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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창덕궁 / 낙선재, 부용지

조용한ㅁ 2011. 1. 5. 10:51

 

 

 눈 내린 창덕궁 / 낙선재, 부용지

 

 

낙선재 (樂善齊)

 

낙선재는 현종 13년(1847)에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집으로 낙선재는 현종의 사랑채와 침전으로

석복천은 경빈 김씨의 처소 수강재는 순원왕후의 처소였으며  낙선재는

 우리 이조 왕가의 마지막 왕손들이 슬픈 운명을 함께 한 곳이기도 하기에 창덕궁의 화려한 여러 내전을

 돌아 볼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발길이 머물곤 합니다. 눈내린 오늘은 더욱 쓸쓸함을 느끼게 합니다.

 

 

 

낙선재에서 마지막을 다한 조선왕족 일가의 면면을 살펴보면

 

★순정효황후 윤비

순정효황후 윤비는 순종황제의 비다. 서른 셋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그녀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중전다운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옥새를 감춰 두고 내놓지 않은 일이며, 한국전쟁 때 낙선재로 쳐들어온 인민군들에게

“이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 라며 호통쳐서 내쫓은 일,

 왕조가 무너지고 순종이승하한 뒤에도 일제에 항거하며 낙선재를 지켜낸 그 당당한 기품 등.....

 

또한 공산치하에서 어느 누구 하나 황후라고 돌보아주는 이 없는 혹독한 가난과 고독한

 피난살이에서도 황후로서의 자존심을 저 버리지 않고 끝내 낙선재를 되찾아

흩어진 왕족들을 기다리던 윤황후였다.

그녀는 왕조의 운명과 함께 침잠하는 자신의 운명을 불교에 의탁하기도 하였다.

한때 그녀는 성북동 흥천사 가까운 곳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그 절을 매일 찾아가 왕가의 며느리로서

 왕조를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를 했다.

 

흥천사에서의 기도 덕분이었는지 그녀는 이승만 정부와의 끈질기고도 외로운 싸움 끝에

 끝내 창덕궁 낙선재를 도로 찾아 일본에 있던 영친왕 내외와 덕혜옹주를 불러들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미약하나마 자신의 몫을 다하려 했던 조선의 마지막황후 순정효황후는

1966년 낙선재 석복헌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만다.

 

★영왕

영왕 이은(李垠)은 1897년 생으로 고종의 3남이며 순종의 동생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서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후, 1920년 일제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강제로 일본

황족의 딸(이방자 여사)과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영왕의 귀국은 광복이 되었어도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63년 12월에야 가능하게 되었으나 이미 말을 못하고

 게다가 기억상실의 상태였다. 그 후 7년간 병원치료도 헛되이 1970년 낙선재에서 눈을 감았다. 홍유릉에 안장되었다.

★영왕비 (이방자 1901-1989)

일본 동경 출생. 황족의 장녀로 태어나 1918년 학습원을 졸업하고, 20년 당시 일본에 인질로 가 있던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과 결혼하였다. 이 두 사람의 결합은 조선과 일본의 융합이란 차원에서 계획된

 경략결혼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후, 1947년에 지정된 신헌법에 의하여 왕족신분을 상실한 두 사람은

무국적 상태로 있다가 63년 한국적( 韓國籍)을 취득하여 귀국하였다. 1970년 남편 이은 과 사별한 후 한국에 남아

 부군의 뜻을 이어 신체장애자를 위한 〈명휘원(明暉園)>과 정신지체아를 위한

 <자혜학교(慈惠學敎)>를 세워 사회복지활동을 하였다.

★이구 (李玖; 1931- 2005)

영왕과 이방자여사의 2남으로 태어난 이구씨는 조선의 마지막 황세손으로서 일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단독으로 도미(渡美)하여 MIT공대를 졸업하였다. 직장동료였던 줄리엣여사와 결혼하였으나 한국에 돌아온 후

 왕실의 품위를 그르쳤다는 질타 속에 파탄을 맞게 되었다. 이방자여사가 돌아가신 후 한국을 떠나셨으나

 1996년 영구 귀국하셔서 부암동에 거처를 정하기도 하였으며 2005. 7. 16 일본에서 사망 하였다.

 

★덕혜옹주(1912-1989)

덕혜옹주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녀이다.

고종이 나이 환갑에 귀인 양씨로부터 얻은 외동딸로서 왕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지냈다.

그러나 1925년 12세에 동경유학을 빌미로 일본으로 끌려갔고 17세가 되던 1929년 어머니마져

 돌아가시게 되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병을 얻게 되었다. 병세가 호전되던 20세에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아들과 강제로 결혼하고, 결혼생활 3년만에 그동안의 시련으로 심한 우울증에 실어증까지 겹쳤다.

 폐인이 된 몸으로 1962년에 환국하여 낙선재에서 1989년 운명하기까지 끝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성정각(誠正閣)


원래 이곳은 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며 '서연(書筵)'을 열던 곳이다. 그러나 1920년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인정전 서편에 있던 내의원을 이곳으로 옮겨 사용했다

 

 

 

 

 

 성정각 일원은 세자가 일상 생활을 하던 동궁이 있던 곳으로 성정각과 낙선재 사이 후원으로 넘어가는

넓은 길에는 중희당(重熙堂)이 있었고,성정각은 세자의 교육장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는 내의원으로 사용 되기도 했다.

