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그림들/외국의화가의 작품

[스크랩] 마티스

조용한ㅁ 2009. 12. 21. 10:24

Henri  Matis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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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 (프랑스 화가)  [Matisse, Henri-Emile-Benoit]
출처: 브리태니커
 
 
1869. 12. 31 프랑스 피카르디 르카토~1954. 11. 3 니스.프랑스의 화가.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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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프랑스 화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화가로 간주되기도 한다. 1900년경에 야수파 운동의 지도자였던 마티스는 평생 동안 색채의 표현력을 추구했다. 그의 소재는 주로 실내풍경이나 구상적 형태였으며, 그가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는 지중해 특유의 활기가 넘쳐 흐른다.
 
형성기
 
곡물 산업에 종사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마티스는 20세가 되기까지 예술에 거의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1882~87년에는 생캉탱의 중등학교에 다녔고 파리에서 1년 동안 법률을 공부한 뒤, 생캉탱으로 돌아와 법률사무소의 서기가 되었다. 그는 현지의 캉탱 라투르 학교에서 이른 아침에 여는 소묘 강습을 받기 시작했고, 1890년에는 심한 맹장염에 걸려 누워 있는 동안 채색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갖다준 유화물감 상자 속에 그려진 그림의 사진을 베꼈지만 얼마 후에는 르카토에 있는 할아버지의 집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1891년 그는 변호사가 되기를 포기하고, 화가가 되기 위해 다시 파리로 갔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말에 따르면 '압살롬 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센 강 왼쪽 연안에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전형적인 예술학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린시절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원칙에 따라, 일 속으로 곤두박질치듯 뛰어들었다. 그 원칙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서둘러라!'였다. 내 부모와 마찬가지로 나는 무언지 알 수 없는 힘에 떠밀려 서둘러 일을 시작했고, 오늘날 나는 나를 떠미는 그 힘이 정상적인 인간으로서의 내 생활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프랑스 북부 태생의 중산층에서 나온 이 19세기적 복음 인, 사람은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한다는 신조는 마티스의 인생 전체를 특징짓게 되었다. 금테 안경, 정성껏 다듬은 짧은 턱수염, 약간 살찐 체구, 보수적인 옷차림의 철저히 부르주아적인 그의 겉모습은 파리의 선도적인 전위 예술가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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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당장 전위 예술가가 되지는 않았다. 1891년에 공립 미술대학의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사립학교인 쥘리앵 아카데미에 등록했는데, 이 학교 교장은 전통을 엄격히 따르는 아돌프 기욤 부게로였다. 부게로는 당시 은근히 선정적인 모습의 벌거벗은 요정들을 즐겨 그리는 화가로서 명성이 절정에 올라 있었지만, 그후 이 명성은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마티스가 그런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는 것은 놀랍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는 생캉탱에서 암탉과 양계장을 그리는 화가의 추천을 받아 그 학교에 등록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마티스 자신도 아직 시골뜨기로서, 폴 세잔과 폴 고갱 및 빈센트 반 고흐의 후기 인상주의에 이미 친숙해져 있던 파리에서는 구식이 되어버린 취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의 초기 그림은 1850년대에 프랑스 사실주의자들이 즐겨 채택했던 17세기 네덜란드 양식을 보여준다. 1892년에 그는 쥘리앵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장식미술학교 야간부에 등록하는 한편, 이 학교 교수이자 상징파 화가인 귀스타브 모로의 문하생이 되었다. 입학시험은 면제받았다. 너그러운 스승인 모로는 자신의 화풍을 제자들에게 강요하기는 커녕, 오히려 개성을 계발하거나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문화재를 보고 배우도록 격려했다. 마티스는 중간에 몇 차례 중단했던 적이 있었지만, 1899년까지 모로의 화실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모로가 죽은 뒤 교수가 된 페르낭 코르몽은 너그럽지 못한 화가였으며, 마티스는 결국 1899년에 이 화실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후 마티스는 초상화가인 외젠 카리에르가 이따금 강의했던 사립학교에 한동안 자주 드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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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에 마티스는 보수적 취향의 국립미술협회가 주최하는 살롱에 그림 4점을 출품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이 협회의 준회원으로 선출되었고, 정부는 그의 작품인 〈책을 읽는 여인 Woman Reading〉(1894)을 사들였다. 이때부터 그는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점점 더 자신만만하고 대담해졌다. 그후 2년 동안 그는 브르타뉴로 취재 여행을 떠났고, 노련한 인상파 화가인 카미유 피사로를 만났으며, 얼마 전에 보수주의자들이 격렬하게 항의하는 가운데 프랑스 국가에 기증된 귀스타브 카유보트 소장품에서 인상파 미술의 걸작들을 발견했다. 그의 색채는 한동안 더욱 밝아지고 강렬해졌다. 1897년에 그는 표현방식면에서의 해방을 향한 중요한 첫걸음을 떼어놓았고, 〈저녁 식탁 The Dinner Table〉(또는 〈La Desserte〉)으로 살롱전에서 가벼운 물의를 일으켰다. 짙은 빨간색과 초록색을 사용한 이 작품에서 그는 르누아르풍의 광채와 엄격한 고전주의적 구도를 결합시켰다. 1898년에 툴루즈 출신의 아가씨 아멜리 파레르와 결혼한 마티스는 1년 동안 파리를 떠나 런던에서 J. M. W. 터너의 그림을 연구한 뒤, 코르시카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지중해의 햇빛과 색깔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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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기
 
