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스캇 튜크 (Henry Scott Tuke , 1858~1929)
석양 아래에서 Under the Western Sun / 1917
수영을 끝 낸 두 젊은이가 뭍으로 올라 왔습니다. 균형 잡힌 몸매 위로 쏟아지는 석양 빛에 몸이 빛나고
있습니다. 젊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활기가 넘치는 장면인데, 서 있는 자세나 앉아 있는 자세가 아주
매혹적입니다. 남자의 뒷모습도 저렇게 근사할 때가 있군요. 서 있는 소년과 앉아 있는 소년의 시선이 서로를
향하고 있습니다. 시선이 한 방향으로 향했으면 담백했을 장면이, 교차되는 바람에 그림에 열기가 돕니다.
서로의 몸에 대한 감탄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한 발을 살짝 든 모습에서는 관능도 느껴집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상상의 여지가 많은 것을 관능이라고 하죠. 그렇기 때문에 관능은 예술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상상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포르노는 예술로 보지 않습니다.
튜크는 영국의 요크에서 태어났습니다. 1792년, 영국에 최초의 근대적인 정신병자를 위한 시설을 만든 것도
그의 선조였고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그리고 삼촌도 사회 운동가로 이름을 날렸으니까 아주 탄탄한 집안
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의사였습니다. 두 살 되던 해 팰머스로 집안이 이사를 하는데 그 후 팰머스는
튜크에게 고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머스 해변에서 On the Beach Bournemouth / 1882
영국에서 가장 멋있다는 본머스 해변에 앉아 책을 폈습니다. 구름은 낮게 내려 앉아 바다를 일렁이게 하고
있고 물을 따라 오는 해풍은 앉은 여인을 흔들고 있습니다. 손으로 모자를 잡고 손으로는 넘어가는 책장을
잡고 있지만 눈으로는 글이 읽히지 않습니다. 끝없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책 속에 있는 글자를 가져가더니
머리 속에 있는 것들마저 쓸어 안고 먼 바다로 나갔습니다. 흐린 날 바닷가에서 무얼 할 수 있을까요---.
그저 마음과 머리를 비우는 것 말고 또 있을까요? 바다는 그냥 앉아서 무엇이든 내 놓고 텅 빈 채로 있으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팰머스는 어촌이었습니다. 자라면서 항구를 드나드는 배를 접하게 된 튜크는 자주 배를 그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배에 관한 그림으로는 한 때 그가 최고였던 적도 있으니까 어려서 무엇을 보는 가도 중요합니다.
열 여섯이 되던 해 그의 집은 다시 런던으로 이사를 합니다. 슬레이드 미술 학교에 입학한 튜크는 미술
실력도 뛰어 났던지 3학년 때는 장학금을 받습니다. 그리고 1879년, 스물 한 살에 처음으로 로얄 아카데미에
작품을 출품합니다. 학교 공부가 끝난 그는 1880년, 이탈리아 여행 길에 오릅니다.
약속 The Promise
혹시 살면서 이렇게 간절한 눈빛을 받았던 적을 기억하시는지요? 흐드러지게 꽃이 핀 나무 밑, 한 손으로
나무를 잡은 사내는 남은 한 손으로 여인의 손을 쥐었습니다. 타오르는듯한 눈은 저런 눈을 두고 하는
것이겠지요. 여인의 얼굴에 고정 된 눈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단단합니다. 그리고
여인의 모든 것을 가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묘하게도 사내의 큰 눈에는 슬픔 한 가닥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목숨 때문에 사랑을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사람 사는 모습이죠. 꽃나무 밑, 무슨 약속이 오고 가는 걸까요? 맞잡은 손에 자꾸 힘이 들어 갑니다.
피렌체에 둥지를 튼 튜크는 누드에 대한 드로잉을 처음으로 배웁니다. 그의 초기 작품은 초상화와 배를
묘사한 작품이 주를 이루었는데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되는 누드화는 아마 이때 기초가 다져진 것이겠지요.
1881년부터 거처를 파리로 옮긴 튜크는 르파주 (http://blog.naver.com/dkseon00/140059075942)의 화실을
방문합니다. 르파주는 그에게 야외에 나가 직접 그림을 그리라고 격려합니다. 또 역사화가 장 폴 로렌과도
교분을 쌓고 존 싱어 서전트와도 만나는데, 이 번에 처음 안 것이지만 서전트도 남성 누드를 그렸다고 합니다.
물론 이 사실은 별로 알려 지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군요.
아침 수다 A Morning Gossip / 27cm x 34cm / 1885
수다라고 번역했지만 가십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이 만만치 않습니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
빨래를 널고 난 여인 옆에 아이를 안고 여인이 등장했습니다. 시작은 아침 인사였겠지요. 작은 동네에서는
간 밤에도 무수히 많은 일이 일어나고 그 이야기는 거의 오늘날 인터넷의 속도로 전달됩니다.
혹시 그 이야기 들었어?
인사가 끝나고 드디어 본격적으로 정보와 소문 그리고 추측이 더해진 이야기가 퍼져 나가는 순간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이성이지만 마음에 들고 안 듦은 감성의 문제이지요. 사람은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고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 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우물가 소문도 무섭지만 울타리 소문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지요. 그래도 상큼한 아침입니다.