 

 

 

 

 

 

 

 

성정각은 단층이지만 동쪽에 직각으로 꺽인 2층의 누가 붙어 있어 독특한 모습으로 누각 남쪽에는 

보춘정(報春亭), 동쪽에는 희우루(喜雨樓) 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임금의 몸을 보호하고 임금의 약을 잘 짓는다는 뜻의  보호성궁(保護聖躬), 조화어약(調和御藥)이란 현판

 

 

 

 

 

성정각 뒷편에 있는 관물헌은 왕이 종종 머물면서 독서와 접견을 했던 곳으로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결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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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지(芙蓉池) 일원

 

부용지는 가로 29.4m 세로 34.5m 이며, 네모난 연못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인 우주관을 구현한 것이다.

 

부용정 쪽 장대석에는 물을 박차고 오르는 물고기의 역동적인 모습이 양각되어 있다.

 이 물고기를 통해 상징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는 '잉어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 용이 된다'는 등용문 설화의 상징이다.

이곳 영화당 앞마당에서는 실제 과거시험이 치뤄졌던 만큼, 과거에 급제해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을

잉어가 용이 되는 것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고기가 양각되어 있는 장대석 맞은편에 위치한 어수문은 곧 등용문에 비유된다.

 어수문 문설주에 투각되어 있는 황룡과 청룡은 잉어가 등용문을 올라 용이 됨을 암시한다고 한다.

 

 궁궐의 문설주에 용을 새겨넣는 장식하는 예가 없음을 볼 때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물고기와 물의 관계'로 비유되는 군신관계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신하들 역시 왕의 뜻 안에서 뜻을 펼치고 활약을 하라는 의미이다.

 한편 영화당 상량문에서는 "어수(魚水)를 즐김은 명랑(明朗)한 신하를 만나 같은 덕은 구함"라고 쓰여 있다

 

 

 

 

 

 

부용정(芙蓉亭)

 

연못 남쪽에 위에서 봤을 때 열 십(十)자 모양을 이루는 정자가 있는데,

초석 2개가 연못에 들어가 있다. 이 정자는 원래 숙종 33년(1707)에 ‘택수재(澤水齋)’를 지었다가

정조 16년(1792)에 부용지를고치면서 ‘부용정(芙蓉亭)’이라 불렀다.

연못 안에 팔각 석주를 세운 다음. 그 위에 목재를 얹어서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누각을 지었다. 연못을 향한 쪽마루에는 계자난간을 둘렀고, 반대편에는 평난간을 둘렀다.

정자 안은 네 개의 방을 배치했는데, 배면의 방이 다른 방들보다 한 단계 높다. 연못 쪽으로 난 창에는

완자살창을, 너머지에는 띠살창을 달았다.

 

이곳에서 왕이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축하해 주기도 했는데, 1795년 수원 화성을 다녀온 정조가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고 전한다.

사계절마다 변하는 주변 경치는 창덕궁 후원을 보는 이들에게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어수문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魚水門)은 건물이기보다는 정교한 목공예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구법과 조각읭 세밀한 정도가 뛰어나다

 

 

 

 

 

 

 

 

 

 

 

 

 

 

 

 


주합루

주합루를 처음 세운 것은 정조 원년인 1777년으로 아래층에는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이 있고

그 위층은 열람실로서 사방의 빼어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눈내린 창덕궁 / 낙선재,부용지

 

눈내린 고궁의 설경을 보고싶은 마음에 창경궁을 거쳐

부지런히 창덕궁으로 들어섭니다.후원 입장 시간이 30여분 남은 시간 낙선재와 동궁터를 돌아 봅니다.

이조 500년의 마지막 왕손들과 애환을 함께 했던  낙선재를 돌아 볼때마다

기구한 운명의 삶을 살았던 왕가의 후손들에게 남다른 연민의 정이

느껴 지곤 하는 것은 백야의 마음만은 아니리라...

 

낙선재를 돌아 후원 입구로 가는 길에 세자의 생뢀 공간이였던

동궁터의 성정각을 돌아 보고 부지런히 시간에 맞춰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후원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맞아주는 부용지의 부용각이 운치를 더합니다.

맞은편의 주합루와 수어문.... 우측의 화려한 단청의 영화당이 어우러져 더욱 스럽기만 합니다.

 

조선시대 문화의 화려한 전성기를 꽃피웠던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이곳 부용지에

규장각(왕실 전용 도서관)을 설치하여 인제를 모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혁신 정치를 펴고...

부용지에 자리한 주합루의 1층은 규장각으로 아름다운 후원을 거닐면서 왕과 신하들이

 글도 짓고 나랏일을 의논도 했던 모습을그려보면서 눈덮인 부용지를 돌아 봅니다.

 

왕의 휴식 공간인 영화당의 앞마당 춘당대에서 임금이 참석하여 과거 급제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고 하니 그 옛날 과거 시험을 보기위해 전국 곳곳에서 한양으로 올라온 선비들이

얼마나 긴장하며 깊숙한 후원에서 과거를 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지난달 곱게 물들었던 가을 단풍의 모습과 달리 살짝 눈이 내린  풍경의 부용지 일원을 돌아 보고

애련지와 옥류천쪽으로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 합니다.

 

  첨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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