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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그림들/한국의화가 작품

[스크랩] 윤중식 화백 작품 모음

----------82년 이후의 개인전 침묵

올해로 80세를 맞이하는 화가 윤중식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 홍익대 교수를 역임한 화단의 원로화가다. 그는 6.
25 직후인 1954년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한 이래 1982년까지 평균 2년을 주기로 꾸준한 작품 발표기회를 가지는 등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개성적인 조형세계를 천착시켜온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에다 근자에 화단의 그림 값을 거론할 때면, 현역화가들 중에서 언제나 고가 순서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위 인기화가로 꼽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윤중식이 이렇듯 화단과 미술시장에서까지 예술적 성가와 명성을 성취하고 있는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비평이나 저널리즘의 조명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빈약하다는 점이다. 본격적인 작가론은 고사하고 개인전람회에 곁들여 실리는 주례비평도 한두 건에 불과하다. 중견작가 수준이면 두툼한 개인 화집을 한 권쯤은 보유하고 있는 것이 요즈음 적극적인 자기 P. R시대의 세태이지만, 윤중식은 이런 면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다. 작가론과 화집이 없는 80대 인기 원로화가. 기자가 윤중식을 바라보면서 강하게 느끼는 첫 번째 의문이다.

윤중식은 지난 1982년에 현대화랑에서 가진 개인전 이후에 10여 년 동안, 간간히 화랑의 기획전에 몇 점의 작품을 출품하는 것 이외에는 작품발표를 많이 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미술계에 몸을 담았던 기자도 사실 그의 실제 작품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오히려 윤중식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풍문과 나의 작은 경험은 그가 매우 까다로운(?) 기질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일상적인 인간적 교류는 물론이고 기자나 화상까지도 야멸 차게 문전박대 해버린다는, 쉽게 말하자면 아주 비사교적인 화가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윤중식의 인간적 기질에 대한 선입견과 인상(어쩌면 막연한) 때문에 기자는 최근 10여 년 동안 윤중식의 침묵의 기간이 70대 노년기의 애처로운 창작열기의 쇠퇴현상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쌓아온 작품세계를 더욱 천착시켜 가는 고뇌의 시간일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보기도 했다. 은둔과 침묵의 삶 속에서 일구어낸 빛나는 예술세계. 이를테면 고갱의 현실 도피, 고흐의 자아로의 침잠, 세잔느의 편집광적인 고집을 함께 떠올리면서 말이다.


노화가들을 만날 때마다 경험한 일이지만, 그들은 화가의 꿈을 끼우던 어린시절이나 미술수업기 등 젊은 시절의 얘기를 나누길 즐겨 한다. 고향이나 과거의 추억을 더듬고 싶어하는 일이야 인지상정이고, 더구나 인생의 황혼기에는 어쩌면 더욱더 이런 일이 피부와 가슴으로와 닿는 일이리라. 특히 일제와 해방 그리고 6
25라는 역사적 질곡의 격동기를 지내온 화가들의 경우 예술과 삶의 음지와 양지를 간직하고 있다.

기자는 이러한 역경을 파헤쳐 온 그들의 삶과 화단사를 미술사적 증언으로 또는 이면사로 귀중하게 귀담아 들어두는 편이다. 그러나 과거의 회고 시스템으로 유도하고 그들의 촉수를 건드려서 알맹이 있는 자료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한 화가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미술사적인 예비지식이 필요하다. 이번에 윤중식을 만나면서 기자가 준비한 카드는 그의 고향인 평양의 근대 화단, 제국미술학교와 동경유학생, 그리고 해방 직후 북한 미술계의 실상을 파헤치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특히 기자는 윤중식이 6
25 때 고향과 가족을 잃고 월남한 실향민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다. 그의 생애를 뿌리부터 여지없이 흔들어 놓았을 전쟁, 실향과 이산의 아픔, 그 처절한 고통의 개인사는 그의 작품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가.

