 나는 당신에게

갈 수 있다.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에도

어둠을 향해 제 발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참견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 김경민...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교육과 시 공부

               동일 여자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지냄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2007년 개정) 공동 집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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