조르주 쇠라가 죽은 뒤 신인상파 또는 점묘파의 이론가이며 설득력이 강한 폴 시냐크는 1898년에 문학 평론지인 〈르뷔 블랑슈 La Revue Blanche〉에 외젠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파까지를 발표했다. 1899년에 파리로 돌아온 마티스는 이 논문을 읽고 당장 기법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화폭에 색점들을 늘어놓으면 눈의 망막 위에서 여러 가지 색깔이 뒤섞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묘파의 생각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유명한 모더니스트 미술상인 앙브루아즈 볼라르한테서 폴 세잔이 그린 〈목욕하는 세 여인 The Three Bathers〉과 폴 고갱이 그린 〈소년의 얼굴〉,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의 소묘 1점을 사서, 이 새로운 기법을 더욱 깊이 연구했다. 그는 파리의 뤽상부르 공원이나 파리 교외의 아르퀴유로 나가거나 센 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창문을 열어놓고 야외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야외로 나갈 때는 역시 순수한 색채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친구 알베르 마르크도 마티스와 동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인상주의). 마티스는 볼라르한테서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인 앙리 로슈포르 흉상의 석고 모형도 사들였고, 1899년에는 미술대학 야간부 조각반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평생 동안 약 60점의 조각을 제작했는데, 초기 작품들은 로댕의 영향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동물 조각가로 인정받고 있는 앙투안 루이 바리의 영향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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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부터 마티스는 살롱전에 출품하는 것을 그만두었지만, 현대 미술을 창조하고 토론하는 파리 화단에서 점점 낯익은 인물이 되었다. 1901년에 그는 절충주의적 성격의 앵데팡당전(Salon des Indépendants)에 처음으로 출품했는데, 이 전시회는 심사위원이 없는 공모전으로 보수적인 공식 미술전에서 환영받기 어려운 화가들을 위해 1884년에 창설된 것이었다. 1902년에 그는 베르트 베유라는 작은 화랑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이듬해에는 모로의 화실 및 카리에르 학원에 함께 다녔던 많은 동창들과 함께 새로 창설된 살롱 도톤전(Salon d'Automne)에 참여했다. 비교적 자유주의적이었던 살롱 도톤에서도 이들의 그림은 진보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인정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는 경제적 위기에 빠질 때가 많았다. 그래서 1900년에는 새로운 만국 박람회의 전시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샹젤리제 구역에 건설중이던 그랑팔레를 장식하는 일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내는 조금이라도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옷가게를 차렸다. 1901년에 마티스는 기관지염에 걸려 오랫동안 휴식을 취해야 했으며 1902년에는 세 아이(마르게리트, 장, 피에르)와 아내를 데리고 한동안 보앵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34세가 지난 1904년 6월에야 볼라르의 화랑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열었지만, 이 개인전은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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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05년 여름을 스페인 국경과 가까운 지중해 연안의 작은 어촌 콜리우르에서 앙드레 드랭과 함께 지냈다. 눈부신 햇빛 속에서 그는 스스로 점묘화법의 '폭정'이라고 부른 강박관념에서 급속히 해방될 수 있었다. 망막에서 뒤섞이게 하기 위해 작은 색면을 병치시킨 점묘파적 기법은 꿈틀거리고 활달한 자연스러운 붓놀림으로 전환했고, 사실주의적인 색채는 빨강과, 초록, 주황과 파랑, 노랑과 보라의 강렬한 보색대비로 바뀌었다. 새로 얻은 이 자유분방함이 작품으로 나타난 것은 콜리우르에서 완성한 〈열린 창 Open Window〉과 9월에 파리로 돌아와서 그린 아내의 초상화 〈모자를 쓴 여인 Woman with the Hat〉이었다. 이 2점의 작품은 그해 가을에 열린 살롱 도톤전에서 역시 강렬한 색채를 실험하고 있던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되었는데, 비평가 루이 보셀은 이들을 '야수들'(les fauves)이라고 불렀고, 그리하여 20세기 미술에서 최초의 중요한 '이즘'인 포비슴, 즉 야수파가 탄생했다. 그리고 마티스는 이 집단의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이 무렵부터 그의 경제사정도 호전되었다. 파리에 살고 있던 미국인인 스타인 가족(여류 소설가 거트루드, 그의 형제들인 레오와 마이클, 그리고 마이클의 아내 세라)이 마티스 작품의 수집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1906년에 마티스는 앵데팡당전과 살롱 도톤전에 다시 출품했을 뿐 아니라, 파리의 드뤼에 화랑에서 따로 개인전을 열었다. 1907년에는 세라 스타인과 한스 푸르만을 비롯한 후원자들이 그를 위해 레프트뱅크 미술학원을 만들었고, 그는 1911년까지 이곳에서 이따금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8년에 그는 미국의 뉴욕 시와 소련의 모스크바 및 독일의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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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파는 조직적인 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었고, 야수파에 속했던 화가들은 곧 각자의 기질에 따라 표현주의나 입체파, 또는 일종의 신전통주의 쪽으로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마티스는 이런 경향들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수'란 말이 단순히 순수한 색채를 좋아하는 화가를 뜻하는 용어라면 그는 평생 동안 야수파로 남아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칠 만큼 합리적인 견해를 갖고 있어서, 자칫하면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는 화풍에 어느 정도의 질서를 부여하고 싶어했다. 그는 야수파가 등장한 190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린 일련의 주요작품에서 계속 색채의 균형과 선의 단순화를 추구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삶의 기쁨 Joy of Life〉(1906)·〈디저트, 붉은 하모니 The Dessert, a Harmony in Red〉(1908)·〈붉은 화실 The Red Studio〉(1911)·〈금붕어 Goldfish〉(1915)·〈피아노 교습 Piano Lesson〉(1916)·〈몽탈방, 커다란 풍경 Montalban, Large Landscape〉(1918) 등을 그렸다. 그밖에도 예를 들자면 한이 없지만, 이런 작품들에서는 마티스의 성숙한 화풍이 갖고 있는 중요한 특징들이 거듭 나타난다. 형태는 흐르고 미끈하고 굵은 윤곽선으로 둘러싸여 있고, 세부적인 묘사가 거의 없이 단순하게 처리되었다. 색채는 넓은 영역에 걸쳐, 얇고 평면적이지만 밝게 칠해져 있으며 그림자는 사실상 완전히 제거되었다. 그리고 묘사된 공간은 극단적으로 평면화되어 원근법의 규칙이나 입체감을 내기 위한 관습적 생략기법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단순한 장식미술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강렬하고 자유분방하지만, 그림 전체의 효과는 이슬람의 양탄자나 직물 및 도자기의 무늬를 연상시킬 수도 있다. 그의 소재 선택과 그 처리 방법에서 낙천주의와 쾌락주의를 엿볼 수 있으며, 이들 소재는 지성과 관능을 동시에 암시해준다. 옷을 입은 여인뿐만 아니라 많은 습작물들이 있지만 판에 박힌 관습적 정취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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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다쥐르 시절
 
1912년에 마티스는 뉴욕 시에서 조각 전시회를 열었고, 쾰른과 런던에서 그림 전시회를 가졌다. 1913년에는 뉴욕 아모리 전시회에 13점의 그림을 출품해 많은 논란과 비난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전시회가 시카고에서 열렸을 때는 〈푸른 누드 Blue Nude〉라는 그의 그림의 복사본이 화형에 처해지는 일이 벌어져 떠들썩한 선전효과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중년의 나이, 점점 유복해지는 경제사정, 이미 얻은 국제적 명성,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공개적인 소동에 대한 혐오 등으로 인해 그는 전위파의 중심에서 차츰 멀어졌다. 그는 프랑스 코트다쥐르에서 겨울을 나기 시작했고, 1920년대초에는 니스나그 주변 지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의 그림은 그 착상에 있어서 대담함이 사라졌고 절제적이었던 표현수단도 복잡해졌다. 그당시 대부분의 화가나 작곡가들(특히 파블로 피카소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과 마찬가지로 마티스도 일종의 현대화한 고전주의라고 할 수 있는 고전적 형식에 안주했고, 전위적 예술의 충격에 다소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예술 대중을 즐겁게 해주려고 애쓰게 되었다. 그러나 니스 시절의 전형적인 작품들 중 〈목련꽃을 든 오달리스크 Odalisque with Magnolias〉·〈장식적 무늬가 있는 인물화 Decorative Figure on an Ornamental Background〉 등은 인기를 누리고도 남을 만한 걸작들이다.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부지런했다. 1920년에 그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제작한 〈나이팅게일의 노래 Le Chant du Rossignol〉에서 무대 배경과 의상을 맡았다. 그는 또한 여러 해 동안 소홀히 했던 조각으로 돌아가, 1930년에 연작의 4번째 작품이자 가장 추상적 형태인 〈뒷모습 The Back〉을 완성했다. 여성 나체 부조인 〈뒷모습〉은 그가 1909년부터 이따금 다루어온 주제였다. 그는 항상 여행으로 긴장을 풀었다. 1921년에는 노르망디 해안의 에트레타, 1925년에는 이탈리아, 1930년에는 뉴욕 시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타히티로 갔다. 1933년에 그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파도바를 방문했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메리언에서는 대규모 벽화 연작의 마지막 작품인 〈춤 Ⅱ The Dance Ⅱ〉(반스 재단 소장)를 완성하여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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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는 파리에 간 초기부터 에칭과 드라이포인트, 석판화 등의 판화기법에 흥미를 갖고 있었으며, 종종 많은 판화작품을 제작했다. 1932년에 그는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집 Poésies〉 삽화로 29점의 에칭을 발표했는데, 그의 독특한 재능인 부드러운 윤곽과 경제적 선묘법은 말라르메의 시에 담겨 있는 '순수성'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그는 그래픽 아티스트로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게 되었는데, 특히 앙리 드 몽테를랑의 〈파시파에 Pasiphaé〉(1944), 피에르 르베르디의 〈얼굴들 Visages〉(1946)·〈포르투갈 편지 Lettres Portugaises〉(1946),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 Fleurs du Mal〉(1947), 피에르 드 롱사르의 〈사랑의 사화집 Floriège des Amours〉(1948), 그리고 샤를 도를레앙의 〈시집 Poèmes〉(1950)에 그린 삽화는 유명하다. 위의 책들은 주로 흑백 삽화로 제작되었으나, 예술과 인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 〈재즈 Jazz〉(1947)를 출판하면서 화려한 색채 삽화를 곁들였는데, 여기서 이용한 기법을 그는 '가위로 그린 소묘'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림에 들어갈 소재들을 색종이(원하는 색을 얻기 위해 불투명 수채물감으로 직접 칠한 종이)에서 잘라낸 다음 풀로 붙인 것이다.

