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그림들/외국의화가의 작품

모딜리아니

조용한ㅁ 2012. 10. 1. 18:24

 


모딜리아니


 

 

 

천재화가 모딜리아니가 병으로 운명하자 잔느는 이틀 뒤 8개월된 아이를 임신한 채 아파트에서 투신해

자살하고 만다. 우리에게는 모디의 수 많은 여성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만 회자되어오던 그녀의

이름이 세간에 알려진 건 불과 10년이 채 안 된다. 그러나 그녀의 기묘한 눈빛과 신비한 매력은 모디의

대표적인 초상화를 통해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하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목이 긴 여인. 그녀가 바로 모디

초상화의 대표적인 주인공, 잔느 에뷔테른이다.

 

잔느는 15살의 어린 나이에 화가를 꿈꾸며 미술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옷과 장신구를 직접 디자인 할 만큼 예술적인 재능이 충만한 소녀였다. 18세의 나이에 이미 32세 모디의 예술적 재능을 인지하고 존경했던 그녀는 14세 연상의 모디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죽을 때까지 그의 예술적 동료와 연인이 되었다.

그녀에게 모디는 예술적 스승을 넘어서 삶 자체였고 그가 더 좋은 작품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던 강인한 희생정신과 성숙함을 지닌 여인이었다.

잔느를 단지 모디의 수 많은 여인 중 한 사람으로 조명하는 것으로 그치기에는 그녀의 그림에 대한 욕망과 열정이 남달랐다. 어릴 때부터 드로잉에 재능을 갖고 있던 그녀는 오빠의 권유로 가난한 예술가들의 장소 몽파르나스로 옮겨와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공부한다. 

초기에는 거친 붓 터치와 강한 색상을 사용해 주로 풍경화나 정물화 작업하는 야수파 적인 작업을 하다

가 모디를 만나면서 서로의 예술적 지향점이 유사하다는 것을 터득하고 인물화 위주의 작업으로 전환

한다. 2000년 10월 베니스에서 열렸던 몽파르나스 화가들의 그룹전시 <Modigliani and his circle>

에 처음으로 그녀의 작품이 소개되었는데, 당시 몇 점의 정물화 및 풍경화를 제외하고 대부분 생생한

성적묘사가 두드러진 셀프 누드화였다.


이는 작품 제작 당시의 예술계에서 금기시되었던 과감한 성적묘사로 부르주아 질서를 위반하는 것이었

다. 혹자는 기존의 사회적 통념이나 예술계의 정형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과감하

게 표현한 그녀의 작품에 여성주의적 도해법을 적용시킨다. 당시 남성의 시각을 통해 표현된 여성누드

의 전형적인 표현방식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여성 스스로 자신의 누드를 거침없이 표현하였다는 데 당

혹함을 느꼈을 것이다. 모디의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여성으로서만 알려져 있던 그녀는 사실은 넘치는

예술적 에너지와, 자신이 선택에 대해서 후회 없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이었던 것이

다. 모디를 통해 사랑에의 욕망을 채우고, 예술적 영감과 지적 자극을 얻고자 했던 그녀에게 모디의 죽

음은 결국 자신의 죽음과도 같았을 것이며 이는 어쩌면 필연적으로 그녀를 자살로 몰아갔을 것이다. 
희생적이고 수동적이며 순종적이라는 나약함 때문에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와 영원한 사랑을 꿈꾸었던 짧은 기간의 강렬한 기억과, 또 다른 자아로서의 모디의 부재에서 오는

고통과, 영원한 그의 모델이고자 했던 욕망은 그녀의 자살을 더욱 아름답고 애잔하게 만드는 요인일

것이다. 모디가 신체적 결함과 정신적 불안정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때 그녀의 강인함과 인내력,

희생정신은 지금의 모디를 존재하게 만든 몇 점의 여인초상화를 그리는데 기여한다. 공허한 눈빛에

소용돌이치는 그녀의 욕망과 열정은 모딜리아니라는 천재화가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Jeanne Hebuterne