2년 간 파리에서 머무는 동안 튜크는 오스카 와일드와 다른 유명한 시인, 작가들과도 친교를 맺게 되는데,
이들 대부분은 젊은 남자를 찬양하는 글을 쓴 동성애자였습니다. 튜크도 얼마간 이들의 모임에 흠뻑 젖었던
같습니다. 그러나 느낌은 오늘 날 동성애자와는 좀 다릅니다. 빛나는 육체를 가진 젊은 남자에 대한 찬미에서
비롯 되었기 때문에 성적인 느낌과는 좀 거리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더 구체적인 자료를 찾아 보고
싶었지만 튜크의 작품을 보면 제 생각이 맞는다는 느낌 때문에 그만 두기로 했습니다.
어부 The Fisherman / 35cm x 64cm
저는 실 생활이나 그림 속에서나 이렇게 뭔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지금 어부의 모든
신경은 팽팽하게 당겨진 줄에 가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줄을 놓았다 당겼다 하면서 줄에 걸린 생선의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것이죠. 줄이 팽팽한 것을 보니 제법 씨알이 굵은 녀석이겠군요. 한 평생을 바다에서
보냈을 어부이지만 작은 생선 하나를 잡기 위해서도 온 힘을 다 기울이고 있습니다. 삶은 이 모습처럼 진진한
맛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저도 생계와 관련된 일일 때는 더욱 진지해집니다. 줄에 달렸던 생선이 도망이라도
가는 날에는 --- 아내의 차가운 눈빛 아래 그냥 굶어야지요.
1883년 영국으로 돌아 온 튜크는 콘웰의 뉴린에 잠시 머뭅니다. 뉴린은 뉴린파로 유명한 곳이지요.
그 곳에서 랭글리, 테일러 같은 화가들을 사귀면서 뉴린파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2년 뒤인 1885년, 그가
어렸을 때 자란 팰머스로 이사, 그 곳에 정착을 합니다. 튜크가 팰머스에 정착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배 타는 것을 그림 그리는 것만큼 좋아했던 그에게 두 가지를 다할 수 있는 곳이었고 아직까지는
외진 곳이어서 낭만적인 풍경도 있었을뿐더러 야외 누드를 그리는 것에 대해 다른 지역보다도 관대했기
때문입니다. 만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집을 짓고 튜크는 여생을 이 곳에서 보냅니다.
수영하는 아이들 The Bathers
물에서 올라 와 뱃전에서 해바라기를 하던 아이들이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갈 궁리를 하는 모양입니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은 자연스럽고 천진스러워 보입니다. 문제는 등을 돌리고 앉은 아이의 모습입니다.
아이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앵그르의 작품 속 여인들의 뒷모습이 떠 올랐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몸처럼 곱고
부드럽게 묘사된 것은 모델의 진짜 모습이라기 보다는 튜크의 소년들에 대한 감정 표현이 아니었을까요?
빛나는 육체를 가진 젊은 남자들에 대한 헌사 같은 것 말입니다.
팰머스로 이사 온 다음 해 튜크는 낡은 프랑스 범선 한 척을 41파운드에 구입합니다. 41파운드는 당시
그의 작은 작품 한 점 값이었다고 하니까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튜크는 친구들과 함께
배에 색을 다시 칠하고 개조해서 화실로 사용했습니다. 또 거실도 한 칸 만들어서 친구들과 파티를 즐겼다고
하니까 나름 낭만도 있었습니다. 배에 관한 그의 열정은 변화가 없었는데 외국 여행을 가서도 배에 대한
그림을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드가 아니어도 충분히 유명할 만 합니다.
8월의 푸른 색 August Blue / 1894
수영을 하다 지친 아이가 난간에 매달렸습니다. 긴 노를 옆구리에 낀 아이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쳐다 봅니다.
선뜻 손을 내밀고 있지 않은 걸 보면 물 속의 아이는 아직 배로 오를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뱃전에 서 있는
아이는 아주 당당한 모습입니다. 푸른 바다 위, 햇빛에 불게 달아 오른 몸은 그리스 조각처럼 매끈합니다.
빛으로 가득 찬 화면과 젊은 나신들이 물을 따라 출렁거리는 8월의 바다는 황홀합니다. 튜크의 작품을 성적
(性的)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고추’를 가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것도 상상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노골적인
신체 부위의 묘사는 대중들에게 환영 받기 어려웠겠지요. 물론 튜크의 작품 중에는 ‘고추’가 그려진 것도
있기는 합니다. 난간을 잡고 허덕거리는 아이는 실제로는 튜크의 친구가 모델을 서 준 것이라고 하는데 등만
보여주는 모델이었군요.