 
마티스는 말년에 아내와 헤어지고 성장한 자녀들은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고독한 생활을 보냈다. 장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받은 1941년부터 그는 거의 모든 시간을 침대에 누워서 보냈다. 1950년부터는 천식과 심장병에 시달렸다. 그는 1930년대초에 그의 모델이었던 러시아 여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니스가 내려다보이는 시미에의 레지나 호텔에 있는 널찍한 화실에서 살았다. 그는 화실에 놓인 침대에 누운 채 기다란 장대 끝에 매달은 크레용의 도움으로 벽화 크기의 대형 그림을 그려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작품들에서 창조력이 약해진 조짐이나 슬픔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 작품들은 그가 평생 동안 그린 그림들 가운데 가장 대담하고 완숙하며 평화롭고 낙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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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는 코트다쥐르 언덕이 있는 방스에 1943년부터 별장을 갖고 있었는데, 1941년 중병에 걸렸을 때 그 지방의 도미니쿠스회 수녀들 가운데 하나가 그를 간호해준 데 대한 보답으로 그 별장터에 도미니쿠스회 수녀들을 위한 로제르 예배당을 짓기로 결심하고, 1948년에 설계를 시작해 3년 만인 1951년에 완공했다. 그는 우선 스테인드 글라스의 일부를 손수 도안했고, 그 다음에는 벽화를 그렸으며, 성직자의 의복과 예배용 물품을 비롯해 교회 안팎의 거의 모든 것을 도안하는 것으로 일을 매듭지었다. 예배당이 완공되기 전에 그는 색종이를 오려 만든 거대한 작품(그가 〈재즈〉의 삽화에서 했던 작업을 확대한 것)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그를 1950년대 초의 '가장 젊은' 화가이자, 가장 혁신적인 예술가로 만들어주었다.

 
R.D. McMullen 글

 

 





작가소개 : 마티스는 오랜 예술 활동을 통해 신고전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등 반드시 그 순서대로는 아니더라도 19세기의 갖가지 미술 운동에서 영향을
섭취하여 자기 예술을 살찌우고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 전체적으로 보아 마티스의
양식은 이러한 전통을 무시하고는 생각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는 20세기의 가장 창의적인 거장의 한 사람으로 변신했고, 오늘날 젊은 화가들에게
끊임없이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20세기 전반의 몇 안되는 화가이기도 하다
마티스의 예술은 분명히 파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나, 그의 후기 작품들은
이러한 지역적인 양식을 철저히 뛰어넘고 있었다.
뒷날 이들 작품은 20세기의 국제 미술 문화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파리의
다른 몇몇 거장들에 못지 않은 지위를 굳혔다.
미술사에 있어서 마티스의 명목상의 지위는 야수파의 선도자였다. 이는 피카소가
그리고 어느 모로는 브라크가 입체파의 선도자로 간주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야수파는 연약하고도 단명한 운동이었고, 화파를 형성한 후에도 공식화된 강령을
갖춘 적이 없었다. 

 

 

 

                   

  (Self Portrait, 1869 ~1954) 

 

그의 인생

 

1869 12월 마지막 날 프랑스 북부지방에서 태어난 마티스는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을 떠났다가 처음으로 미술을 접하게 되고 이후로 자신의 진로를 완전히 바꾸어 전문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1891년 아카데미 줄리앙에서 미술을 공부하면서 윌리암 아돌프와 구스타프 줄리앙의 제자가 됐으며 루브르 박물관에서 명화를 모작하며 실력을 쌓아갔다. 이후 세잔과 고갱, 고호의 후기인상파 작품에 영향을 받고 이 시기에 열풍처럼 인기를 모았던 일본 예술의 영향도 받게 된다.

1901년 전시회를 열기 시작, 1904년에는 처음으로 개인전시회를 갖았다. 밝고 명확한 색상을 즐겼으며 1905년 이후에는 작품을 평면화시키는 한편, 선들을 자제하면서 중점오브젝트는 자세하게 묘사하기 시작했고 드랭, 블래맹코와 함께 뜻을 모아 야수파(Fauvism)를 이끌어갔다. 1906년 이후 야수파 운동이 사그라들면서 잠시 피카소의 큐비즘에 매료되기도 했으나 그 어떤 유형도 마티스의 화풍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 야수파와는 다른 장식적이면서도 현란한 색채를 사용했다. 1906년부터 1917년까지 몽파르나스에서 활발한 화가로 활동했으며 점차 보색관계를 교묘히 살려 색면효과를 얻어내는 등, 1923년부터 1930년대 사이에 마티스 고유의 예술세계를 확고히 구축했다.

마티스는 나이가 어린 피카소와 동시대를 살면서 경쟁관계이자 친구사이로 지냈다. 이들은 서로 상대방 작품을 존중해주었으며 1945년에는 공동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대조분석되고 있는 마티스와 피카소는 여러 부분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는 반면,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마티스는 자연을 보고 그리지만 피카소는 상상에서 우러나온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두사람이 주로 다룬 주제는 여자와 정물화였으나 마티스는 모든 대상물을 완전하게 인테리어로 인식해서 그려내길 좋아했다. 말년이 되면서 각각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진로를 바꾸었는데, 마티스는 그가 사망할 때에 탄생하지도 않았던 전혀 새로운 화법을 추구했으며 피카소는 고전주의로 선회해 벨라퀘즈와 마네의 일부작품에 관심을 갖고 추구해나갔다.    

마티스는 지금의 니스지방 근처인 프렌치 리비에라에서 1917년부터 살기 시작해 그곳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마티스 작품은 피카소나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 또는 전통주의로 복귀한 드랭의 작품에 비교되기도 한다. 1930년 후에는 보다 새로운 담대한 단순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1941년 암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은 후 휠체어에 앉아 조수의 도움을 받고 콜라주 작품에 몰두하며 창작의 열을 불태웠다.