                                            * Jeanne Hebuterne 

 

                    Amadeo modigliani 가 그린 '잔느'의 초상화들

 

                            

 

 

Jeanne Hebuterne (1917-8) 

 

 

 

                            

 

 

                                                               

              

 

                                                 

            

 

1917년 7월 어느 날 그는 가난 속에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서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고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잔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숙명의 여인은 그 때 갓 열아홉 살이었고, 
모딜리아니는 서른세 살이었다. 잔느는 그 동안 모딜리아니가 만난 
모든 여인 중 가장 믿을 수 있고 헌신적이며 가장 순정적인 여자였다. 



[그림]Amedeo Modigliani ◈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7) 




한 모델을 대상으로 여러 점의 작품을 남겨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모딜리아니
평생을 모딜리아니의 곁에서 모델이 된 여인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그의 아내 쟌느

모딜리아니의 부모는 유태인으로 스스로 유태인임을 자랑스러워 했고
잔느의 집안은 독실한 카톨릭 집안이었다.
사랑했으나 부모들의 반대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채 잔느는 사랑하는 그를 따랐다.



[그림]Amedeo Modigliani ◈ Portrait of Jeane Hebuterne, Left Arm behind Head (1919) 





20세기 초엽 인상주의 물결이 휩쓸던 유럽에는 많은 화가들이 파리에 모여들었다. 
새로운 시각이 고정된 형태나 관념을 탈피해 다양한 형태(양식)로 시도되는 시기였다. 
고전적인 초상화의 틀에서 벗어나 왜곡된 얼굴의 형태(유달리 길다란 목과 얼굴)속에서도 
우수에 찬 표정에 담겨져 있는 인물의 심성을 반영하는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파리의 몽마르뜨나 몽파르나스지역에 모여 활동하던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 파리파) 사이에서도 로맨티스트로 
유명했던 모딜리아니를 사랑했던 쟌느는 `얼굴이 길어 슬픈 여인' 
이라는 그만의 캐릭터를 완성시키는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목이 길쭉한 인물 스타일은 아프리카 원시 조각이나 모딜리아니가 
활동하던 시기에 유럽에서 유행한 일본의 우끼요에서 영향을 받고, 
세잔느와 입체주의가 가미된 그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림]Amedeo Modigliani ◈ Little Girl in Blue  (1918)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와 쟌느 사이에 여자 아이가 생기기 
얼마 전에 그려진 것이다. 웨르나의 해석에 의하면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의 이웃에 살고 있는
하층 계급의 어린이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을 많이 그렸으며 이것은 그 가운데의 하나이다. 

이 꼬마아이는 고운 옷을 입고 있는데, 아마 단벌 옷일 것이다. 
소녀의 얼굴은 밝지도 쾌활하지도 않다.그녀의 표정은 
훨씬 연상의 다른 모델들의 경우처럼 쓸쓸하고 체념마저 하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어린이들의 그림은 참다운 자애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이 소녀는 천진 무구하지만 애처로움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는 화면을 통해 
우리는 모딜리아니의 진심을 엿볼 수 있으며, 깊은 애정을 함께 느낀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The Servant Girl (La jeune bonne,1918) 





파리라는 도회지로 나온 시골 처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녀라는 직업이며, 이런한 유형은 동. 서가 같다. 
하루 종일 허름한 옷차림으로 근면하게 일 해야만 되는게 이들의 인생이었다. 

특히 유럽인들의 사람 씀씀이는 고약할 정도로 가차 없고 지독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일들, 어린애를 돌보고 
주부의 잔심부름을 도맡고 하는 것을 묵묵히 감당해 낸다. 
이들을 프랑스 말로 본느라고 부른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살고 있는 애환의 표정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이웃을 사랑했고 그가 즐겨 그린 서민의 한 표정을 
그녀는 대표하고 있다. 이 모델은 카뉴슐멜 출신이며, 
마리훼레라는 이름의 처녀였다.그녀의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이 젊은 처녀의 삶을 모딜리아니는 공감했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9) 



이그림은 2004년 소더비경매에서 
3130만달러(347억6000만원)가 넘는 가격에 익명의 입찰자에게 팔렸다. 