----------평양시절과 동경 유학, 그리고 전쟁의 아픔 삶

윤중식은 1913년 평양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사군자를 다룰 정도의 문기(文氣)도 갖추어 이곳 출신의 저명한 양화가 김관호와도 교분이 있었다. 윤중식의 형제들도 당시로서는 드물게 피아노, 작곡을 지망했을 정도로 예술적 분위기가 있는 집안이었다. 윤중식은 원래 음악을 전공하려고 했다고 한다. 실내악을 좋아해서 지휘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또 연극 연출에도 매료되었고, 수영
아코디언기타 솜씨도 뛰어났다. 일찍부터 다재다능하고 정서적이며 감수성이 예민했던 성장 과정의 일면을 엿보게 된다. 윤중식이 화가가 되기로 진로를 바꾼 것은 평양의 예술적 풍토의 영향이라는 것이 작가의 고백이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거 유명한 김관호 선생이 살았는데, 가끔 아버님과 같이 술을 마시러 오셨지요. 그림 그리고 있는 내 화실을 지켜보시면서 아무런 말씀도 없이 쳐다보고만 계셨지요. 물론 그때만 해도 김관호 선생은 화필을 놓고 있었지만, 그분의 명성과 영향으로 평양에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양화가 지망생들이 많았지요. 그때 마을이나 대동강변에 나가면 선배화가들이 이젤을 펼쳐놓고 그림을 모습을 어렵잖게 목격할 수 있었어요. 권명덕 최연해 계명칠 전봉제(전화황으로 개명) 등 형님뻘 되는 선배들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해빠지는 줄도 모르고 지켜보곤 했어요. 전봉제 씨의 수채화와 한 선배의 영화간판을 그리는 솜씨에 넋을 잃고..."

윤중식의 회고에 곁들여 이 시기 전후의 평양 화단, 특히 양화계의 사정을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1915년 고희동에 이어 한국 서양화가 제2호인 김관호는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뒤이어 졸업작품 〈해질녘〉이 일본 문전의 특선에 올라 국내 매스컴의 대대적인 각광을 받았다. 김관호는 미술학교 졸업 후 금의환향 평양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 후 그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붓을 꺾고 말았지만 1925년 평양에 개설된 삭성회회화연구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등 후진양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삭성회는 전국적 규모의 전람회를 개최하는 등 뚜렷한 활동을 펼쳤으며, 미술학교 승격의 의욕을 보이다가 1920년대 말에 흐지부지 사라졌다. 이 삭성회 출신들이 윤중식이 언급한 그의 선배화가들과 박영선 최연해 현이호 등이었다. (기자는 근대미술사와 관련된 윤중식의 증언의 가치를 좀더 언급하고 강조하고 싶지만, 지면의 한계나 이 글의 목적을 감안해서 다음 기회로 미룬다.)

윤중식이 화단에 데뷔한 것은 박고석 김원 김학수 최영화가 동문으로 있던 숭실중학 재학 때이다. 1931년 윤중식은 김주경 오지호가 주도하고 조선일보사가 후원했던 녹향회 공모전에 〈봄의 강변〉 〈정물〉 〈풍경〉이, 10회 선전에는 〈B양의 초상〉 〈논촌풍경〉이 입선되었다. 11, 12회 선전 입선작으로 흑백 도판으로 남아 있는 〈이른봄의 풍경〉과 〈대동강변〉을 보면 당시의 그의 작품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대동강변의 마을과 사람들, 농촌 정경이 등장하는 평범한 풍경화인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음영이 짙게 드리워진 강렬한 명암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때는 경치 좋은 대동강변에서 사생하는 일이 많았지요. 자연을 보면서 감격하는 일이 많았어요. 특히 해가 넘어갈 때의 석양과 황혼에 대한 감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평양에서 10여 리 떨어진 감흥리에도 자주 갔죠. 낮갈이, 옥수수더미가 깔린 전원의 따스한 햇빛을 쬐며 않아 있으면 졸음이 와 눈을 감게 되는데 이름 모를 곤충들이 날아드는 소리, 땅에는 벌레 기어다니는 소리 찌릇찌릇…. 젊었을 때는 코로의 자연주의에 경도되었지요."

윤중식이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한 것은 1936년이다. 그의 선배 김원의 권유로 사진 전공을 원했던 부모의 반대를 뿌리치고 유학을 단행한 것이다. 입학 동기는 김학수 김두한이었고, 1년 선배로 김만형, 2년 선배로는 김원 이쾌대 황헌영 김학준 구종서, 후배로는 황염수 김창억 권옥연 이수억 주경 김종하 윤자선이 있었다.

