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그림들/외국의화가의 작품

부뢰헬의 정물화

조용한ㅁ 2009. 1. 10. 11:36
그 어떤 풍경화보다도 화려하고 풍요로운 꽃 정물화

   오늘은 그 다녀오지 못한 단풍놀이를 이 반짝이는 가을 햇살로 더 붉게 피워낸 "꽃 감상"으로, 대신해보려고 합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뿌듯해지고, 한아름 품으로도 다 품지 못할 만큼, 풍성하고 화려한 꽃 그림 3점을 소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글 가운데 편집해 넣은 꽃그림을 제외하면, 꽃 정물화에 대한 진중한 소개는 처음입니다. 앞으로도 관련하여 더 소개할 계획이므로 기대바랍니다.


   매우 세밀하게 묘사된 얀 브뢰헬(Jan the Elder Brueghel, 네덜란드, 1568-1625)의 꽃 그림들은 미술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정물화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클릭하여 큰 그림으로 관찰하면서 여유롭게 감상해보시길 바랍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마저 풍요로워질 것이며, 이 결실의 계절에 무척 잘 어울리는 감상이 될 것입니다.

   오늘 브뤠헬의 초상과 그의 그림들은 "
The Art Renewal Center"에서 도움 받아 옮긴 것이며, 아래 브뤠헬의 약력과 설명은 브리태니커사전"nation gov art", "주제로 보는 명화의 세계(Alexander Sturgis 편집, Hollis Clayson 자문, 권영진 옮김, 마로니에북스)", "천년의 그림여행(Stefano Zuffi, 스테파노 추피 지음, 예경)"을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므로, 감상에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브뢰헬(Brueghel, 또는 Breughel, 또는 Bruegel)의 옆 초상화는 쿠르츠(Don Kurtz)가 나눔의 정신으로 기꺼이 제공한 초상그림입니다. 필법이 정교하고 다재다능하여 벨벳 브뢰헬("Velvet" Brueghel)이라는 예명으로도 불리웠으며, 현대에서도 정밀한 "정물화 분야의 대가", 또는 "정물화의 선구자"로 평가하고 있지만, 얀 브뤠헬에 대한 자료도 그리 많지 않을 뿐더러, 그에 대한 내용도 사실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얀 브뢰헬은 1568년, 지금은 벨기에에 있는 브뤼셀(Brussels)에서, 아버지 피테르 브뤠헬(Pieter the elder Brueghel, 1525-1569)도 화가였던 집안에서 둘 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인 피테르 브뢰헬(Pieter the younger Brueghel, 벨기에, 1564-1638)도 동시대에 화가로 활동했으며, 아들인 암브로시우스(Ambrosius
 Brueghel , 벨기에,
1617-1675)과 손자인 얀 피테르 브뢰헬(Jan Peeter Brueghel, 벨기에, 1628-1682 이후), 그리고 그의 삼촌인 피테르 앨스트(Pieter Coecke Van Aelst, 벨기에, 1527 이전-1559 경)까지도 화가로 이름을 남긴, 그야말로 화가의 집안입니다.


     화가의 집안에서 태어난 브뤠헬

   얀 브뤠헬은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 해인, 1568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벨기에 엔트워프(Antwerp)에 살던 할머니의 사랑스런 보살핌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이탈리아에 가서 그림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으며, 21살 되던 해인 1590년에는 로마를 여행하며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콜로나(Cardinal Ascanio Colonna)라는 후원자 덕분에 1592년부터 1594년까지 로마에 머물며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엔트워프 출신의 파울러스 브릴(Paulus Bril, 벨기에, 1554-1626)이라는 화가를 만납니다. 곧 매우 정교하고 우아한 화풍의 그의 그림에 매료되었으며, 이는 브뤠헬 작품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됩니다.

   또한 밀란(Milan)에서 브뤠헬의 "자연스러운 명암과 색채"를 높이 평가했던 추기경, 카르디날 페데리고 보로메오(Cardinal Federigo Borromeo, 1568-1631)라는 평생의 후원자를 만나면서, 브뤠헬의 작품 세계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됩니다. 33세 되던 해인 1610년, 오스트리아 왕궁의 궁정화가로 임명받아 활동하며 그의 가치를 인정받았고, 널리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습니다.

   화가 집안에서 자란 그의 아들 얀 브뢰헬 2세(Jan Brueghel , 벨기에, 1601-1670)도 또한 그의 영향을 받아 화가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그림의 주제나 기술을 포함하여 화풍도 이어받았으며, 그림관련 상점을 운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딸, 파사시아(Paschasia Brueghel)도 화가였던 집안의 남편과 결혼하였습니다.

