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그림들/외국의화가의 작품

피에르 보나르 (Pierre Bonnard, 1867 ~ 1947)

조용한ㅁ 2013. 1. 25. 11:39
피에르 보나르 (Pierre Bonnard, 1867 ~ 1947)
 
 
 
"처음에는 그의 눈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의 눈....
보나르는 이야기를 나누며 사물들을 음미한다.
그는 항상 소심해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태도일 뿐이다.
그의 말에는 순진한 망설임이 있지만 중요한것은 어조가 아니라 사상이다."
(L.베르트)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890년경의 보나르..
 
그의 나이 스물세살..
소심한듯 여리게 생긴
무언가 눈으로 이야기하는 듯한 그의 얼굴에 반해버린...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예술가의 초상> 1889
 
보나르의 첫 번째 작품은 눈빛이 강렬한
<예술가의 초상> 이다. 이 작품을 그렸을때 보나르의 나이는 스물두살이였고
쥘리앙 아카데미의 학생이였다.
 
학교 성적이 우수했던 보나르는
국방부 관리인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법학을 전공한뒤
잠시 관청에서 근무하기도 했지만,
재능을 버리지 못하고 에콜 데 보자르와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그림공부를했다.
 
이 시기에 만난 발로통, 뷔야르 등과 '나비파'를 꾸려나가며 이 그룹의 주도적인 위치에 서게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정원의 여인들> 1890
 
이 네장의 패널들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마치 단숨에 그린듯한 유연한 선들...
 
보나르는 일본 판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일본 취향이 강해 '자포나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정원의 여인들에서 볼수 있는 규칙적인 물방울 무늬, 바둑판 무늬 역시
직물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취향을 떠올리게 한다.
 
 
"저는 백화점에서 몇 푼 안 주고 놀라운 색채의 크레이프 천이나 구겨진 쌀종이를 구했고,
제 방벽들을 그 천진난만하고 요란한 판화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저는 그 투박한 이미지들을 접하면서 입체감이나 기복은 없어도
거기서처럼 색채가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잇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빛과 형태와 특색을 명암과 농도의 도움없이
 오직 색채만으로 표현해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보나르가 가스통에게
1943년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붉은 바둑판 무늬의 식탁보 >1912
 
이 그림은 그의 천재적 재능을 잘 보여준다.
마르트와 애완견 블랙, 그리고 그림의 2/3을 차지하는 식탁보..
 
이 매력적인 식탁보는 보나르 예술의 가장 큰 특색인 바둑판 무늬로 그려졌다.
 
식탁의 둥근 형태와 식탁보 위에 또 하나의 불균형한  원주를 그리는 사물들의 배치 방식은
구성이 모든 것의 열쇠라는 그의 관찰 감각을 잘 보여준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역광 속의 나부> 1908
 
내가 매번 놀라는 것은 보나르의 색채 선택이다.
물론 다른 화가들에게서도 그러한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이토록 빛깔에서 향기가 나는 화가는 드물다.
 
나른하고 몽롱한 빛 ..그리고 타오르는 듯한 색채의 조화.
 
 
 
보나르와 그의 영원한 모델 마르트...
 
보나르가 마르트를 처음 만난것은 1893년.
 보나르의 나이 26세, 마르트의 나이 24세 때였다.
 
그녀는 평생 자신이 꾸민 상상의 세계에서 살았으며
보나르에게 있어서 그녀는  함께 살면서도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하나의 비밀이었다.
그녀의 본명이 마리아 부르쟁이라는 사실을 보나르는 무려 32년 후에 혼인신고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어느 누구와의 접촉도 회피하는 신경 쇠약 증세를 보이던 마르트를 위해
보나르는 그녀와 함께 자주 여행을 떠났으며 목욕을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주로 온천을 목적지로 삼았다.
 