 ... 너의 영혼을 알게될때 눈동자를 그릴 수 있어..


1919년 무렵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화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잔느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좋아진 상황과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모딜리아니는 작품에 대한 열정과 끝없는 음주벽을 놓지 못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잔느 에뷔테른느>(1919년작)는 이때에 그려진 것이다. 
임신한 잔느의 모습은 왠지 처연하다. 그 눈동자 없는 눈은 
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담아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사진의 인물작품에서 눈동자를 표현하지 않은 점은 매우 특이한데
오히려 푸른색만으로 표현한 눈의 표정은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영원으로의 응시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Nazareth ◈ Love Hurts 

 

 

               

        모딜리아니는 지중해 문화권에 속하는 유태인 가정에서 1884년 7월 24일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 리브른느는 피렌체 남쪽의 포구였다. 
        소학교 시절의 모딜리아니는 성적은 보잘것 없었지만 
        그림을 잘 그렸고 어렸을 때는 잔병치레에 폐결핵까지 앓았다. 
        이 때에 앓은 결핵이 파리의 보헤미안 시절에 
        재발하여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본격적인 미술수업은 1898년 리브른느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 
        풍경화, 정물화, 누드화를 배우는 것으로 시작됐다. 
        누드화에 특히 재능을 보인 그는 1902년 5월 7일 피렌체에 가서 
        아예 스콜라 디누도(누드학교)에 등록했다. 여기서 그는 누드화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는 한편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 마르미지아노의 그림에 심취했다.

        1903년 3월에 모디는 베니스로 옮겨 같은 계통의 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유명한 미래파의 아르덴고 소피치와 
        움베르도 보치오니 같은 동료화가도 만났다. 


        남쪽의 태양과 예술을 찾아 온 북구의 처녀들을 사귀면서 
        젊은 카사노바 같은 절제 없는 생활도 향유했다. 
        후에 베니스에서 배운 습성, 티치아노와 지오르지오네의 
        나체화들이 그의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준다. 

        1905년 돈을 대주던 외삼촌 아메데오 가르씨니가 죽자, 
        모딜리아니는 현대화의 메카인 파리로 향한다. 
        몽마르트에서의 모딜리아니의 삶은 보헤미안 그 자체였다. 


       


      [그림]Amedeo Modigliani ◈ Nude with Hat (1907-8) 





      돈이 없는 데다 그림마저 팔리지 않아 호텔에서나 하숙집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그림을 전당잡히다 번번히 쫓겨났으며, 
      때로는 몰래 빠져나가 집을 옮기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때의 그림은 희귀하다. 
      파리에서의 삶은 외로움과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멕시코에서 온 리베라, 소련에서 온 수틴, 자크 립시츠, 키슬링, 
      막스 자콥과 주로 어울려 다녔다. 캔버스 살 돈이 없어 
      캔버스의 앞과 뒤 양면에 그림을 그리고 물감도 절약했던 때였다. 

      1908년에 완성한 Nude with Hat는 절망과 불안, 성적 충동과 갈망으로 
      초조한 화가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그림]Amedeo Modigliani ◈ Blonde Nude (1917) 





      수많은 여성들이 그의 삶 속에서 명멸해 갔다. 
      모딜리아니에게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룻밤의 고독과 자살 충동을 이기기 위해 소모품처럼 써버린 
      많은 요정들이 그의 예술혼과 끈끈하게 관계되어 있었다. 
      대개의 그 여성들은 그의 작품 안에서 익명으로 존재하며 
      과장된 풍만함으로 여성성의 일부만을 강조해 표현되어 있다.