     루벤스와 공동작업을 하기도 했던 정물화의 선구자

   그의 작품활동 초기인 엔트워프에서 작업할 때에는 공동작업을 하기도 했는데, 인간의 형상을 잘 그렸던 피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벨기에, 1577-1640)와 함께 꽃 정물화, 풍경화, 동물화를 작업하였으며, 꽃 속의 성모 마리아(1616), 천국의 아담과 이브(1620) 등 그런 공동작품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플랑드르의 화가(Flemish Painter, Flanders)였던 브뤠헬은 1625년 1월, 58세의 나이로 엔트워프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폴란더즈의 개"란 소설이나 방송 만화의 내용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어린 시절, 문학전집을 선물 받았던 제가 그 가운데 하나였던 이 책을 읽으며 머릿 속에 떠오르던 그 때의 상상들이 한 장의 그림처럼, 필름의 한 조각처럼 지금도 생생하기만 합니다.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하였으며, 갓난 아기 때 엄마를 여의었으나 그 누구보다도 씩씩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던 주인공 소년, 네로가 무척 보고 싶어했던 그림이 있었습니다. 이 만화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인 네로가 그 마을의 성당에 걸려있던 그 그림을 마지막으로 감상한 뒤, 친구처럼 사랑하던 파트라슈라는 개를 타고 별나라로 올라가며 끝이 납니다.
 
   네로가 보았던 그 때, 그 성당의 "성모 마리아" 그림은 바로 이 루벤스의 작품입니다. 브뤠헬의 친구였던 루벤스는 당대에 함께 활동했던 화가이며, 그 외에 네덜란드를 여행하며 아이 헨드릭 반 발렌(I Hendrich Van Balen, 네덜란드, 1575-1632)과도 작품활동을 하였고, 주스 드 몸퍼(Joos de Momper, 1564-1635)와도 같이 공동작업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 유리컵 속의 꽃 정물화(Still Life with Flowers in a Glass), Oil on copper, Rijksmuseum, Amsterdam, Holland ⓒ 2008 Brurghel   
   

 

   "정물화(Still Life)"는 "무생물을 대상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주목할 사실은 신화화나 종교화와는 달리, 정물화는 무엇보다도 실제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물 그림은 고전시대까지도 소급할 수 있으나, 정물화라는 이 용어는 17세기 중반에 나타났습니다.

    정물화의 정의와 새로운 성장의 17세기

   근대 정물화는 17세기에 발생했지만, 정물화의 선구자는 훨씬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화가들은 벽화나 모자이크 장식, 패널화의 세부에 음식이나 꽃, 일상용품들을 그려넣었으며, 주인이 손님에게 대접하는 음식인 "제니아(Xenia)"도 그리기도 하였는데, 이런 정물그림은 대부분 큰 전체 작품의 일부로 나타납니다.

   중세와 르네상스(Renaissance) 화가들도 계속해서 정물을 그렸으나 이렇게 독립적인 그림은 아니었습니다. 16세기 말이 되면서 이러한 종류의 세부묘사가 그 자체로 그림의 주제가 되기 시작하였으나, 대개는 다른 그림에 부가된 형태였습니다. 이처럼 정물화는 17세기에 등장하였으며, 17세기는 정물화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렇게 정물화는 17세기 초에 독립적인 회화 장르로 성장하였으며, 1660년대에는 프랑스 아카데미가 정물화를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수용하였습니다. 17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화가들은 꽃, 음식, 여느 물건과 같은 일상 용품들을 그림의 독립적인 주제로 삼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여 대중의 호응을 받았으며, 대부분의 작품들은 주문을 받아 그리기보다는 새롭게 발전한 미술시장에서 판매되었습니다.


     ▲ 나무통의 커다란 꽃다발(The Great Bouquet), Oil on wood, 1606-7,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Austria ⓒ 2008 Brurghel


    제가 처음 그의 이 그림을 마주대했을 때의 느낌은, 숨이 멎는 듯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이 그림을 감상하는 여러분들의 느낌은 어떻습니까? 전 그 당시 무척 신선한 충격과 함께 온갖 종류의 모든 꽃 들을 다 감상할 수 있는 행복으로, 종합세트라도 선물받은 것처럼 풍요로운 마음이었습니다.

     최초의 꽃 그림, 품에 다 안을 수 없는 커다란 꽃다발

   초기 정물화의 역사에 있어서, 꽃은 정물화의 주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특히 플랑드르 화가였던 오늘의 화가, 얀 브뤠헬은 꽃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린 최초의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최초의 꽃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는 위 그림은 얀 브뤠헬 평생의 후원자이자, 밀라노의 대주교인 추기경 보로메오의 소장품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브뤠헬은 추기경에게 "봄에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가을에 완성하였다"는 말과 함께, 이 그림을 전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그 어떤 꽃다발 그림을 그린 화가도 이처럼 많은 진귀한 꽃을 이처럼 풍성하게 세부묘사로 그린 적이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이 꽃들은 겨울에도 변함없이 아름다울 것입니다."