조각, 동판화, 장식미술 등 여러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마티스는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현실주의(Realism) , 인상주의(Impressionism), 후기 인상주의(Post- Impressionism ) 등의 19세기의 각종 운동을 거쳐가면서 나름대로의 독특한 스타일을 굳히게 됐다. 1910년 작품 제라니움 정물화(Still Life with Geranium)가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팔렸으며 현재 마티스 작품 가격은 170억원(17million)에 달하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 

 

 

                

                      The Green Stripe, Oil on canvas, 16 x 12¾, 1905

 

       마티스의 아내를 그린 작품으로 색상의 변화만으로 명암을 그려넣었으며 좌측은 따스한 색상과 우측의 차가운 색상이 묘한 조화를 갖고 인간의 양면성을 그려내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오른쪽 면에 대한 울림이 왼쪽 편으로 퍼져나가는 느낌도 든다. 그래서 언뜻 가면처럼 보였던 화폭이 점차 생동감있게 움직여 가슴으로 느껴지게 되는지 모른다. 화가의 아내조차 불쾌함을 드러냈던 이 작품은 비평가들로부터도 가운데 드러난 녹색선에 대해 부정적인 평을 들어야했다. 그러나 이 선이 있음으로 해서 막 쏟아질것만 같은 짙푸른검은색 머리를 받쳐주며 안정감을 살려내고 있는지 모른다.

 

The Goldfish

금붕어 The Goldfish

1912,  oil on canvas,

 Pushkin Museum of Art, Moscow

 

 

 

비밀스러운 장소에 감춰진 알려지지 않은 걸작이 과연 얼마나 될까? 1992년 5월 8일에 프랑스 정부는 앙리 마티스의 후손들이 발견한 놀라운 작품을 받아들였다. 앙리 마티스의 아들인 뉴욕의 화상 피에르 마티스가 기증한 것이다. 그는 한해 전인 1991년에 사망했다. 마티스가 말년을 보낸 니스 제지나의 아틀리에에서 보내온 여러 집기들과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잡동사니 물건들로 가득 찬 창고에서 마티스의 후손들은 캔버스화로 분류된 긴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 두루마리 가운데 하나가 때가 덕지덕지 묻은 누런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아마도 니스 저택의 창고 안에서 오랫동안 굴러다녔던 듯했다. 이것을 펼치자 <춤>을 위한 최초의 그림이 미완성인 채 나타났다. 이 <춤>은 1931년에서 1933년 사이에 펜실바니아 주 메리온에 있는 반스 재단의 벽을 장식하기 위해 마티스가 제작한 대작이다.


The Dance, 1932-33

춤을 추며 하늘을 날다

제단의 건물을 공공 건축물 전문가인 프랑스의 건축가 폴 크레에게 의뢰해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은 걸로 보아 아마 반스는 현대식 건물을 싫어했는가 보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르 코르뷔지에가 미국여행 도중 재단을 방문하려고 했을 때 거절당한 듯하다. 르 코르뷔지에가 보낸 방문요청 편지는 뜯어보지도 않은 채 '코르보 거장'이란 이름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반스의 건축 취향이 어찌되었든 그는 불가능해 보이는 작업을 마티스에게 맡겨 내부를 장식했다. 왜냐하면 이 작업은 세 개의 첨두형 궁륭 안에 있는 두 삼각 펜던티브로 따로 떨어진, 세 개의 천창이 난 벽면을 장식하는 까다로운 일이었다. 그림을 그려야 할 면적은 무려 52제곱미터에 달했으며, 더군다나 길쭉하게 늘어난 공간에 역광을 받는 곳이었다.

1931년 11월에 마티스는 처음으로 이곳을 둘러보고 반스에게 춤을 주제로 다뤄보겠다고 제안했다. 그가 볼 때 이 주제가 여기에 어울릴 것 같은데다 그에게는 친숙한 주제이기도 했다. 그는 이미 춤을 주제로 1909년에서 1910년 사이에 러시아의 수집가인 세르게이 이바노비츠 슈추킨을 위해 대형 작품 두 점을 그린 적이 있었다. 이 두 점 가운데 하나는 다른 한 작품을 위한 준비 작품이다(현재 뉴욕 현대미술관에 있는 <춤>은 1907년에 제작한 <삶의 기쁨>에서 화면 뒤쪽으로 보이는 원무를 다시 주제로 삼은 그림이다. <삶의 기쁨>에는 피리 연주자와 춤추는 사람들의 뒤얽힌 몸이 묘사되어 있다. 이 원무는 세상의 근원을 상기시키며, 이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풀이 무성한 언덕 위에서 펼쳐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가벼운 긴장감이 감돈다. 춤추는 사람들 가운데 두 명의 원이 끊어져 손을 뻗쳐서 원을 이으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The Dance, 1932-33

우연인 듯 치밀하게

1992년 미술푸 복원가들은 레지나에서 발견한 <미완의 춤>을 펼쳐서 곰팡이를 제거하고 깨끗이 닦아 다림질을 한 뒤에 캔버스에 무수하게 뚫린 작은 구멍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 구멍들은 벌레들이 솔았고 하기엔 매우 규칙적으로 뚫려 있었다. 사실은 마티스가 자른 종이를 캔버스 표면에 고정하려고 썼던 무수한 핀 자국이었다. <춤>제작을 위해 포즈를 취해주었던 두 모델 말에 따르면, 마티스는 우선 종이에 물감을 칠한 뒤에 잘라서 썼다고 한다.

종이에 칠하는 색깔 수는 제한되었다. 인물은 회색, 배경은 검은색, 그외에 파란색, 분홍색이었다. 그는 색칠한 종이들을 팔레트에 물감을 늘어놓듯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배열한 다음 가위로 자른다. 그리고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목탄으로 종이의 윤곽을 수정한다. 이렇게 하면 자른 종이까리의 상호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다시 자르기도 하고 자신의 의도에 맞춰 주성을 수정할 수 있었다. 그런 뒤에 종이를 떼어낸고 캔버스 위에 종이와 똑같은 색조를 병치시키면서 물감을 평평하게 펴발랐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림의 초벌칠은 페인트공이 담당하고, 마티스는 끝마루리할 때만 손을 댔다. 이것은 마티스의 이전 방식에 비해 대단한 혁신이다. 이렇게 해서 화가는 편안하게 중요한 변화를 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물감 칠하는 작업을 비인격화했다. 이 방식은 조토가 건축 장식을 제대로 하려면 "돌만큼 단단하고 무거운 어떤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확신했던 그 단계까지 이르게 했다.

마티스는 이 작품에서 초록색을 빼버렸는데, 창문 세 개를 통해 보이는 공원에 심어진 나무들이 초록색 구실을 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재단은 공원 안에 세워져 있으며 이 창문들은 패널 벽화 바로 아래에 있다. 아키스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서는 반스가 창문의 반투명 유리를 투명으로 바꾸어 주면 그런대로 어울릴 법했다. 하지만 반스는 거절했다. 또한 마티스는 창과 창 사이의 벽에 걸린 자신의 작품인 <모로코 사람들>과 피카소 의 다른 작품 한 점이 시선을 너무 끌어서 자리를 옮겨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완고하기 짝이 없는 이 양반은 재단의 작품은 자신이 세운 전시 원칙에는 해도 세 번 나눠서 지불하기로 약조된 3만 달러를 마티스가 마지막까지 받아내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The Dance. 1932-33.

