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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더 비린 사랑 노래 2" - 황동규 시인

조용한ㅁ 2013. 3. 28. 17:58













      ■ 시인의 말 -




   숫꿈을 꾸고 싶다.




....................................1993년 가을
........................................황동규















  "더 비린 사랑 노래 2"


..............................- 황동규 시인 -



오늘은 안개비가 내리다 말고
다시 공중으로 올라갔습니다.
먼지 너무 많아 땅을 채 적시고 싶지 않았을까요.
많은 사람 속에서 안 보이는 사람이 되어
거리를 걸을 때 그중 편안합니다.
두리번대며 상점 속을 살피기도 합니다.
얼마 안 가 안개비도 나를 피하겠지요.
그때 나는 내 몸 적실 비를 찾아
계속 사람 속을 헤매겠습니다.




 #
    黃東奎 詩集(문학과지성 시인선ㆍ131)
  『미시령 큰바람』중에서









 "가 을 엔"


.......................- 황동규 시인 -



가을엔 이별의 앞차를 타리.
길 뚫려 미리 터미널에 나가
시간 채 안 찬 차 타듯.
길 양편에서 손짓하는 억새들을 지나
그 뒤를 멋대로 색칠한 단풍들을 지나
낯익은 도시의 바뀐 모습에 한눈 팔다가
광장 한구석 조그맣고 환한 과일 좌판 위에
낙엽 한 장으로, 혈맥(血脈) 한 장으로,
내리듯
과일에 닿기 직전
바람을 놓치고 한번 맴돌며
왜 이곳에 왔나를 환히 잊듯
그렇게 살다 가리.

떠남의 한 모습.




 - 同詩集에서 -









          ■ epilogue -




  욕심을 계속 줄였다. 늘 마시던 밤술을 오랜만에 안 마시고 깜빡 시계 차는 것을 잊어버리고 직장에 갔다. 타인의 시간이 내 시간보다 덜 예민했다.

  베란다의 벤자민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밑둥에 귀뚜라미도 와서 살고 또 봄이면 민들레씨도 몇 날아와 자리잡고 꽃을 피우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보리수 아래서가 아니라 벤자민나무 아래서도 깨달음이 이룩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트 속이 잠시 적막해진다.

  허구fiction만이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희망 자체도 허구가 아닐까?

  미완(未完)의 시를 쓰고 싶다. 미완의 태양계를 살다 가고 싶다. 젊은 날 내 혼을 빼앗던 저 성(聖) 베드로 성당의 초완성(超完成)'피에타'보다는 같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죽은 예수를 안고 처연히 앉아 있는 마리아 등뒤에 익명의 순례자가 서 있는 미완의 '피에타'들을 만들다 가고 싶다. 예수와 마리아는 손도 못 대고 순례자만 정으로 치다가 말면 또 어떤가? 미완일 수밖에 없는 작품들에 매달려 끌려가고 싶다. 배와 가슴으로.

  이제 시간의 얼굴이 보일 것이다.



















 "더 비린 사랑 노래 3"


.....................- 황동규 시인 -



그대를 노래에 등장시키지 않으려고
여러 세상을 돌아다녔습니다.
동해에도 가고 남해에도 갔습니다.
해남군 토말에도 갔습니다.
한번은 트럭을 피하려다 차를 탄 채 바로
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안경이 벗겨져 차 속에 뒹굴었고
벨트 맨 어깨가 얼얼했을 뿐
정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엔진을 막 죽인 상처난 차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서 구경했습니다.




 - 同詩集에서 -










 "더욱더 비린 사랑 노래 1"


......................- 황동규 시인 -



한때는 얼음낀 강물 속까지 들어가
무거운 돌들의 얼굴들을 파 모았지만
이즈음은 소리없이 다니면서
새가 남기고 간 깃털을 모읍니다.
낯익은 까치의 목도리감도 주웠고
이름 모를 새의 노란색 소매 한 깁도 챙겼습니다.
(날고 싶었을까요?)
솔개에게 먹힌 참새나 명새의 깃도 모았습니다.
깃에 말라붙은 피, 그 형체는
깊은 침묵이었습니다.
수화(手話)로도 말을 걸 수가 없었습니다.




 - 同詩集에서 -














 "풍장 45"


................- 황동규 시인 -



며칠 병(病) 없이 앓았다.
책장문들이 모두 열렸고
책들은 길 떠날 채비하고 줄 서 있었다.
더러 외투 껴입고 있는 놈도 있었다.

문밖을 나서니 시야의 초점 계속 녹이는 가을 햇빛.
간판들이 선명해라
지나치는 사람들도 선명해라
책을 들고 걷는 저 여자의 긴 손,
차도(車道)에 바싹 나와 아슬아슬
저 흙덩이의 어깨까지 선명해라,
그 어깨를 만지는 시간의 손가락도.
눈이 밝아졌구나,
아 눈이.