윤중식은 동창생들의 기질 등 유학시절의 회고하면서도 제국미술학교의 학풍을 강조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한국 양화의 도입기부터 유학의 주류를 이뤘던 일본의 관학 동경미술학교의 아카데미즘과는 다른, 사립학교로서의 자유로움이었다. 이것은 물론 1930년에 일본화단에 새로운 물결을 이뤘던 신감각의 미술조류, 이를테면 야수파, 표현파, 초현실주의와도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제국미술학교 동문들 중에는 관전인 문전보다도 이과전, 독립미술협회전 등 당시의 신흥 재야미술단체에서 활동한 작가들이 많다. 윤중식의 경우에도 봄의 아지랭이가 피어오르듯 아른한 분위기의 작품을 추구했던 양화가 우메하라 사무로(梅原龍三郞)가 주도했던 국화회에 수차 입선했다. (그러나 6.25전쟁 이전의 그의 초기 작품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미술학교를 졸업한 윤중식은 일본의 한 영화회사에 취직에서 무대 디자이더로 일하다가 해방 직전에 귀국해서 평북 선천 보성여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작품 활동으로는 1942 22회 선전에 〈석영〉의 입선과 1943년 이중섭 문학수 김병기 황염수 이호련 등과 평양에서 가진 6인전을 기억해냈다.

평양에서 해방을 맞은 윤중식은 이 격동의 시간과 공간을 회고하는 데는 약간의 고통이 시작되는 듯했다. 운명의 6
25라는 시간이 서서히 다가와서일까. 우리는 그가 강제 동원되어 선전 벽화를 그리던 일, 그 일을 피해서 숨어 다니던 얘기를 나누다가 이내 6.25로 얘기를 뛰어넘어 버렸다.

ꡒ14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올 때는 2, 3일이면 다시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지요. 자식이 12여여서 하나는 업고 하나는 손을 잡고 내려오는데 피난인파에 정신 없이 밀려오다 보니까 짐을 실은 소달구지도 없어지고 아들 하나만 남아 있는 게 아닙니까? 평양을 떠난 후 고생고생해서 한 달만에 서울에 도착했는데, 가족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6살짜리 맏딸 혜경이 고것이 아주 예뻤는데, 발톱까지 다 빠져가며 서울의 고아원이라는 고아원을 다 뒤져봐도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몇 십년 동안 밤이면 꿈에서 혜경이가 나타나 놀라서 깨어나고... 눈물을 흘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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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축적인 구성과 강렬한 색채

윤중식은 전쟁에 시달려 우왕좌왕하는 고달픈 피난생활을 거쳐, 환도 직후, 그러나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1954년에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시기의 작품 중에서 윤중식 특유의 조형 문법을 예고하는 〈귀로〉(1954)를 눈여겨볼 수 있다. 담벽을 배경으로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 담벽과 언덕배기의 집들, 그리고 산과 하늘을 겹겹이 쌓아올린 구축적인 화면 구성이다. 화면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전신주의 파격적인 대담한 배치가 불행한 시대상과 고달픈 사람들의 심경을 극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윤중식의 작품, 특히 자연을 그린 풍경화는 앞의 그림과 같은 구성 방식을 기조로 하여 1960년대에 이미 양식화의 과정을 밝고 있다. 그의 조형의 요체는 안정감 있는 수평운동을 주축으로 한 면 분할이다. 전경에는 대지와 나무, 그 뒤에는 논과 밭 혹은 강, 마을, 산과 하늘을 배치하는 방식이다. 때로 이런 풍경 인자들의 순서가 뒤바뀐다 해도 앞의 전체적인 구성의 틀은 늘 언제나 작품의 배면에 일관되게 깔려 있다. 그의 작품이 일반적인 풍경화의 화면 형태인 가로로 누인 것 못지 않게 세로로 세운 그림이 많은 것도 이런 구성의 요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조형어휘 중에서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면 분할과 형태를 골격 지우는 굵고 대담한 흑선(黑線)이다. 이 흑선은 그의 색채언어의 중요한 요소이다. 이경성은 일반적으로 형태화가와 색채화가로 나눌 때 윤중식을 색채화가의 범주에 넣었다. 그러나 사실 윤중식은 화려한 색채를 많이 사용하는 화가는 아니다.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단색조의 그림이 많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을 보석과 같이 빛나는 화려한 광채 같은 것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윤중식 특유의 색채 배열, 즉 먹선과 황색 혹은 적색의 결정적인 대비로 그 사이에서 강렬한 색가가 발산되기 때문이다.

