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20년 전에 내가 받은 한 통의 편지를 여기에 참고삼아 소개해본다.
편지를 주신 분은 예순 살 정도이셨던 것 같다.
깨끗하고 잘 쓴 글씨의 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적혀 있었다.
그 분은 1년 전 사랑하고 존경하던 남편을 폐암으로 잃었다.
남편의 긴 투병 중 점점 쇠약해가던 말기의 어느 하루,
옆에서 간호하던 자기에게 남편이 종이 한 장을 내밀며
언제 한번 시간이 날 때 읽어보라고 했다.
그때는 정신도 없고, 환자와 함께 자신도 피곤하고 침울해져 있던 때라,
그러마고 말만 하고 잊고 지냈다.
그 얼마 후 남편이 죽고 장례를 치르고 남편의 유품과 병실에 남아 있던 물건을 태우고
정리하던 중에, 갑자기 남편이 죽기 전에 자기에게 전해준 그 종이가 나왔다.
그 종이에는 남편이 직접 쓴 시 한편이 적혀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시가 바로 내가 쓴 시였다는 내용이었다.
- 시인 마종기 -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시집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 지성사 1980)
바람이 전하는 말
- 조용필
내 영혼이 떠나간 뒤에
행복한 너는 나를 잊어도
어느 순간 홀로인 듯한
쓸쓸함이 찾아올 거야
바람이 불어오면 귀 기울여봐
작은 일에 행복하고 괴로워하며
고독한 순간들을 그렇게들 살다 갔느니
착한 당신 외로워도
바람 소리라 생각하지마
너의 시선 머무는 곳에
꽃씨 하나 심어놓으리
그 꽃나무 자라나서
바람에 꽃잎 날리면
쓸쓸한 너의 저녁 아름다울까
그 꽃잎 지고 나면 낙엽의 연기
타버린 그 재 속에 숨어 있는 불씨의 추억
착한 당신 속상해도
인생이란 따뜻한 거야
가수 조용필이 부른 '바람이 전하는 말'이라는 노래는 가사가 이 시와 흡사해서
마 시인의 시를 표절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기도 했다.
그에 대해 노래를 직접 작사한 양인자 씨는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바람이 전하는 말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80년도초 MBC 방송국에서는
사랑의 수기모집을 해서 그 수기를 바탕으로 라디오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그 작업을 많이 했던 저는 그 수기 속에 나오는 말들을 정리해서
주제가를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마종기 시인의 시와 흡사한 것을 알고 마 선생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선생님은 이해하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