      모딜리아니의 다른 나부와는 달리 이 서 있는 알몸의 여성은 
      잔잔한 정감이 마치 여울물의 흐름같은 파문의 무늬로 숨쉬는 것만 같다.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여자의 나체란 단도 직입적인 관능의 외모도 아니며 
      여러 가지 기복으로 무겁게 덩어리짓는 복잡한 조형도 아니며 
      그것을 통해서 감지하게 되는 생의 풍요 혹은 그 찬미였는지도 모른다. 


       


      [그림]Amedeo Modigliani ◈ Madame Pompador  (1915) 




      이그림은 실제 퐁파두르 부인을 모델로 해서 그린 게 아니라 
      모딜리아니와 동거했던 (1914~16) 베아트리체를 그린 것이다. 
      영국 여성인 베아트리체가 몽파르나스에 나타난 건 
      제1차 대전이 발발하던 해였으며, 
      사람들은 그녀를 런던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결코 미인은 아니었지만 모딜리아니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의 천재성을 개화시킨 숨은 공로자이다. 
      모딜리아니보다 5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그의 사기를 잘 참아 주었다고 한다. 

      그가 광분하면, "모딜리아니, 명심해요, 당신은 신사라는 걸. 
      당신의 어머니는 상류 사회의 부인이라는 것을 ."
      하며 타일렀으며, 
      이 말은 주문처럼 모딜리아니의 광기를 가라앉혔다고 한다.
      그럴듯하게 모자를 쓰고 마치 귀족처럼 차린 이 그림을 
      퐁파두르 부인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들의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의 정경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그림]Amedeo Modigliani ◈ Portrait of Beatrice Hastings (1916) 





      첫번째 연인 베아트리체와 헤어진 1916년과 부인 잔느 에뷰테른을 만나게 되는 
      1917년 사이에 모딜리아니는 그의 걸작 누드화에 나오는 많은 모델들을 만난다. 
      그의 새 모델들은 가수와 댄서, 젖짜는 시골 처녀들 같은 건강한 여인들이었다.
      이미 건강을 잃고 죽음에 다가가던 그는 건강과 생기가 넘치는 
      젊은 육체의 윤기와 탄력성과 매력을 흠모하면서 누드를 그렸음데 틀림없다. 
      여하튼 이 때에 그린 누드는 미술사상 걸작들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Seated Nude (1917) 



       



      Seated Nude는 잔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대개의 모딜리아니 그림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단아하고 깊은 우수에 찬 눈을 갖고 있다. 
      이 그림에서도 예외없이 아름답지만 슬픈 그녀의 표정을 우리는 놓칠 수 없다. 
      앙다문 입에서조차 의지를 읽기보다는 세상을 관조하며 
      마주앉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그녀의 깊은 눈으로 인해 

       

      * 그들의 이야기

       

      천재화가 모딜리아니와 그의 작품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와 그의 연인들, 
      특히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잔느 에뷔테른과의 관계를 둘러싼 수 많은 에피소들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왔다. 이로인해 픽션으로 밝혀진 일화들 조차도 수 년간 여러 이야기들로 미화

      된채 회자되면서 이제는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해진 채 영화속 연인처럼 살다간 비운의 주인공

      으로 포장되어 다양한 텍스트들속에서 수 많은 인용구들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욕망은 그들의 이야기를 보다 더 애절하게 만들어 그들의 사랑을 이 시대 마지막 비극

      적 로맨스로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과 지속적인 사랑이 만들어낸 거짓 일화들

      속에도 실제로 그들의 삶이 소설 속 주인공처럼 느껴질 만한 운명적인 일화들이 있다.

       

      15살의 나이에 이미 화가의 꿈을 지녔던 어린 잔느는 몽파르나스의 가난한 예술가들과 교우하며, 때론

      그들의 모델이 되어주며 미술학교를 다녔다. 수업후에 잔느는 카페 로통드에 자주 들르곤 했는데, 어느

      날 깔끔한 코듀로이와 붉은 스카프를 두른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니를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물론

      모딜리아니는 그녀를 인식하지 못했지만 잔느의 기억속에 그는 이미 ‘잔느 타입’의 어떤 사람이었던

      것이다. 1917년 어느 조각가에 의해 둘이 본격적으로 소개를 받기 전까지 잔느에게 있어 모딜리아니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공원에서나, 카페에서나, 여러 번 마주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마치 우리가 항상 알고지낸것만 같아..우린 정말 닮았어…” 

      1917년 봄, 조각가 Chana Orloff는 어느날 화가들의 모임에서 모딜리아니에게 잔느를 소개한다.