 - 同詩集에서 -









 "풍장(風葬) 51"


..................- 황동규 시인 -



수인선(水仁線) 협궤차를 내려 걷는다.
하늘에서 문득 기러기 소리 그치고
산 뒤에 숨는 수척한 산
채 사라지려다 만다, 조 숱 적은 머리끝.
철길이 동네 마당을 막 지나가고 있다.
아무 일도 없다,
동네 토종닭들이 겨울 땅을 할퀴고 있을 뿐.
팔목시계 하나가 발톱에 걸려 나오려다 만다.
뽑아본다. 침이 가고 있군.


시간 뒤에 숨어 있는 시간?




 - 同詩集에서,












 "꿈 꽃"


..............- 황동규 시인 -



내 만난 꽃 중 가장 작은 꽃
냉이꽃과 벼룩이자리꽃이 이웃에 피어
서로 자기가 작다고 속삭인다.
자세히 보면 얼굴들 생글생글
이빠진 꽃잎 하나 없이
하나같이 이쁘다.

동료들 자리 비운 주말 오후
직장 뒷산에 앉아 잠깐 조는 참
누군가 물었다. 너는 무슨 꽃?
잠결에 대답했다. 꿈꽃.
작디작아 외롭지 않을 때는 채 뵈지 않는
(내 이는 몰래 빠집니다)
바로 그대 발치에 핀 꿈꽃.




 - 同詩集에서,












 "지구껍질에서"


................- 황동규 시인 -



오랜만에 시골서 묵는 밤
잠이 오지 않아 창문을 연다.
저수지 가득 피어오르는 밤안개 속에 새 우는 소리
그 소리 귀에 익지만 이름 잊었다.
소쩍샌가, 자규샌가, 아니면 안개 속에 길 잃은
외로운 가수(歌手)인가?

나도 자주 길을 잃었다.
때로는 사는 동네에서 길 잃고 헤맸다.

마음 구석구석 더듬어도
얼굴과 이름 떠오르지 않는다.
죽지 않고 지구 껍질에서 헤매다보면
다시 만날 날 있으리.
혹시 서로 못 알아보더라도
미소 머금고 지나가리.




 - 同詩集에서,











 "늦가을 빗소리"


................- 황동규 시인 -



물방울 하나하나가 꽃에 잎에 인간의 몸에
그리고 저희끼리 몸 부딪쳐 만드는 소리 아닌,
땅 위에 뒹굴며 내는 소리 아닌,
서로 간격 두고 말없이 내려와
그냥 땅 위에 떨어져 잦아드는 저 빗소리.
그 소리 마냥 어두워 동공(瞳孔)이 저절로 넓어진다.
나무들의 뿌리들이 보인다,
서로 얽히지 못하고
외로이 박혀 있는 뿌리도.
내 잘못한 일, 약게 산 일의
엉켜진 뿌리들도 보인다.
멧비둘기 한 마리가 푸덕이고 날아간다.
마음 바닥에 잦아드는 저 빗소리.

시간이 졸아드는 소리.




 - 同詩集에서,











 "풍장 39"


................- 황동규 시인 -



복수(複數) 여행, 항구 끝의 여관들,
저 불면의 밤들,
아무리 취해도
코고는 일행을 끝 점검하고 비로소 자리에 눕던
저 불면의 밤들,
불면의 끝, 혼자 창 열고 가로등과 함께 훔쳐본
파도에 몸 던지기 직전 눈발 춤추던 바다!

그러나 이제는 여행 꾸러미 속에서도
가볍게 누워 잠든다,
고추잠자리 마른 풀잎에 내려 졸 듯.
마지막 술잔에 내장(內臟)을 하나씩 맡기고
누군가 옆에서 인생과 문학을 갖고 놀면
귀 열어논 채 잠든다.




 - 同詩集에서,











 "풍장 46"


................- 황동규 시인 -



내 관악산 북녘에 살며
때로는 산이 안개 속에 숨는 것을 보았다.
이슬비가 안개를 벗기기도
안개가 이슬비를 다시 감싸기도 했다.
언젠가 마음속 간직해온 것과 헤어져야 할 때,
마음의 것들 마지막으로 책상 위에 벌여놓을 때,
서가에 꽂힌 책 사이에도 끼워넣을 때,
눈앞에서 금방 사라질 것들!
꺼내놓으라면,
관악산부터 내어놓으리.
다녀온 암자도 암자의 약수 그릇도 내어놓고,
늦가을 저녁 어둡기 직전 익숙한 솜씨로 땅을 더듬다 말던 가랑비도.




 - 同詩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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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黃東奎 1938- ) 시인. 교수. 서울 출생. 서울대 영문과와 동대학원 졸업. <현대문학>즐거운 편지등이 추천되어 등단. 문명적 소재를 취하면서도 새로운 서정의 세계를 구축하여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높이고 있음. 시집에 <어떤 개인 날>, <비가(悲歌)>,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풍장(風葬)> 등이 있으며 평론집으로 <사랑의 뿌리>, <김수영의 문학> 등이 있음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아름다운 연주곡 모음

 

 


 

출처 : 시나브로
글쓴이 : Sim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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