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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너무 뜨겁게 진실한 사람 (김남주)|

조용한ㅁ 2014. 2. 6. 11:22

사람을 알고 시를 아는 것과 사람을 모르고 시를 아는 것, 어느 것이 좋을까? 그건 아무래도 일장일단이 있을 것 같다. 그것도 아마 나름일 것 같다. 사람은 한없이 좋은데 시는 신통치 않는 전자가 좋을 것 같다.
나는 동주의 시를 알기 훨씬 전부터 동주를 알았다. 그러나 그 의 시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동주를 정말 몰랐을 것이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 때까지 쓴 시에 담겨 있는 그의 마음을 나는 환갑 다 지난 나이에 세 번 징역을 살면서야 조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다. 그의 시는 결코 그의 사람됨을 배신하지 않고 그의 생의 결코 그의 시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이렇게 동주에게 있어서 시가 곧 사람이요, 사람이 곧 시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었다는 것, 그런 사람의 시를 두고두고 읽을 수 있다는 것, 이건 정말 이 민족의 보기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만해나 육사는 시로만 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시도 그들을 배신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무엇이 나에게 그런 확신을 주는 걸까? 아무래도 그들은 그들의 시보다 더 클 것 같고 더 뜨거울 것만 같다. 그들의 시는 그들을 배신하지는 않아도 높이와 깊이에 있어서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열도에 있어서 그들에게 못 미칠 것만 같다. 육사의 경우가 더욱 그럴 것만 같은 느낌이다. 시가 그들에게 미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조금도 실망할 까닭이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랑은 될망정 실망이 될 까닭은 없다.
세상에는 시 한 줄 남기지 않으면서도 결코 그들 못지 않은 삶을 살아간 사람이 너무 많다. 시 나무랭이 같은 것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채 피묻은 발바닥 자국으로 땅에 꿈틀꿈틀 역사를 찍어 간 민중 앞에서 시를 쓸 만큼 먹물이 든 사람들은 겸손해야 하지 않을까?
언젠가는 만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한 시인, 그러나 아직은 만난 일이 없는 시인의 시 앞에 지금 나는 서 있다. 그는 “솔직히 말해서 나는/아무것도 아닌지 몰라”라고 극히 겸손하다. 시인 김남주의 넋두리는 이렇게 이어진다.

열 개나 되는 발가락으로
열 개나 되는 손가락으로
날뛰고 허우적거리다
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있는 나는
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인지도
눈물로 눈물로 눈물로 철렁이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어둠을 사르고야 말 불빛인지도
그 노래인지도 몰라라

70년대의 시들 가운데서는 양성우 시인의「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는 절창 중의 절창이었다.
이 시는 그만큼 절창은 아니어도, 이만큼 겸허한 확신으로 자기를 확인하는 시는 일찍이 한국시사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단 한 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도 파리인지도 모를 '나'가 꽃잎인지도 모른다고 그는 읊조린다. 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 말 꽃잎인지도 모른다고, 그럴 줄을 알면서도 기어코 봄을 기다려 피어나고야 말 꽃인지도 모른다고, 눈물로 출렁이는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인지도 모른다고 아니, 어둠을 사르고야 말 불빛인지도 그 노래인지도 모른다고 어떤 불빛은 발바닥으로 역사를 찍어 가는 만큼의 눈빛이다.
이 시인은 아무래도 키가 작달막한 사람일 것 같다. 얼굴도 결코 크지는 않을 것이고, 그리고 까뭇까뭇할 것이고, 앙다문 입술에 날카로운 콧날, 눈은 야광주처럼 빛나고, 뜻밖에도 허술하고 어질디어진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어질디어질고 착하디착한 사람이 되레 역사를 끌고 가는 막강한 힘이 되는 일이 가끔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호령하는 애굽왕 파라오와 맞서 싸워서 기어코 불쌍한 노예들을 이끌고 나온 모세, 강자 중의 강자를 성서는 '겸손하고', '온유하라'(민수기 12:3)고 하니 말이다.