파리의 프티팔레 미술관엣 매입했다는 이유로 <파리의 춤>으로 불리는 두 번째 작품은 결국 완성된다. 이때는 마티스가 반스 재단으로부터 벽의 측정이 잘못되었다는 소식을 통고받은 무렵이 아니었다. 이 작품은 가장 힘차면서도 가장 단순하다. 두 명씩 짝을 지은 무희 여섯 명이 공간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이들의 몸은 어느 누구도 온전히 묘사되어 있지 않다. 인물들의 몸은 엄청나게 확대되어 기념비철머 보일 정도로 거대하다. 팔과 다리에는 힘이 용솟음치고 몸은 불규칙한 대각선이 그어진 비구상의 검은색, 분홍색, 파란색의 배경 위에서 솟아오른다. 마티스는 세 작품 가운데 이 두번째 춤을 가장 '전투적인' 작품으로 여겼다. 사실 이 작품에서는 사랑의 투쟁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본능처럼 느껴진다. 세 감각홍예가 천창을 수직선으로 갈라놓는데도, 등이 보이는 중앙의 인물부터 시작해서 새 천창이 통일된 조화를 이룬다. 회화는 건축보다 훨씬 강하다. 이것은 화가가 3년간 반스 재단을 위한 힘든 작업을 마친 뒤에 얻게 된 결론이다. 예순을 갓 넘은 그의 나이 탓도 있겠지만, 이 작업을 끝내고 그는 거의 기진맥진할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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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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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틀담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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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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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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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 있는 누드

 

 

 

사용자 삽입 이미지

 

 Blue Nude

 

프랑스의 화가. 그가 주도한 야수파(포비슴)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며, 원색의 대담한 병렬(竝列)을 강조하여 강렬한 개성적 표현을 기도하였다. 보색관계를 교묘히 살린 청결한 색면효과 속에 색의 순도를 높여 확고한  마티스 예술을 구축함으로써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의 위대한 지침이 되었다

 

 

 


 

 

 

 

 

                          

 

Blue N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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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하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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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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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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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하모니

 

 


 


THE Egyptian
 

Lorette Reclining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푸른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의 모델은 다름아닌 마티스의 비서였던 리디아 델레츠토르스카야(Lydia Delectorskaya)입니다. (전 자주 그녀의 이름을 나디아로 착각합니다. 리디아...리디아...아무리 불러도 익숙해지지 않는 이름입니다.)

 

리디아는 1910년 러시아 의사의 외동딸로 태어났으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모를 잃고 러시아에서 떠나 프랑스 니스에서 빈털털이 상태로 망명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1932년 리디아는 임시직으로 마티스의 스튜디오 비서로 일하면서 마티스와 마티스 부인의 집안일도 맡아 하게 됩니다. 마티스의 비서로 일한지 3년째 되던 해인 1935년, 마티스는 리디아에게 모델을 서줄 것을 요청하고 리디아는 마티스의 요청에 응해 모델을 서게 됩니다. (리디아는 검은 머리에 짙은 눈동자를 가진 여느 프랑스 여성과는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티스의 눈에는 금발에 푸른색 눈동자, 백설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가 특별해 보였을 겁니다.)

그 때 리디아의 나이는 25세, 마티스는 65세였습니다. 마티스는 리디아에게 손도 대지 않고 옷을 벗으라는 요구도 하지 않았으며 부드럽고 정중한 태도로 대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리디아는 마티스에게 길들여지게 되고 마티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35년 6개월동안 리디아는 마티스를 위해 모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마티스 부부에게 위기를 가져오고 마티스의 아내 아멜리에(Amélie)는 마티스에게 최후통첩을 합니다. 고민하던 마티스는 아멜리에를 선택하고 리디아를 해고합니다. 하지만 성난 아내의 분노는 사그러들지 않았고 1939년 초, 아멜리아는 남편 곁을 떠나고 맙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리디아는 마티스를 돕기 위해 파리에 있던 마티스의 스튜디오를 찾아오고 독일의 선전포고가 있었던 직후라 두 사람은 피난길에 오릅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프랑스를 떠돌면서도 그녀는 끝까지 마티스의 곁에 머물며 그를 돌봅니다.

 

마티스의 스튜디오를 찾는 사람들은 화가로서 또 남자로서 마티스가 리디아에게 의지한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초췌한 늙은 화가에게 젊은 그녀는 생활의 활력이었고 동시에 화가인 마티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1954년 11월 3일 마티스가 사망하기 전날, 한 여인이 마티스가 입원해 있던 병실을 찾았습니다. 마티스는 볼펜으로 그녀를 스케치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주인공은 바로 리디아였습니다.

 

Young Woman in a Blue Blouse (푸른 블라우스를 입은 젊은 여인) 1939. Oil on canvas.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Nude Seated on Blue Cushion



Odalisque with Magnolias
 
 

 

그는 20세기에 가장 먼저 일어난  미술 운동인 야수파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또한 조각가, 삽화가, 타피스트리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다.
마티스는 회화란 현실을 재현하는 것보다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대상으로서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형태나 공간감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지 않고, 강렬한 색과 선으로 무늬를 만들고 운동감을 불어넣었다.
처음에는 법률을 공부했지만 진로를 바꿨고 G 모로의 미술학교에서 모로의 지도를 받으면서 색채화가로서의 천부적인 재질이 나타났고, 피사로 등과 사귀면서 인상파의 영향도 받았다.

 

1905년에 마티스는 드랭, 블라맹크 등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다. 이 야수파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었으며, 원색의 대담한 병렬을 강조한 강렬하면서도 개성적인 표현을 시도했다. 후기에 들어서는 세잔과 입체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2번에 걸친 모로코 여행 후 아라베스크나 꽃무늬를 배경으로 한 평면적인 구성과 색채의 병치를 통한 독특한 화풍을 창조했다. 그는 1920-1930년대에 걸쳐 확고한 예술세계를 구축함으로써 20세기 회화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말년에는 종이를 잘라 만든 추상 콤포지션에 전념했고, 1949년 니스에 있는 방스 성당의 건축과 장식 일체를 맡아 그의 예술을 집대성했다.
대표작은 ‘마티스 부인의 초상’, ‘독서하는 여인’, ‘목력꽃을 든 오달리스크, ‘춤’ 등이 있다.

 


Pearly Nude


Carmelina

Carmelina

Decorative Figure on an Ornamental Background
Decorative Figure on an Ornamental Ground

 

 


Henri Matisse, Nu bleu 
"Nu bleu : souvenir de Bisk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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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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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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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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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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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지가 있는 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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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풍의 커튼이 있는 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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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줏빛 인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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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네시아의 바다

 

 


 


Polynesia, The Sea. 1946.


 

종이 작업이 고무 수채를 칠한 '종이 자르기시기'로 접어들면서 마티스의 작품은 정점에 이른다. 이 시기에 마티스는 물감으로 바로 데생을 했다. 조각가가 끌과 망치로 돌을 자르듯이 미리 대리석의 정맥을 찾아내듯이 그는 파랑, 초록, 분홍의 단색 표면 위에서 자신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따랐다. 그 결과, 수많은 걸작이 속속 탄생했다.

