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령 큰바람 - 황동규
1
아 바람!
땅가죽 어디에 붙잡을 주름 하나
나무 하나 덩굴 하나 풀포기 하나
경전(經典)의 글귀 하나 없이
미시령에서 흔들렸다.
풍경 전체가 바람 속에
바람이 되어 흔들리고
설악산이 흔들리고
내 등뼈가 흔들리고
나는 나를 놓칠까봐
나를 품에 안고 마냥 허덕였다.
2
초연히 살려 한 적마다
바람에 휩쓸린다.
가차없이
아예 세상 밖으로 쫓겨나기도.
길동무 되어주는 건 흠집투성이의 가로수와
늘 그런 술집 간판뿐.
(내 들리는 술집은 옮겨다니며 줄어든다.
아예 간판을 뗀 곳도.)
점점 바람이 약해진다.
3
이젠 바람도 꿈속에서만 분다.
아니다, 꿈 바깥에서만 불다 간다.
나 몰래 술집 간판을 넘어트리고
가로수를 부러트리고
꿈의 생가를 무너트리고
바람은 꿈 없이 잠든다.
4
바람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작은 새 하나를 꿈꾼다.
바람이 품에 넣다 잊어버린 새
날다가 어느 순간 사라질
고개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벌써 보이지 않는
그런 얼굴 하나를.
그 얼굴은 녹슬지 않으리라
과연?
5
스물세 해 동거한 철제 책상의 분위기가
한동안 이상해
마음먹고 살펴보니
모서리 손잡이 다리
서랍 속 구석구석이 온통 녹.
아 내 삶의 녹.
사라지지 않는 것들은
다 녹이 슨다.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는다.
새 책상 들고 온 용인들을 보내고 연구실 문을 나서다
복도 벽에 밀어논 옛책상 앞에서 그만 발 헛디딘다.
순간 숨 멈추고 간신히 두 손으로 모서리를 붙들고
복도 끝 문밖에 서 있는 나무들을
생전 처음 보듯 신기하게 본다.
나무들은 조용하다.
옛책상의 얼굴을 한번 조심히 쓰다듬어본다.
내 내장, 관절, 두뇌 피질 여기저기서
녹물이 흘러나온다.
녹물이 사방에 번진다.
옛책상의 얼굴을 한번 더 쓰다듬는다.
지구의 얼굴이 부드러워진다.
이상하다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복도 끝의 나무들이 흔들리고
가로수와 간판이 흔들리고
강원도 나무들이 환하게 소리지르고
그 바람 점점 커져
드디어 내 상상력을 벗어난다.
아 이 천지에
미시령 큰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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