윤중식의 풍경화가 색채를 발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느껴온 자연에 대한 감동에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앞서 황혼에 대한 감격을 고백했듯이 일출과 일몰을 그린 그림들이 많다. 새벽 동이 트는 혹은 땅거미가 서서히 내려않는 대지 위에 강렬한 태양 빛을 반사시키고 있는 것이다.

윤중식의 그림에 등장하는 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체로 우리나라 구상 계열의 노화가들의 그림에 등장하는 도상은 그것이 곧 내용이나 주제와 밀접하게 연루되어 있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게 된다. 태양, , , 돛단배, 시골마을, 비둘기 등 새, , 기타, 무엇을 머리에 이고 있는 이고 있는 여인 등 몇 가지 소재로 제한되어 있다. 물론 이것들은 재현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다. 화가 마음 속에 내재하고 있는 관념의 대상물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거기에는 이 화가의 그리움과 추억과 꿈과 한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평양의 대동강에 아름답게 펼쳐져 있던 바로 그 수려한 풍정이며, 두고 온 고향집의 비둘기이자 어린시절부터 다루던 악기가 아닌가.

결국 나는 이즈음에서 윤중식의 작품을 용감하게(?) 도식화시켜 해석해본다. 그는 기질적으로 매우 감성적이다. 대상에 대해 쉽게 감흥을 받는 화가이다. 그는 작품을 제작하는 순순 순간에도 색채와 형태에 희열을 느끼고 있으며, 또 화가의 생명이란 그렇게 느낄 줄 아는 것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그림은 따뜻하고 건강하고 생명감이 넘친다. 색채 면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의 작품의 형태나 도상의 내용에서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개인사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것은 고향과 가족을 갈라놓은 전쟁의 산물에 다름 아니다.

----------야수파적 표현주의

윤중식이 마지막 개인전을 가졌던 1982년까지를 놓고 그의 작품이 한국미술사의 전개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살펴보는 일이 남아 있다. 윤중식은 1930대에 일본에 유학한 화가로 1950대와 60년대를 중견화가로 보냈다. 또 그는 원래 이북사람으로 6
25로 충격과 절망과 불안을 겪은 세대이다. 기자는 이런 작가적 편력에 미술사적인 조명을 가할 때면 정병관의 논문 〈한국 표현주의 회화〉를 떠올리게 된다.

보링거가 주장한 것처럼, 남부 유럽 라틴 민족이 고전주의의 특성을, 북부 유럽 게르만 민족은 표현주의의 특성을 보인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표현주의적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전형적인 화가로 정열적이며 불안한 그림을 남긴 이중섭 황유엽, 그외에 박성환 황유엽 박고석 등이 모두 이북 출신이다. 이들과 그 외에 6
25 때 월남한 많은 화가들의 그림은 오지호 김환기 이인성 등 남쪽 출신의 온화한 그림과는 판이하게 달리, 밀러가 표현주의의 특성이라 정의했던 강렬한 색채와 극심한 형태 변형을 보여주고 있다.

윤중식도 위에 지적한 한국 표현주의 화가의 요건에 걸맞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를 이 범주의 화가로 넣을 수 있을까. 기자는 그 해답을 정병관이 앞의 논문에서 명명했던 야수파적 표현주의에서 찾고 싶다. 윤중식과 같은 연배의 화가들이 일제시대에 일본 유학을 통해 수용한 표현주의 등 전위미술의 경향들은 독일이나 유럽의 그것이 아니었으며, 파리에 유학한 일본 화가들의 영향─상상표현으로서의 회화가 아니라 비장성이 강한 에꼴 드 파리 화가들의 감정 표현으로서의 회화─이 강했다. 그리고 우리의경우 6
25전쟁의 참혹한 시련으로 비참주의적 경향의 그림이 나왔다. 윤중식은 한때 마티스와 루오에 심취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아수파와 표현주의의 대가들이다. 적어도 윤중식의 작품은 그림의 내용을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형태를 중시하는 표현주의적 경향이 보이고 있으며, 색채의 자율성이라는 조형 문제를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야수주의 회화에 가깝다.