 그러나 심신이 쇠약했던
가녀린 그녀는 결국 보나르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보나르는 그녀의 침실 문을 잠그고 다시는 열지 않았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는 집에서 압핀으로 그림들을 벽에 고정시키고 작업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전에 대단한 준비는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를 위축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는 저의 화포가 틀에 못으로 고정되면 거북합니다"
 
 
 
 
 
======================================================
 
 
"가능한 빨리 당신을 사로잡은 것 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뒤를 이어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간단한 색채를 얻고
그 주위에 하나의 그림을 구성합니다.,
 
색채에 대한 논리는 형태에 대한 것 만큼 정확합니다.
처음의 인상을 표현해 내기전에는 긴장을 풀지 말아야 합니다."

 

  

 

 

 

 


Pierre Bonnard ◈ Self-Portrait (1945 )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1867~1947)는 프랑스 파리 근교
퐁트네오로즈에서 아버지가 육군성의 관리인
중산계급의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대학의 법학부에 적을 두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1
887년 미술학원 아카데미줄리앙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모리스 드니를 만나 나비파(Nabi·예언자)를 결성하고
평면적 장식화풍을 선보였으며,무대장치 포스터 삽화 판화 등을 발표하였다.

1900년대 들어 뷔야르와 함께 앙티미즘(Intimism·실내정경이나
일상생활의 주변에서 주제를 구해 사적인 정감을 강조하는 화풍) 화가로 불리어짐.
1909년 이후 색채화가로서의 면모를 보여 센강 유역이나
남프랑스의 풍광과 지중해적 빛의 조화와 서정에 충만한 생활 정경을 그렸다.

한 미술사가의 통계에 의하면 색채의 마술사 피에르 보나르의 >

그림에 나오는 마르트 부르쟁( Marthe Boursin 1869~1942)의

이미지만 무려 384점에 이른다고 합니다 >

보나르의 나이 26세 때 처음 만난 마르트의 나이는 24세 >그들은 새와 새장의 관계로

한평생을 자신이 꾸민 >상상의 세계 속에 깊이 침잠해서 살았답니다.

처음엔 단순히 모델로 적격이라는 차원이었지만

신분-장례용 조화를 만드는 가게의 점원- 뿐 아니라

이름까지 속이며 자신에 대한 환상의 세계에 숨어드는데 익숙한 그녀가 맘에 들어 늘 곁에 두고

그녀를 그리며 연인으로 뜨거운 사랑은 나눴지만 공식적인 반려로 삼지 않고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것은 1925년이었다니 무려 32년간 예술을 위해 한 지붕 아래 함께 살고

일하면서도 합법적인 부부의 연은 맺지않았답니다.

보나르로 하여금 앵티미스트(Intimist) 란 별명을 얻게 한 것도  마르트의 남다른 목욕 취미등

그녀의 사생활을 깊이 사랑하고 즐겼기 때문이라지요 .

말년까지 그녀의 정신질환을 위하여 온천여행도 자주하는 배려를 했지만 결국 결핵성 후두암 때문에

세상을 먼저 떠나자 그녀의 침실 문을 잠그고 다시는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소의 주인이 사라졌으니 그 공간을 바라보는 것마저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거라고...

새를 잃은 새장 주인의 심사가 그대로 묻어나는 일화가 아닐수 없다 했네요.

 

화가 '피에르 보나르'는 평생 동안 한 여인과만 살았다.
그리고 그 여인의 모습은 보나르의 400여 장의 화폭에 끊임없이 등장한다.
마치 그의 일과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 뿐이라는 듯.

그녀의 이름은 '마르트'. 그러나 그녀가 어디서 왔으며,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보나르조차도 그녀의 원래 이름이
'마리아 부르쟁'이라는 것을 같이 산 지 32년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알게 된 이유는 혼인신고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Model in Backlight (1907)

 

 

 


                                               La Toilette (1932)

 

 

 


                                  휴식 (1900)

그가 스물 여섯 살이던 해 파리의 어느 거리에서 만난 마르트는
스물 네 살의 창백한 새 같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고
타인과의 어떠한 교감도 원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그녀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을 뿐이었다.