 


Woman in a Purple Coat, 1937

곡물 상인을 부모로 둔 마티스는 법학을 공부했다. 그 뒤 파리에 와서 국립 미술학교의 귀스타브 모로 문하에 들어간다. 초기에 마티스는 신인상주의에 관심을 보였다 그의 색채는 더욱 선명해지며, 1905년서 1908년까지 야수파의 우두머리로 여겨졌다. 1907년에 처음으로 조각을 제작했고 1908년부터 1917년까지 공간 표현을 위해 더욱 리듬 있는 구성과 선적인 형태, 좀더 강렬한 색채를 찾아 독일, 알제리, 모로코를 여러 번 여행한다.

1917년에 그는 남프랑스에 정착한다. 이곳에서 마티스의 미술은 더욱 장식적으로 변하며 한결 순수하고 고요해진다. 1933년에 미국 메리온의 반스 재단을 위해 <춤>을 두 점 완성한다. 말년에 고무 수채를 칠한 종이 자르기 기법으로 선과 색채가 완벽한 합일에 이른다. 1952년 고향 카토와 니스의 시미에즈에 마티스 미술관이 개관한다.



Corner of Studio, 1912


 

STILL Life, Checked Tablecloth, 1903


 

NATURALEZA muerta con meseverde(Still life with green inn), 1928


 

INTERIOR  in Aubergines. 1911-12

 

 



The Window,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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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레슨

 

 


▲ 앙리 마티스의 '노란 드레스와 어릿광대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1941).

 

 

          

                         Harmony in Red, Oil on canvas, 69¾ x 85, 1908-9

 

 

     창밖으로 따스한 봄날이 펼쳐져 있다. 반쯤 남은 백포도주와 적포도주를 보니, 식사후 식탁을 정리하는 모습인 듯하다. 작품의 소재는 매우 흔한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붉은 색과 시선을 집중시키는 검은 색을 사용하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창출해냈다.

     마티스는 1907년부터 공간적 개념을 철저히 배제하고 평면적이면서도 장식적인 작품을 시도하면서 이 작품을 완성해냈고 동시에 야수파와 작별을 고하게 됐다. 식탁보와 벽지가 분간되지 않은 채 온통 하나의 공간으로 보인다. 마치 진노란 머리의 여자도 배경속의 한 부분인 것 같다. 과일의 배열도 붉은 배경에 맞춰서 적당한 간격을 두고 있으며 왼쪽 창문으로 보이는 녹색정원은 붉은 색과 대조를 이룰 수 있는 오브젝트가 필요해서 그 자리에 놓여진 것 같다. 상당히 인위적이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조화롭다. 식탁보 무늬가 하늘로 기어오르는 모습을 보이면서 작품 전체에 생동감을 주고 있으며 동그란 오브젝트의 크기변화와 식탁보무늬의 곡선의 형체를 통해 마치 음표가 방안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리듬이 살아나고 있다.

     마티스는 한 작품을 그릴 때마다 기초작업을 여러번 하면서 필요없는 것들을 계속 지워나가 가장 간소한 구성을 사용했다고 한다. 어린학생의 작품처럼 입체감없이 평면적인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살아움직이는 느낌이 나는 것은 구성이 살아있기 때문인 것 같다. 작품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구성일지 모르겠다. 

 

 

           

                            Dance, Oil on canvas, 8’ 5” x 12’ 9½, 1910

 

 

      모스크바의 어느 저택의 계단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졌다는 이 작품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더할 수 없이 강렬하다. 언뜻 보기만 해도 뇌리에 그대로 박혀버린다. 그 강렬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바로 선에서 나온다. 마티스는 무척 고심하면서 선 하나하나를 수정해 나간 것 같다. 누드이면서도 누드의 겉모습 보다는 인간본질을 담은 표상들이 화면을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구성의 미학에 중점을 뒀기 때문인 것 같다. 색채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표현할 줄 알았던 마티스는 구성면에서도 매우 치밀했던 것 같다. 그 덕분에 관객들은 자신들의 내면으로부터 리듬이 저절로 우러나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덤으로 행복감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쉽게 생각하고 이 작품을 모사해보려던 나는 선 하나하나를 베껴나가며 선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생각과 애정을 쏟아부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춤에 미쳐버린 사람들은 마티스 내면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Red Studio, Oil on canvas, 71¼ x 86¼, 1911

 

 

     마티스의 스튜디오를 그린 것으로 대상물을 극단적으로 평면화시킨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사소한 것들은 붉은 색으로 흡수시켜버리고 몇가지 오브젝트들만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얇은 하얀선이 공간구조를 암시하고 있지만 공간적 묘사가 극단적으로 평면화되어 있어 오브젝틀간의 유기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붉은 색 자체가 마술적인 특성을 갖고 있어서인지 전체가 실존하지 않는 마법의 세계처럼 환상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마티스의 작품만이 실제적인 색상을 갖고 있다. 가장 오른쪽 위에 걸린 작품은 ‘Le Luxe II' 이고 그 앞으로 자신이 만든 청동조각상이 놓여있다. 마티스는 화폭에 담은 대상을 조각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는 그림 속 대상이 환생한 세계에서 살고 싶었을까? 이 작품을 보면, 난 마티스는 이 세상에 살아움직이는 것은 자신의 작품밖에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을 사랑한 화가였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앙리 마티스는 북(北)프랑스의 카토 출생. 처음에는 파리에서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로 전향하였다. 1892년 파리의 장식 미술학교에 적을 두고, 미술학교 수험준비를 하면서 아카데미쥘리앙에서 부그로의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그 아카데믹한 가르침에 만족할 수 없어 루브르미술관에서 모사(模寫) 등을 하고 있는 사이 G.모로의 눈에 띄어 그의 미술학교 교실로 입학하였다. 여기서 루오 마르케 등과 교우, 모로의 자유로운 지도 아래 색채화가로서의 천부적 재질이 차차 두각을 나타내었다. 1897년 소시에테 나시오날 전람회에 출품한 《독서하는 여인》을 국가가 매입하게 되자 이 전람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 후 피사로 등과 알게 되어 인상파에 접근하였고, 또 보나르나 뷔야르 등의 영향도 받았다. 모로가 죽은 후에는 아카데미 카리에르에 다니며, 드랭과 알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다.

한편 예술적으로는 드랭을 통하여 블라맹크를 알게 되고, 1900년 이후에는 세잔풍(風)을 도입하여 극도로 구성적인 포름과 어두운 색조로 전향하였으나, 1904년 시냐크 ·크로스와 함께 생트로페에 체재하게 됨으로써 신인상파풍을 짙게 받아들였다. 이 새로운 교우관계가 이듬해에 시작된 야수파(포비슴) 운동의 강렬한 색채의 폭발로 나타나게 되었다. 드랭 ·블라맹크 등과 함께 시작한 이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며, 원색의 대담한 병렬(竝列)을 강조하여 강렬한 개성적 표현을 기도하였다.

1908년경에는 강한 색채효과를 억제하는 한편, 새로이 전개된 피카소를 중심으로 한 입체주의(큐비즘)의 방향으로 눈을 돌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1910년의 뮌헨 ‘근동미술전’의 인상, 1911∼1913년 두 번에 걸친 모로코 여행으로 왕년의 포브 시대와 다른 장식적인 현란한 색채를 사용하여 특히 아라베스크나 꽃무늬를 배경으로 한 평면적인 구성이나 순수색의 병치(竝置)로 독특한 작풍을 창조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는 《목련꽃을 든 오달리스크》가 있다.