윤중식의 작품이 그의 오랜 화력에 비해 어딘가 단선적인(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면서 작품 발표를 자제했던 80년대 이후의 근작들과 마주한다. 우선 최근으로 올수록 그의 작품은 이전까지의 구축적인 화면 구성이 급급하게 와해되는 새로운 변모를 보여주고 있다. 풍경과 정물이 서로 공존하는가 하면, 종국에는 형상들이 해체되어 검은 흑선만이 부유하고 유동하는 화면으로 치닫고 있다. 화면을 이리저리 계산하고 조형화하기보다는 일회적인 표현이 두드러진 직관적인 세계다.

"나는 그저 나 위해서 즐겁게 그린다. 그것이 보는 사람에게 공감을 얻게 되고 이해가 되면 더욱 즐겁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것은 결국 에고이즘이다. 혼자서 하는 작업이고 혼자서 맛보는 면이 아주 강한 그런 본질적인 것을 예술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만큼 살았지만 늘 사람 만나는 일에 익숙해 있지 않다."
"먹고 살만하니까 그림을 팔 이유가 없어졌다. 그림을 판다는 일이 아직 나는 서먹서먹한 일이다. 개인전을 하면 그림만 없어지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화집도 만들고 회고전을 해야 할텐데..."

 
1981년/가을풍경
 
 

 

 
 
 
 
 
 

여름/1980년

 

 

해일

 


 

 

 

1970년작

 

 

 

 

 

비둘기가있는풍경/1970년작

 

 

 

 

1950년작소년과정물

 

 

 

 

1960년작/여름

 

 

 

 

노을

 

 

 

 

 

 

 

 

 

새와금붕어/1990년

 

 

 

 

 

 

 

 

 

 

자유그리고평화/1990년

 

 

 

 

가족/1990년

 

 

 

 

 

 

 

 

새장이있는정물

 

 

 

1950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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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중식이 우리 미술사에 지나는 중요한 의미라고 한다면 서양미술의 도입기에 해당되는 제1세대를 이은 2세대 작가라는 점이다.
그 세대 작가들의 전반적인 특징이긴 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회화적 수업을 받았으면서도 우리 민족의 서정과 향토에 적합한 화면을 창출하고자 노력하였고 나름대로의 독특한 업적을 이루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윤중식의 회화세계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화려함과 장려함이 깃들인 풍경화를 향토적인 서정이 충만한 화면을 구축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13년 평양에서 유복하고 예술적 분위기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1931년 숭실중학교 재학 때인 1931년 녹향회 공모전과 선전에 입선하여 화단에 진출했다.
1936년 일본 제국미술학교에 서양화를 전공, 동경 국화회에서 활약했으며, 귀국 후에는 평북 선천에서 미술교사로 일했다.
6·25때 고향과 가족을 잃고 월남한 실향민의 아픈 삶 속에서도 그는 1954년 환도 후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 후, 1982년까지 평균 2년을 주기로 꾸준한 작품 발표회를 갖는 등 왕성한 작품활동으로 개성적인 조형세계를 이룩해온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한국 현대미술전, 한국 현대미술 60년전, 한국 양화 70년전 등 국내·외의 주요 기획전에 초대 출품,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 홍익대 교수를 역임한 원로화가이다. 그의 그림은 행복하지 않는 실향민 화가가 그리는 행복의 초상화이며 풍경화라고 말할 수 있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는 태양, 섬, 강, 돛단배, 비둘기 등의 새, 시골마을, 꽃, 기타, 무엇을 머리에 이고 가는 여인 등이다.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는 관념의 대상이다.
거기에는 두고 온 고향과 어린 시절의 기억의 편린, 그 꿈과 한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출처 : Out of bounds,
글쓴이 : 푸른바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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