일종의 자페증상으로 가까운 거리에 나갈때도 양산으로

얼굴을 가리려 했던 여인이였다..

<휴식>이라는 그림은 보나르의 초기작으로
깊은 잠에 빠져있는 마르트의 누드를 그린 것이다.
 흐트러진 침대 위와 엎드려 자고 있는 마르트,
그리고 바닥에서 역시 곤히 자고 있는 강아지.
이 모든 것은 묘하게도 조화를 이루어
나른한 오후 3시의 휴식을 그리워하게 한다.

 

 

 


                                          Out of the Bath 

 

마르트는 보나르와 동거하던 때부터 폐병 비슷한 증세를 가지고 있었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자폐증이나 뇌 기능의 이상으로 생기는 증세라고 추측했다고 한다.
그러한 자신의 병 때문에 괴로워하던 마르트는
사람들과의 어떠한 마주침도 두려워하게 되었고,
잠깐의 외출에도 양산을 써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고 했다.
이런 그녀를 위해 보나르는 모든 생활을 그녀 중심으로 배려했다.
그러나 그녀는 보나르에게 항상 무거운 짐이었다.

 

 

 


                                                        Bath

보나르는 이미 결혼신고 수년 전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마르트에게 남긴다는 유서를 썼으며, 5년 동안 그의 모델이었고,
연인이며 약혼자였던 아름다운 여인 '르네 몽샤티'와도 고통스런 이별을 했다.
이별선언을 들은 르네는 자살을 했고,
보나르는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마르트와 결혼신고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맑은 공기와 안정과 청결함이 필요한 그녀를 위해
한적한 온천이나 요양지를 찾아다니며,
그녀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연민을 버리지 않았다.

 

 

                     

 


                                            Nude in the Bath  (1941-6)


보나르가 '청결함'을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욕조에 누워 있던
마르트의 모습을 그린 것은, 그들이 긴 동거생활 끝에 결혼신고를 하던 해였다.
그때 마르트는 56세였다. 그 후 그녀가 72세로 죽을 때까지
보나르는 언제나 물 속에 길게 누운 채
자기 세계에만 빠져 있는 마르트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욕탕의 누드와 작은 강아지>는 욕실에 있는 마르트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녀를 위해 특별주문한 욕조, 화려한 봄빛의 벽 타일,
푸른 바다 빛의 바닥 타일, 에머랄드색 물빛.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침잠해 있는 마르트.
그녀의 얼굴은 물에 녹아 버린 듯 뭉개져 있고,
곧 사라져 버릴 듯 하다. 그리고 보나르는 사라져가는 마르트를
연민에 가득 찬 시선으로 끝까지 지키고 있다.



 


                                  
                                              Relaxing(1899)

청순한 소녀로 그려진 그의 뮤즈, 마르트 
마르트는 '한 마리의 새'처럼 가냘픈 체격에 걸음새가 사뿐 사뿐했으며,
약간 어린아이 같은 둥근 얼굴에 연보랏빛 눈동자를 지녔고,
평소 목욕하는 것을 좋아하여 욕조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가 여성의 육체를 바라 본 시선은 관능성보다
몸을 감싸고 있는 빛과 공기였으며,
비현실적인 빛 속에서 마치 목욕을 하고 있는 듯한 황홀한 정경이었다.
그래서 나부들은 순결성을 지니고 무지갯빛으로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다정다감하고 부드러운 한편 감미롭고 우아한가 하면
은밀한 분위기에 신비스런 색채를 띤 여러 모습의 나부가 탄생했다.
어쩌면 마르트는 보나르의 작품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나 할까


입체파 추상화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 동시대의 변화무쌍한
각종 미술이념과 혁명적인 회화의 조류를 거들떠보지 않았던
그의 그림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퇴폐적이고
부르조아적인 작품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보나르는 그 자신의 화풍을 고수해 나갔다.