처음부터 튜크가 남성 누드를 본격적으로 그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신화 속의 장면들을 중심으로
누드를 배치했는데 이야기를 담고 있는 누드는 어딘가 맥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야기가 주제가 되는 것이지
젊은 남자의 몸이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럴 수 있겠지요. 1890년대부터 튜크는 이야기와 관계
없이 햇빛 가득한 바다의 풍경 속에 빛나는 젊은 남성 누드만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루비, 황금 그리고 공작석 Ruby, Gold and Malachite / 40cm x 60cm / 1902
작품 제목이 멋있습니다. 루비가 가지고 있는 진홍색과 황금의 노란색, 공작석의 녹색이 화면 속에 서로
어우러졌습니다. 루비는 정열을 뜻하는 보석입니다. 황금은 변하지 않는 영원성, 공작석은 못 된 것으로부터
보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영원히 변하지 않은 정열을 지켜주고 싶다는 튜크의 생각이
담긴 제목일까요? 또 세 가지 보석은 보석 중의 보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누드로 있는 세 남자에 대한 최대의
찬사일 수도 있겠습니다. 제목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그림 속 남자들과 저의 젊은 시절 몸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음, 저런 몸을 가져 본 적이 없으니 비교가 불가능하군요.
그의 작품은 낚시를 하고 배를 젓고, 수영을 하고 다이빙을 하는 동네 소년들의 모습들로 채워졌고 젊은
남자 들을 모델로 하는 작품도 등장했습니다. 모델들과는 매우 친숙한 우정을 쌓았지만 성적(性的)으로는
그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동성애를 연상케 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작품 속에
묘사되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이런 종류의 작품은 쉽게 팔릴 수 가 없었습니다. 동성애 작품을 수집하는
수집가들이 그의 고객이었죠.
등대 The Lighthouse
바다를 향해 앉은 등은 햇빛에 검게 그을었습니다. 그러나 그 등은 삶을 치열하게 뚫고 나온 흔적이 각진
근육으로 자리를 잡은 등이 아니라 미끈하고 여립니다. 그래서 그의 모습은 바다 저편 흰 등대를 애써 외면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젊을 때 양식은 희망이고 나이 들면 추억으로 생을 유지한다고 하죠.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등에는 나른함이 물감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 나른함은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습니다. 꿈과 친한 친구 중에는 불안함도 있습니다.
그리고 싶은 작품을 위해 생계를 무시할 수는 없었겠지요. 튜크의 장기 중 하나는 초상화였습니다. 런던에
또 하나의 화실을 마련하고 주문 받은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겨울을 보내기 위해 필요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남긴 초상화 중에 유명한 것으로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한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또 소위 ‘팔리는 그림’도 그리곤 했는데 1892년 이탈리아와 알바니아 여행을 다닐 정도로 금전적인
부유함도 있었죠. 이 여행을 통해서 눈부시게 빛나는 색과 새로운 인상파 기법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수영하는 아이들 Bathing Group / 1914
남자의 얼굴을 여인의 것으로 바꾸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서 있는 남자의 자세가 ‘여성’스럽습니다.
더구나 아래 쪽에서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는 아이의 등장으로 인해 분위기는 더욱 관능적이 되었습니다.
훔쳐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서 있는 남자의 시선 때문입니다. 무심한 듯, 관심 없다는 듯 서 있는
시선과 아이의 시선이 엇갈렸기 때문이죠. 왜 튜크가 게이 문화의 상징이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대중 목욕탕에 가서 저런 느낌의 남자 몸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튜크는 1914년, 로얄 아카데미의 정회원으로 선출됩니다. 당시 부드럽고 꼼꼼한 붓 터치가 유행하던 시절,
그의 화풍은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물론 나름대로의 또 다른 시장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만약
그가 주류에 속해 있었다면 아마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평론가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모두 펌프에 붙어! All Hands to the Pumps
드디어 거친 바람에 돛이 찢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침몰을 막기 위해 배 안으로 들어간 물을 빼려고 모든
사람이 펌프에 매달려 물을 퍼 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돛을 빨리 내려야겠지요. 배가 뒤집히거나
돛 대가 부러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장의 목소리와 시선을 따라가 보면 아마 돛대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일하는 선원들이 있겠지요. 모두들 돛대를 향하고 있는 사이 으르렁거리며 거대한 파도가 배를 향해 달려 오고
있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런 그림이 꺼려지지만, 그러나 바다는 이런 사나이들의 가쁜 숨소리와
몸짓으로 조금씩 우리와 가까워졌습니다. 매끈한 남자들의 모습도 화폭에 담았지만 튜크는 또 다른 세계의
남자들에게도 눈길을 주고 있었던 것이죠.
1923년, 65세의 튜크는 자메이카를 비롯한 중앙 아메리카를 찾습니다. 수채화 몇 점을 남겼는데 벨리즈를
지나가다가 그만 열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 때 얻은 병으로 튜크는 결국 일흔 한 살의 나이로 팰머스에서
숨을 거둡니다.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이름은 곧 잊혀졌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이름이 다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1970년대에 시작된 게이 문화 모임에서 그의 작품이 숭배의 대상이 되면서부터 입니다.
평생을 바다와 소년들의 모습을 사랑했던 화가가 다시 알려지게 된 동기치고는 씁쓸합니다.
[출처] 헨리 스캇 튜크 - 관능이 넘치는 남자 누드|작성자 레스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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