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그림들/외국의화가의 작품

[스크랩] James McNeill Whistler

조용한ㅁ 2010. 6. 8. 21:12

 

        

 

                  James McNeill Whistler  1834-1903

 

 

             Arrangement in Gray and Black No.1: Portrait of the Painter’s Mother

                          1871, oil on canvas, 56¾” x 63⅞”(144.3 x 162.5cm)

 

MFA에서 처음 이 그림을 대했을때, 나는 그 강렬한 검은 빛에 압도되어 한참을 말없이 쳐다만 봤다. 그리고 내 마음을 뒤덮어오는 검은색이 실은 매우 강렬한 색깔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게됐다. 장례식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속에 어머니는 화난 표정을 짓고 있다. 가지런한 두손과 두발, 꼭다문 입술, 미간에 힘이 들어간 눈썹, 정면을 보고 있는 두 눈, 흐트러짐없이 정돈돼 있는 검은 옷그리고 매우 절제된 색상톤 모든 것이 매사에 한치의 오차나 낭비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하고도 검소한 모습이다. 화가는 그런 어머니에게서 어떤 사랑을 받았을까.. 그리고 어떤 상처를 입었을까하는 의문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평소 내가 생각해오던 어머니상과는 전혀 다른 사감선생님의 영정사진 같았기 때문이었다.

휘슬러는 초상화를 통해 정확한 외면묘사보다는 철학과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필수적인 것들을 뽑아내 외면의 틀을 만들고 그 위로 내면의 세계를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이 작품은 로얄아카데미로부터 거절됐다가 후에 조건부로 받아들여졌다. 영국대중들로 부터 아낌없는 갈채를 받았던 작품이라는 것을 상기할 때 너무나 대조적인 반응이었다. 전문가들은 휘슬러가 이 작품을 그 이후로는 단 한번도 공개전시하지 않았던 이유를 여기에서 찾고 있지만 난 아무래도 보편적인 어머니상과는 너무나 다른 쌀쌀맞은 분위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의심스럽다. 이 작품 이후부터 휘슬러는 배열과 조화라는 보다 음악적인 개념을 주요시하면서 자연주의와 등을 돌리고 신비적 분위기에 매료된다.

 

 

     화가의 초상화

 

 

 그의 인생

 

휘슬러는 1834년 7월, 미국 메사추세츠주 로웰에서 태어났으나 철도공사를 위해 러시아로 초빙된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에 가면서 그곳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스스로 러시아에서 태어났다고 말할 정도로 러시아를 사랑하게됐다. 후에는 미국 육사에 입학하기도 했으나 화학시험에 실패하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21세인 1855년에 미국을 떠나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1855년 - 59년까지 파리에서 미술공부를 한뒤 줄곳 런던과 프랑스를 오가며 생활했다. 어렸을 적 거주했던 로웰의 저택은 뮤지움으로 전환됐다. 예술학도시절 17세기의 독일, 스페인 특히 구스타프 코르베의 리얼리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휘슬러는 프랑스와 런던의 시골 노동자층생활을 세밀하게 그려 프린트해낸  에칭제작자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평범한 주제를 박력있는 브러시터치로 그려낸 초기 오일페인팅작품에서는 코르베의 영향이 여실하게 드러나있다. 특히 ‘The Thames in Ice(1860)은 석탄과 생선등을 런던으로 실어나르기 위해 사용했던 석탄선의 노후된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그러나 휘슬러의 작품은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그리스 조각과 아시아 도자기, 일본 프린트등에 의해 영향을 받고 그는 예술품은 정확하게 측정해서 묘사하거나 또는 스토리를 심으면서 도덕적 효과를 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대신에 색상과 선의 배열이 만족스럽고 전체적으로 아름다우면 예술적으로 성공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공식적으로 쿠베르의 사실주의에서 등을 돌린 휘슬러는 4년만에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후에 유미주의(Aestheticism)로 명명된 이같은 변화는 휘슬러에게 매우 창조적인 성공을 가져다주어, 단순화된 구성과 절제된 색상 선택으로 대폭적인 변화기를 맞이하게됐다. 이 때의 대표적인 작품이 어머니 초상화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휘슬러의 유미주의는 이때 막 비평가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한 인상주의 기술과 상반된 것으로 휘슬러의 작품은 인상주의에 의해 상대적 열등감을 가져다주고 관중들의 시선에서 멀어지게 됐다. 그러나 휘슬러의 ‘the Nocturnes’ 시리즈를 보면 인상주의보다는 현대미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며 색상과 선은 20세기 초의 추상화 발전과 직접적 연결선을 찾을 수 있을 정도이다.  