비난과 오해를 받으면서도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빛으로 충만한 삶의 세계와
일상의 영원성에 대한 근원적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번거로운 걸 싫어한 그는 화실에 이젤을 두지 않았다.
등받이 없는 걸상 하나,탁자 두어 개,물감 튜브,기름병과 붓,걸레뿐이었다.
그림도 그냥 벽에다 둘둘 말려 있는 화폭을 넓게 펴서
압정으로 고정시켜 놓고 그렸으며,다 완성한 뒤에야
자유롭게 화폭을 잘라서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La Toilette (1932)

 

 

 

Bath


보나르는 이미 결혼신고 수년 전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마르트에게 남긴다는 유서를 썼으며, 5년 동안 그의 모델이었고,
연인이며 약혼자였던 아름다운 여인 '르네 몽샤티'와도 고통스런 이별을 했다.
이별선언을 들은 르네는 자살을 했고,
보나르는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마르트와 결혼신고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맑은 공기와 안정과 청결함이 필요한 그녀를 위해
한적한 온천이나 요양지를 찾아다니며,
그녀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연민을 버리지 않았다.

 

 

 


Nude in the Bath  (1925)


욕조의 흰색, 목욕하는 이의 몸 위에 보이는 자줏빛 광택,
목욕탕의 물과 타일은 보나르로 하여금 무한한 매력과 미묘함을
다양하게 표현하도록 구실을 제공해주었다. 그것들은 움직임과 투명성이
가장 순수한 수준일 때 빛을 포착하고 가장 떨림이
클 때 색채를 포착하는 기회를 주었다.

 

그때의 색채는 즉각적이고 예기치 않는 뉘앙스들을
망라하게 되는 것이다. 보나르는 모델보다 약간 높은 곳에 자리잡아서
욕조 옆면의 흰색이 드러나 도록 욕조를 우리쪽으로 기울게 한다.
정면으로 보이는 모델의 머리와 가슴은 정상적인 비례로
그려져 있으며 꽤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는 반면,
화가의 정면시각에서 벗어난 신체의 다른 부분은
쭉 뻗어 있어 입체감을 잃은 듯이 물속으로 사라진다.
확실히 <목욕>은 보나르 예술의 진수를
이루는 것 중의 하나로, 이토록 많은 통찰력과 미묘함,
세련으로 부터 우러나오는 자연스럽고도
단순한 인상은 드문 것이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여인  (1918)

신경쇠약으로 외출하길 꺼리고 결벽증이 있었던 그녀도
르 칸네에서의 생활로 더 없는 편안함을 누렸다.
그런 탓인지 1930년 이후 일련의 '욕조' 걸작들이 나오게 되는데,
줄곧 목욕하는 순간은 여러가지 자태로 포착되어 그려졌다.
보나르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거나 씻는 모습,
때로는 몸을 말리는 순간,몸을 닦는 자태,
머리를 빗으며 화장하는 장면들을 스케치해 두었다가 따로 그렸다.

 

 

 


Standing Nude (1920)


그가 여성의 육체를 바라 본 시선은 관능성보다
몸을 감싸고 있는 빛과 공기였으며,
비현실적인 빛 속에서 마치 목욕을 하고 있는 듯한 황홀한 정경이었다.
그래서 나부들은 순결성을 지니고 무지갯빛으로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다정다감하고 부드러운 한편 감미롭고 우아한가 하면
은밀한 분위기에 신비스런 색채를 띤 여러 모습의 나부가 탄생했다.
어쩌면 마르트는 보나르의 작품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나 할까

 

 

 

거울 앞의 나부(1933)


목욕을 마치고 상쾌한 기분으로 맑은 거울 앞에 서 있다.
한 그루 싱그러운 나무처럼. 창으로 비쳐 들어온
눈부신 햇빛으로 실내는 온통 빛에 잠겨서 아늑하기만 하다.