      잔느를 처음 본 순간 모딜리아니는 어떤 전율같은 것을 느꼈고, 그녀의 유난히 조숙한 모습과 반항기,

      정의할 수 없는 기묘한 눈에 매료되었다고 한 지인에게 전했다. 

      1916년 몽파르나스에서의 가난했던 시절, 그의 열렬한 후원가였던 즈보로프스키는 그랑쇼미엘 8가에

      있는 빌딩 꼭대기에 모디와 잔느의 작업실을 내어준다. 1917년에서 2년간 잔느는 수업이 끝나면 작업

      에서 그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물론 이때도 그의 여성편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또

      다른 여인들을 모델로 삼아 작업실로 끌어들였으며, 여전히 친구들과 술자리를 즐겨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여성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도 잔느는 크게 흥분하거나 화를내지 않았다. 그에게 타모델들과 맺

      는 관계는 예술적 영감으로서 불가피한 것이라고 이해했고, 그것을 통해 그의 그림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기를 보다 더 바랬기 때문이었다.

       

      어릴때부터 폐결핵을 앓던 그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자 즈보로프스키의 권유로 둘은 니스해변가로 요양

      을 가게된다. 거기에서 본격적으로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으며, 이 시기 모딜리아니의 대표적인 초상

      화들이 가장 많이 탄생한다.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딸 잔느 모딜리아니가 태어난 것도 니스에서였으며,

      목이 긴 여인으로 유명한 몇 점의 초상화들을 제작해 잔느에 대한 그의 애정이 남달랐음을 보여주는 곳

      도 니스였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도 잠시, 아이가 태어나고 생활고에 쫓기던 모딜리아니는 또 다시 방탕

      한 삶에 빠졌고, 성격도 점점 괴팍해져갔다. 결국 2년이 채 못되어 다시 파리로 돌아와야했고, 이때 이

      미 그의 건강상태는 극도로 악화되어었다. 돌이킬수 없는 건강 때문에 불안함과 분노 사이를 오갔던 그

      의 정신상태는 잔느에게도 불안함을 안겨준다. 도와주는 이도 별로 없고 재정적인 지원도 전무한 상태

      여서 별달리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그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다시피 도움을 요청했다.

       

      그가 취중에 난동을 부리기라도 하면 경찰서에서 그를 찾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겨우 몇 명의 도움으로 그가 입원해 있을 때 인근 여관에서 숙박하던 잔느는 베개밑에 면도칼을 
      두고 잠들었다고 한다. 가올 그의 죽음에 대해 그녀 역시 조금씩 죽음을 준비했던 것이다. 
      이때 그녀는 스스로 자살하는 그림을 그리는 등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병약했던 상태였다. 
      병원에 실려간 모딜리아니는 입원 3일 후 사망한다. 사인은 결핵형 늑막염이었다.


      그리고 근 이틀이 지난 1920년 1월 26일 새벽, 잔느는 가족과 함께 머물던 아파트 5층에서 창문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그때 그녀는 8개월된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충격에 휩싸인 잔느의 가족들은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관계를 부정하고 원망하면서 둘의 시신이 함께 
      묻히는 것을 반대한다. 그러나 수 많은 지인들의 요청으로 10년 뒤 결국 모딜리아니가 묻힌 페르라셰

      즈 묘지에 잔느의 시신을 뉘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지독한 사랑과 욕망, 그림에 대한 열정은 수 많은 지인들에게 회자되고, 그들의 추억이 되어, 
      여전히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수 많은 사람들에게 ‘화가와 여인’의 대표적인 사례로 전해져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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