   이 얀 브뤠헬의 말처럼, 이 그림을 잘 보관만 한다면, 한 겨울 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사시사철, 일년 열 두 달, 어느 때라고 할지라도, 곁에 두고두고 감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특징이 바로 정물화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더구나 어느 계절의 한 때에 피어난 꽃들만을 꽂아 놓고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봄부터 시작하여 여름과 가을에 피어나는 꽃들까지 각종 다양한 꽃들을 조합하여 완성한 작품입니다. 각 계절의 꽃들을 기다리고 기다려서 완성해낸 얀 브뤠헬의 인내와 열정에 감탄이 절로 납니다.


     ▲ 토기 화병 속의 꽃다발(Bouquet In A Clay Vase), Oil on wood, 1599-1607,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Austria ⓒ 2008 Brurghel


      진정한 정물화의 위상, 그로 인한 당당한 꽃다발

   17세기에 등장했던 정물화는 이후에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회화의 한 유형이 되었습니다. 특히 17세기 중반이 되면서 정물화는 전통적인 미술 후원자들이었던 왕이나 제후는 물론 새로운 미술 시장을 싹 틔운 신흥 중간계급 모두에게 점차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네덜란드에서 뚜렷이 나타났으며, 네덜란드에서는 화상이나 경매장 등 근대적인 미술시장이 형성되면서, 정물화가 점점 더 많이 제작되고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많은 이론가들이 이러한 정물화를 '단순한' 현실의 모사에 불과하며, 상상력이나 지적인 능력과는 무관한 손재주만을 요구한다고 보아 폄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정물화의 목적과 위상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극적으로 변화하였습니다. 19세기에는 미술 아카데미의 위력이 쇠퇴하면서, 정물화는 그야말로 독립적인 미술 시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동시에 많은 화가들이 이 아카데미의 가르침에 도전하였습니다.

    점차 정물화를 포함한 회화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장대한 주제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는, 개인적인 표현과 장초력의 영역으로 여겨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정물화는, 현실 세계를 기록하기 위하여 새로운 방법을 찾던 화가들에게 큰 호감을 샀습니다. 17세기 관람자들을 감탄시키기 위해서, 화가들은 다양한 형태와 질감의 물건을 재현하기 위해 세련된 회화 기법을 능숙하게 구사해야만 하였던 것입니다.


     ▲ 꽃병 속의 꽃(Flowers In A Vase), Oil on panel, Koninklijk Museum voor Schone Kunsten, Antwerp, Belgium ⓒ 2008 Brurghel



     일년을 기다려 완성했던 인내와 열정의 꽃 그림
 
   예를 들어 반짝이는 은식기나 투명한 유리잔, 촉촉한 레몬과 같은 시각적인 효과를 묘사하기 위하여 각각 화가들 각자의 독특한 회화적 기법을 구사해야만 하였습니다. 이처럼 실제 세계에 뿌리를 둔 정물화는 훗날의 세잔(Paul Cezann, 프랑스, 1839-1906)이나 입체주의 화가들에게 회화적 실험을 전개하기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오늘의 그림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브뤠헬도 위 수많은 종류의 크고 작은 꽃들이나 토기 화병, 큰 나무통, 유리잔, 동전, 고둥, 조개, 벌레, 보석 등 작고 색다른 사물들을 첨가하였습니다. 이런 사물들을 비롯하여 꽃잎의 질감과 같은 정밀한 묘사를 위한 다양한 기법들을 시도하고 연구하였는데, 그런 노력으로 벨벳 브뤠헬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합니다.  

   이처럼, 그의 명성은 무엇보다도 화려한 꽃다발을 조화롭게 배열하고 그려내는 능력에서 출발합니다.위에도 소개했던 것처럼, 브뤼셀에서 만난 자신의 후원자인 보로메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뢰헬은 수십 개의 다른 꽃들로 하나의 꽃다발을 구성하는 것은 무척 힘든 작업임을 고백합니다. 그의 모든 작품들은 특히 생화를 직접 보고 그린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품종의 꽃들이 피어날 때까지 몇 달씩 기다려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네덜란드를 지배하던 대공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브뢰헬은 왕실 소유의 온실에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위 꽃그림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그 곳에서 유럽 최초의 튜울립을 비롯하여 진귀한 식물들과 꽃들을 현장에서 보고 그대로 실감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기다림과 인고의 열정 덕분에 오늘날 이렇게 편하게 꽃다발 그림을 감상할 수 있어 마음 풍요로워지는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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