수많은 논쟁에 휩싸이기 일쑤였지만 살아생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냈다. 1884년 뮌헨의 로얄아카데미 명예회원이 되고 1892년에는 프랑스의 레전도네르의 임원이 되었으며 1898년에는 조각가, 화가, 세계협회의 초대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작품 세계 

 

 사실주의에서 유미주의로, 

 

 Rose and Silver: The Princess from the Land of Porcelain

1863- 64, oil on canvas, 199.9 x 116.1 cm

 

    휘슬러는 인상주의 시대에 활동했지만 쿠베르의 사실주의에 가까웠고, 서양화가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의 예술전통에 영향받았다. 그는 입체적 효과를 가져다주는 극명한 명암의 대조를 되도록 배제했으며 다소 평면적인 구성에 장식적인 효과를 강조했다. 이 작품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서양의 외모속에 일본인의 영혼이 살아숨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인간과 일본문화의 잔재들이 도무지 화합하지 못하는 어떤 평생선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휘슬러는 이 외에도 고드윈 건축가와 함께 주택과 가구를 디자인하는 일도 하는 등, 인테리어 장식의 기념비적인 작품, ‘Peacock Room’을 남겼다.

 

 Variations in Flesh’ Colour and Green The Balcony(1864-70), oil on wood

 

이 작품 역시 일본예술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휘슬러는 그림이 반드시 그림의 깊이를 환각적으로 보여주어야한다는 생각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평면적이면서 보다 순수한 장식스타일을 가미했다. 이같은 과도기적 변화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이 작품으로 화려하면서 절제된 미를 풍기고 있다. 이후 휘슬러는 18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보다 확실한 변화를 추구, moody한 밤풍경과 절제된 초상화를 그려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냈다.


 

               Symphony in White, No. 1: The White Girl, 1862,

                     oil on canvas,  84¼” x 42½”(214.7 x 108cm)


      실제인물크기보다 훨씬 크게 그려진 이 작품을 보면서, 잔인하게 박제된 늑대털 위에 선 창백한 여자가 어딘지 모르게 무척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창백한 손에 들려진 꽃은 힘없이 늘어져 있지만 그녀의 하얀 드레스는 오히려 볼륨감있게 그려져있다. 창백한 커튼 앞으로 창백한 목에 받혀진 그녀의 얼굴만이 혈색이 돌고 있고 유달리 검은 머리는 배경과 어울리지 못한 채 작품 위를 유유히 떠도는 느낌이다.  휘슬러는 모델에게 감정이 없는 표정을 주문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1863년 살롱으로부터 마네의 ‘Picnic’과 함께 거절됐던 작품이었다. 이 때, 유독 거절된 작품이 많아 화가들이 단체로 아방가르드풍을 경멸했던 심사위원들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섰고 살롱측은 화가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거절된 작품 700여점을 별도의 장소에 공개전시했다. 이중에는 휘슬러의 작품 뿐 아니라 마네, 피사로, 세잔의 작품도 있었다. 입구에 걸려진 이 작품은 마네의 작품과 함께 관중들의 조롱거리 대상이 되었다. 이유는 경박하고 저속한데다 평범하고 초보적인 실력이라는 것이었다. 

      런던과 파리의 살롱데레퓨제에 전시되면서 수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이 작품은 사실 화가의행로의 변경을 알려준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그는 이 때부터 자연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예술이 아니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색상의 배열이 보다 성공적인 예술이라고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이 유명했던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작품속 여자는 휘슬러의 연인이자 모델이었던 조안나였다. 휘슬러가 쿠베르와 친분을 쌓으면서 함께 작품활동을 하던 중, 조안나는 자연스레 쿠베르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쿠베르가 얼굴없는 초상화(L’Origine du Monde, The Origin of the World)라며 여성의 한쪽 가슴과 하체를 묘사한 그림을 그렸는데 그 모델이 바로 자신의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쿠베르와도 절교를 하고 결국 조안나와도 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Nocturne: Blue and Gold - Old Battersea Bridge, 1872-75, oil on canvas
                                          26 ¾” x 20” (67.5 x 51.8cm )

 

        휘슬러는 이 작품을 통해 구성과 그림작업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다. 즉 사물을 본 후 기억을 더듬어 구성하는 레코그의 방법을 사용해 장면을 기억해두고 실제 오브젝트를 보지않은 채  화판위로 실어나르는 방법으로 구성이 매우 단순화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휘슬러는 엷은 오일페인트로 반복해서 그리면서 대상물을 단순화하는데 노력했다.

 

 Chelsea Reach/The Thames, 1875, Pastel on paper, 7 x 10 1/4 in. (17.8 x 26 cm)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휘슬러는 크기가 작은 화판에 오일, 수채화, 파스텔, 에칭 등 다양한 메디움을 사용해 수시간만에 집중적으로 그려내곤 했다. 오늘날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작은 규모의 오일페인팅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 광범위하게 전시됐다. 한 콜렉터는 보기에는 손바닥 크기지만 예술적으로 대륙만큼 크다”, “작은 그림에 위대한 영혼이 담겨있다고 묘사할 정도로 그의 작품에는 영혼이 살아숨쉬고 있다.

 

 

 

 

 

출처 : 봄이오는소리
글쓴이 : 에드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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