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칼럼]
가을바람속 ‘이별의 노래’
지난 여름은 비도 많이 오고 무더웠지만 열어 놓은 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의 느낌이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뒤뜰의 산벚나무, 자두나무 잎은 벌써 졌고 팽나무 잎도 누렇게 시들고 있다.
바람 서늘해지는 가을이 되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다.
‘이별의 노래’이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 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렇게 시작하는 ‘이별의 노래’는 가을바람 속에서 불러야 제 맛이 난다.
이 노래는 곡도 좋지만 노랫말도 참 아름답다.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변해갈 수밖에 없는
사랑의 속성에 대해 노래한 구절도 아름답고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이별 이후에도 잊혀지지 않고,
지워지지 않는 슬픔에 대해 노래한 이런 구절도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박목월 시인의 사랑과 아픔-
이 노랫말을 쓴 사람은 박목월 시인이다.
6·25 전쟁 중이던 1953년 봄 목월은 자신을 좋아하는 자매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매 중에 언니가 목월을 좋아했는데 언니가 결혼을 하자
ㅇ대학교 국문과 학생이던 동생이 목월을 좋아하게 되었다.
전쟁 직후 폐허가 된 서울의 거리에서 이들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그때 39살이었던 목월에게 자책과 갈등이 없을 리 없었다.
목월은 가까이 지내는 시인을 불러 그 여학생을 설득하도록 부탁을 했다.
문예사 건물 지하에 있는 ‘문예싸롱’ 다방으로 나온 그 여학생은
설득을 하려는 시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요.”
1954년 가을 이 여학생과 목월은 서울을 떠나 제주도로 갔다.
거기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해 겨울 목월의 부인이 그들이 살고 있는 제주 집을 찾아왔다.
목월의 부인은 두 사람 앞에 보퉁이 하나와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보퉁이에는 목월과 여학생이 입을 한복 한 벌씩이 들어 있었고,
봉투에는 생활비로 쓰라는 돈이 들어 있었다.
여학생은 부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고 목월은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리고 집이 있는 쪽이 아닌 효자동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다.
이른 새벽에 깨어 울곤 했다.
(…) 효자동 종점 근처 가까운 하숙집
창에는
창에 가득한 뻐꾹새 울음…
모든 것이 안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도
혹은 사람의 목숨도.”
목월의 시 ‘뻐꾹새’는 밤에도 잠을 못 이루고 새벽에도 일찍 깨어 울던 그 시절에 쓴 것이다.
‘이별의 노래’도 이 여학생과의 이별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높은 하늘 싸늘한 바람 먼 나라
그렇게 높이 우리 가슴은 그리움을 키웠는데
이제 깊게 빈손으로 돌아가라 하네요
(…)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 깊어 가겠네요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우는 겨울밤도 있겠지요
너도 가고 나도 가는 야속한 가을날이
그래도 아름다운 건 당신 때문입니다.”
-사연 있어 더 깊고 아름답다-
이렇게 쓰여진 ‘이별의 노래’는 6연 24행의 긴 시이다.
그중에서 부분 부분을 발췌해서 새로운 노랫말이 만들어졌는데
노랫말로 바뀐 부분들이 간결하고 아름답다.
이들의 순수하고 낭만적인 사랑과 이별의 아픔,
그 아픔을 해결하는 과정이 이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 냈으리라.
이들의 사랑을 놓고 우리가 윤리적이다 아니다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당사자들에게는 큰 상처이고 아픔이었을 사연들이 도리어
노래의 의미를 더 깊고 아름답게 해주고 있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것 이상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 경향신문에서 -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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