그 후 그의 예술은 차차 성숙해져 보색관계를 교묘히 살린 청결한 색면효과 속에 색의 순도를 높여 1923년경부터 1930년대에 걸쳐 확고한 마티스 예술을 구축함으로써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의 위대한 지침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9년 남(南)프랑스 니스의 방스성당의 건축 ·장식 일체를 맡아 여기에 모든 기법과 재료를 동원, 그의 예술의 집대성을 이룩하고 니스에서 죽었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세계 각국에 존재하고, 20세기 최고의 모뉴먼트의 하나로 평가된다.

               

 

                 

             

               Bathers by the River, Oil on canvas, 8'7" x 12'10", 1916~17

 

 

 

             

                  The Piano Lesson, Oil on canvas, 96½ x 83¾", 1916

 

 

 

            

    Music, 45¼ x 45¼, Oil on canvas, 1939

 

 

 

 

The Sheaf (La Gerbe) - Henri Matisse, 1953
 

 

 

 

Henri Matisse, "Sorrow of the King"

lithohraph, 34 x 44 cm


 

 

 

 

 

마티스(Henri Matisse)

이카루스의 추락(La chute d'lcare)

41.9 x 26.cm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야수파 Fauvism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신적인 회화운동.
1905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된 한 소녀상 조각을 보고비평가 루이 보크셀이, `마치 야수의 우리 속에 갇혀 있는
오나텔로` 같다고 평한 데서부터 유래한 명칭이다.
마티스 . 마르케. 블라맹크 . 반 동겐 등 일군의 젊은 작가들이 매너리즘에 빠진 이상주의에 반발하여일어난 예술 사조이지만, 하나의 이론이나 주장에 의한, 다시 말해 엄밀한 의미의 주의나 유파는 아니다.
야수파는 고호 . 고갱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전통적인 회화 개념을 부정하고 자연주의적인 묘사를 벗어나,색채 그 자체의 표현을 강조하는 근대 미술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했다.
인상주의의 빛에 의한 명암법을 거부하고 원색을대담하게 사용했으며, 터치가 격렬하고, 형태는 극도로 단순화시켰다.
1907년 입체파 운동 이후 각자 독자적인 화풍으로 분열된다.
독일의 표현주의는 여기에 호응한 미술 운동이다.

1)특징 -극도의 단순화와 대담한 변형, 원색위주의 강렬한 색채, 대담한 터치
2)대표작가
-마티스 = 오달리스크, 붉은실내, 젊은 수부 등
-루오 = 이집트 탈출, 성자의 얼굴 등
-블라맹크, 뒤피, 드랭 등

 



 


자화상1900 캔버스 유채 64×45cm.8cm 보스턴 미술관



 


The Conversation, 1909, oil on canvas, The Hermitage, St. Petersburg. 93KB

 

 


 


하얀깃털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1905]




마티스 부인의 초상화입니다. 현란한 색채가 가장 인상적이죠?^^ 바탕에는 빨강, 노랑, 초록, 파랑, 핑크, 적어도 5개 이상의 색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티스 부인의 얼굴에도 온갖 색깔이 다 쓰였습니다. 마티스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 이 그림을 <가을전>이라는 전시회에 출품했습니다. 다른 화가들의 그림도 마티스의 것과 비슷하게 강렬하고 비자연적인 색채가 특징이었죠. 그들의 그림은 당시 사람들이 보기엔 너무나 자유분방하고 거칠어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을 연상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야수파(Fauvism)"라는 별명을 얻었던 것입니다.


 


삶의 환희 1906년
 
 



 


음악(h:27)






마닐라 쇼올을 걸친 마티스 부인> 1911 캔버스 유채 112×69cm 바젤 개인 소장


 

 


 

피아노 레슨 1916 캔버스 유채 245×212cm


 

 


 

                                                                                              


어항앞의 여인-1921-캔버스에 유채, 81.3*100.3cm-시카고 미술관




꿈 1940년
 



 

 


 




 





 



 


 



 


 




 



 


 



 


 



 


 







 



 




 







 





 



 


 
 
 



마티스 뮤지엄

Musee Matisse

Matisse et Nice_ 지중해 니스와 마티스

 

마티스의 뮤지엄은 지중해의 니스에 있습니다.

이 건물은 원래 17세기에 세워진 이탈리아식 별장(別莊)으로 푸른 녹지 속에 눈에 띄는 붉은색 벽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곳 2층에 마티스의 마지막 뜻에 따라 시(市)에 기증한 작품과 유족들이 기증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된 작품들은 대체로 초기의 작품과 말년의 조각 ·절지화(切紙畵) 등이며,

그의 마지막 작품 <꽃과 과일>또한 이곳에 있습니다.

 

앙리 마티스

 

 

마티스는 그가 매일 바라본 지중해의 푸른빛만큼이나 단순명쾌한 원초적 아름다움을 이 푸른 색조를 통해 표현했습니다.

그런 그의 그림에서는 타는 지중해의 색조가 출엉입니다. 루이 아라공은 '소설 앙리 마티스' 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마티스의 창은 니스를 향해 열려 있다. 그 경이롭게 열린 창 너머에는 안경 너머 마티스의 눈동자처럼 파란 하늘이 있다.

거울과 거울의 대화가 펼쳐진다. 니스는 화가를 바라보고 화가의 눈에 투영된다...'

 

마티스는 북프랑스의 캉브레(Cambrai) 출신인데, 미술관을 남프랑스의 니스에 두게 된 것은,

니스를 사랑한 그가 1917년부터 1954년까지 37년이라는 오랜 기간동안 니스에 머물면서 니스를 배경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고,

 니스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입니다.

 

 

 



마티스의 말년 필생의 정성으로 참여한 로자리오 성당_ 니스의 마티스 미술관 옆 방스 언덕에 있습니다.

인근 방스의 시미에 언덕의 로자리오 예배당에도 그의 작품들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20㎞ 정도 떨어진 방스에 있는 로제르교회당의 내부장식은,

그가 1948년에서 51년에 마지막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최대 걸작으로, 마티스 예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지중해의 니스는 마티스가 1917년에서 1954년까지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살면서 작업해 왔습니다.

 

Chapelle de Saint-Marie du Rosaire

로자리오 성당

 




 



 


 

 

인근 방스 마티스 예배당(로자리오 예배당)의 깊고 푸른 스테인드 글래스 또한 자신의 재능을 통해 니스의 감춰진 영혼마저 형상화한 마티스의 위대한 손길을 보여줍니다. 흔히 사람만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빛을 지닌 모든 것에 영혼이 있습니다.  마티스는 도시와 색채에도 영혼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천상의 색채들을 통해 해탈한 빛과 영혼의 경지로 우리의 어두운 눈을 인도합니다.

 

 



Sketch of Matisse by Picasso

피카소가 그려준 마티스의 초상입니다.

 

 



"Women and Monkeys" is over the door; through the door is "Acrobats" and "Rose Chasuble."

마티스의 스튜디오입니다. 여인과 원숭이_ 서커스_ 장미 체뷰블(사제복) 작품들이 보입니다.