밝은 빛은 서 있는 나부의 우윳빛 몸매를 애무하듯
감싸 그 자태는 한층 환하다. 그 순간 정결한 몸에서
노란 금빛 광채가피어 올라 사방으로발산한다.
건강한 생명의 빛으로 충만하여 넘실거리고 있는 실내 정경이다.

 

 






1909년 초여름 '생트로페'에 머문 시절 남프랑스의 빛에 매료되었고,
마침내 1925년 칸 근처에 있는 높고 전망이 좋은
작은 별장을 구입하여 '르 보스케(작은 숲)'라 이름짓고 살게 되었다.
집의 외벽은 분홍색 장밋빛이고,내부는 온통 흰색이며,
멀리 마을의 집들과 산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2층의 조그마한 방이 그의 화실이었다.
르 칸네로 이사 오던 해에는 40년이나 동거하던
마르트(1869~1942)와 정식으로 결혼을 하였다.

 

 


              마르트의  실외에서의 누드 사진..

 

이주헌의 오르세 명화 순례>
(4)피에르 보나르 ‘화장대’

이주헌기자
삶을 그리는 것보다 그림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20세기 최고의 색채화가 피에르 보나르(1867~1947). 그는 다채롭고 화사한 색상을 통해 영원히 식지 않고 살아움직이는 그림을 창조했다. 보나르 스스로 생전에 이미 자신의 성취를 믿었다. 그래서 그는 또 말했다.

나는 21세기의 젊은이들 앞에 나비의 날개를 달고 나타나고 싶다.

생명감과 환희가 넘치는 보나르의 신비로운 색들. 그것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보나르는 1890년대 이래 무엇보다 일본화의 색채와 조형어법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오죽하면 동료 화가들이 그를 자포나르라고 불렀을까. 이처럼 서양사람들이 일본인들의 미학에 빠지고 열광하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9세기 중반에 재패니즘이란 용어가 만들어진 데서 알 수 있듯 일본미술이 없었다면 모네와 드가, 반 고흐 등 19세기 대가들의 화려한 색채도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은 탐미적인 일본풍 미학에 마르트라는 독특한 모델이 더해지면서 보나르 미술의 감각성은 고도로 높아졌다. 보나르의 아내인 마르트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싫어하고 고양이와 개를 상대로 하루종일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독특한 여성이었다. 질투심이 강해 남편을 독점하려 했고 목욕을 즐겨 남편의 손님이 와도 개의치 않고 매일 몸에 물을 끼얹었다. 이런 아내를 보나르는 매우 사랑해 그 일상적 행위를 무수한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이렇듯 사사로운 대상을 개인적인 정감으로 풀어그린다 하여 그에게는 앵티미스트(intimist)란 별명이 따라붙었다.

화장대는 마르트의 나체가 거울에 비친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거울 앞에는 물병과 대야, 화장품 따위가 놓여 있다. 이런 구성으로 관객은 본의 아니게 화가 부부의 은밀한 사생활을 엿보게 된다. 마치 화가의 집에 갔다가 그 아내가 갑자기 옷을 훌훌 벗어버린 모습을 본 것 같은 꼴이다. 그러나 그녀는 당황스러운 우리의 눈길에는 아랑곳없이 태연히 하던 일을 계속한다.

물론 아내의 몸을 그린 그림이므로 화가는 그녀를 글래머로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몸은 구석구석 화가의 사랑을 받고 있는 몸이다. 그 정을 물감에 섞어 바르며 화가는 말하는 것 같다. 나와 희로애락을 같이 한 이 육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이라고. 아름다움은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자신의 사생활을 자신있게 드러내 보인 보나르의 의도가 거기서 읽힌다.


<이주헌>

'좋은그림들 > 외국의화가의 작품' 카테고리의 다른 글

Christina Robertson  (0) 2013.01.27
피에르 보나르(1867.10.3 ~ 1947.1.23)   (0) 2013.01.25
Willard Leroy Metcalf  (0) 2013.01.14
Edward John Poynter (1836-1919)  (0) 2013.01.13
John William Godward  (0) 2013.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