 

 



역시 마티스의 스튜디오입니다

On the walls are "Amphitriste," "Composition," "Black and Red," "Composition with Red Cross," and "The Bird and the Shark." 그 유명한 마티스의 상징 미술화들_ 암피트리테_ 흑과 적_ 붉은 십자가 컴퍼지션_ 새와 상어들이 걸려 있습니다.

암피트리테_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포세이돈 《Poseidon의 아내_바다의 여신》아내입니다.

 

 



마티스는 늘 의자에서 작업을 합니다.

프랑스 니스의 방스_ 로자리오 예배당에서 성모마리아와 아이의 원형 초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Matisse drawing a medallion of the Virgin and Child for the chapel at Vence, France

 

 

 



사진을 좀처럼 잘 찍지 않던 마티스가_

당대의 전설적인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마티스의 초상입니다.

 

 

 

잘 나오지 않았지만 이 사진은 무척 귀한 자료입니다.

마티스가 말년에 관절염으로 무척 고통을 받고 휠체어에서 생활할때

의자에 앉아 색종이를 오려 붙히던_ 콜라주_ '파피에 데쿠페'(papiers découpés) 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티스의 화실_ 스튜디오 모습입니다.

고독한 말년을 보낸 마티스는 류머티즘으로 무척 고통 받았습니다. 게다가 장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받은 1941년부터 그는 거의 모든 시간을 침대에 누워서 보냈습니다. 1950년부터는 천식과 심장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는 마지막 사인도 하트 어택_ 심장 돌발 마비였습니다.

 

그러나 고독했고 불편했다는 것이 그에게는 더욱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게 한 것인지 모릅니다.

 

 

 

 

마티스의 푸른 누드입니다.

온세상의 카페와 온라인에 넘치는 이 그림은

마티스의 발년 작품_ 색종이 오려붙히기 작품입니다.

 


© Hélène Adant

  

마티스는 만년에 그가 붓을 쥐기 힘든 나이가 되었을때도 그는 색종이 오려 붙히기_ 콜라주를 통해서 여전히

미술에서의 해방자로서 작업을 계속합니다. 

 

collage

콜라주 _ '파피에 데쿠페'(papiers découpés)

신문지·헝겊·벽지·인쇄물 또는 일상생활에서 취한 물건 등을 화판이나 캔버스에 붙여 만드는 미술기법. 앙리 마티스가 말년에 만든 '파피에 데쿠페'(papiers découpés)_ 색종이로 오려 붙힌 그림_는 풍부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콜라주 기법의 변형을 채택한 것이다. 미국의 조지프 코넬은 친밀감을 주면서도 신비로운 유리 진열장에 콜라주 기법을 확대해 적용했다.

 

Cover of Jazz by Henri Matisse

Cover of Jazz by Henri Matisse

예술과 인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 〈재즈 Jazz〉(1947)를 출판

 

 

마티스 미술관에 소장중인 콜라주 작품들입니다.

 


Nu bleu IV, 1952. Nice 푸른 누드
 
 
 

Danseuse créole, 1951

Gouache decoupee 205 x 120cm
Musee Matisse, Nice © Succession Henri Matisse
 



 
 


마티스 - 방스의 로제르 예배당

1947년과 1951년 사이, 비록, 건강상태는 악화되고 있었지만 마티스는 자신이
"전생애에 걸친 작품활동의 마지막 단계, 그리고 이루어내기 어려운 진지하고
거대한 노력의 정점"이라 생각했던 어떤 작품을 제작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도미니코 수녀회에 의해 운영된 칸느 근교의 작은 성당ㅡ
이 성당은 마티스의 별장 길건너에 있었다ㅡ의 장식을 위한 것이었다.
2차대전이 종료되면서 부활하기 시작한 '현대적인' 프랑스 카톨릭 신앙 속에는,
당시의 변화된 지적 분위기와의 접촉을 꾀하기 위하여 현대미술의 장점들을
다각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교회의 의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한 시도의 대부분은 중세시대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모방한 추상회화로
대종을 이루었으나 르 꼬르뷔제가 롱샹에 세운 성당과 마티스가 계획한
방스의 성당은 매우 훌륭한 건축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수술을 받은 후 마티스는 아라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결국 나는 제2의 삶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그것을 믿게되었다.
낙원과도 같은 그곳에서 나는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게 될 것이다------."
사실 그는 방스 성당에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지는 않았다
(프레스코 작업을 하기에는 그의 기력이 너무나 쇠퇴해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 제단,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십자가 안치소, 법의 등
방스 성당의 모든 것은 마티스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특히 사제의 동작에 따라 예기치 않게도 찬란한 색채조활를 발산하는 미사복은
16세기 이래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가장 매력적인 성직복장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진 중앙의 벽에는 위로 치솟은
'생명의 나뭇잎'을 투과하여 들어온 청, 황, 녹색의 빛이 성당 내부의 흰색공간을
적시면서 부드럽게 반향된다.
만일 마티스가 자신의 디자인 능력을 봉헌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일개 무미건조한 건물로 끝나버렸을지도 모르는 이 성당은,
결국 마티스의 노력에 의해 현대미술이 제공해준 가장 훌륭한
    명상의 장소로 변하게 된 것이다.

    - 로버트 휴즈, <새로움의 충격>에서


 

마티스는 코트다쥐르 언덕이 있는 방스에 1943년부터 별장을 갖고 있었는데, 1941년 중병에 걸렸을 때 그 지방의 도미니쿠스회 수녀들 가운데 하나가 그를 간호해준 데 대한 보답으로 그 별장터에 도미니쿠스회 수녀들을 위한 로제르 예배당을 짓기로 결심하고, 1948년에 설계를 시작해 3년 만인 1951년에 완공했다.

 

 

 

 

 


 



 


 

 

 


 

 

그는 우선 스테인드 글라스의 일부를 손수 도안했고, 그 다음에는 벽화를 그렸으며, 성직자의 의복과 예배용 물품을 비롯해 교회 안팎의 거의 모든 것을 도안하는 것으로 일을 매듭지었다. 예배당이 완공되기 전에 그는 색종이를 오려 만든 거대한 작품(그가 〈재즈〉의 삽화에서 했던 작업을 확대한 것)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그를 1950년대 초의 '가장 젊은' 화가이자, 가장 혁신적인 예술가로 만들어주었다._ R.D. McMullen 글

 

 

- L avaleur de sabre - 1943-1944

Gouache decoupee
Mnam depot au Musee Matisse, Nice. © Succession Henri Matisse

 

 

 


 

그의 미술 창문으로는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이 비추입니다.

눈부심_ 황홀함_ 환희_ 동양과 서양_ 음악과 문학_ 다분히 보들레르적인

그 무엇이 타고 있는 냄새가 납니다.

 

 

 

 

 

 

 

 

 

 

 

 

 

색체가 강렬하기 때문에 야수파였다고 단순분류하기에는 너무나 독특한

마티스의 미술 세계가 있습니다. 

나는_ 마티스는 그림틀속에 있던 액자속 그림을_

그는 진정 액자 밖으로 돌출 시킨_ 미술의 해방자_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justinKIM

 

 

  

 



 

마티스

 

[Henri(-Émile-Benoît) Matisse]

(1869∼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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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계절 좋은세상
글쓴이 : 다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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