오 지하의 시간이여 표독한
야수의 발톱에 떨어진
살점이여 살점으로 뒹구는
육신이여 영혼이여
죽어서는 안 된다
살아 남아야 한다
살아서 이 어둠을
불살라 버려야 한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부른 김지하 시인의 시는 이시에 비하면 한 숨 돌릴 여유가 있다. 김지하 시인이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를 부른 곳은 뒷골목이었다. 물론 거기도 발자국 소리 호루라기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가 사무치는 곳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이 되살아오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 시인이 “죽어서는 안 된다.”며 나뒹구는 곳은 어느 지하실이었던가?
이런 극한 상황에서는 민주주의 같은 건 이미 사치가되는 것이다. 수도 없이 '죽음으로 넘어가는'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 섰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시인은 그 자리를 삶의 절정이라고 한다.

이제
어둠이 너의 세계다
너의 장소가 너의 출발이다

죽음을 삶이 절정으로, 어둠을 생의 출발점으로 보는 사람에겐 무서울 것이 없다. 무서울 것 없는 사람만이 진실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 누구의 원칙에 따라
자유와 정의위 원칙에 따라
진실을 말해 놓고
잠자리에 편할 수 없어
바람으로 빠져나와
꽁무니에 감시의 눈총을 달고
화살에 쫓기는 과녁으로
필사의 죽음으로
신새벽을 알리는 숨소리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라도 있다면
듣는 귀라도 있다면

진실이 이렇게 숨가쁜 일이던가? 신새벽을 알리는 진실의 숨소리를 들으려 필사의 죽음으로 안간힘인 것이다.
진실은 권모와 술수의 원칙과는 번지수가 다르다는 것은 상식인데, 진실은 자유와 정의의 원칙 위에 설 때에만 말할 수 있다는 건 진리인데, 그것을 필사의 죽음으로라야 어떻게 말해 볼 수 있다는 데 이 시인의 슬픔 아니, 우리의 슬픔이 있는 것이다.
(군더더기 같은 소리지만 우리 말의 토씨 하나 바로 잡고 넘어가야 하겠다. 모국어에 목을 걸어야 하는 것이 시인이니까. '원칙에 따라'는 일본식 표현이다. 우리말은 '원칙을 따라'이다.)
고은 시인의 절창은 아무래도 「화살」이 아닐까?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 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비장미마저 감도는 절창이다. 거기 비겨 보면 진실을 말해놓고 숨이 턱에 닿아 쫓기는 과녁이 되는 현실은 처참하기만 하다. 세상에 비장미는 있어도 처참미라는 것은 없다.
아직 얼굴도 본 일이 없고 목소리도 들어 본 일이 없는 이 시인은 잿더미 속에 파묻혀 몸부림친다. 아니, 자신을 한 움큼 재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영혼을 던져 보았는가
그대는 바다의 심연에
육신을 던져 보았는가
죽음의 불길 속에서
영혼은 어떻게 꽃을 피우는가
파도의 심연에서
육신은 어떻게 피를 흘리는가

이렇게 뜨겁게 타는 영혼은 한 줌 재도 남기지 않고 완전 연소 할 것 같지 않은가? 그는 죽어버린 별 죽으러 별 죽음을 기다리는 별과 함게 별과 달의 부활을 위해 새벽의 언덕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숯덩어리처럼 검게 타머리고 잿더미는 함께 사라질 온몸으로 타버리고 잿더미는 함께 사라질 온몸으로 타는 영혼이다. 그는 열에 들더 헛소리를 한다.

장작을 패듯 내리치는
도끼가 있다 앞산
아마를 쨍쨍 울리고 반향은
분노가 된어 발등에서 부서진다

허공을 맴도는 참말 같은 헛소리, 바위를 만나 바위를 덮고 울어 버리는 헛소리가, 장작을 패듯 내리치는 도끼라는 것이다. 헛소리의 분노는 지금 우리의 발등에서 부서진다.
나는 얼마전에 15년 동안 일곱 번 공장에서 쫓겨나면서도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나이 어린 쪼까니에게 말을 들은 일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속임수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종교도 나의 시도 모두 위선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나 같은 사람을 이 시인은 불의 위선자, 가련한 휴머니스트, 머리 털 깬 친구, 불행한 천사라고 호되게 물아붙인다.

날개도 없는 주제에
불을 버리고 산을 넘는 녀석들이 있다
놈들을 쏘아라 농부가 논둑에
말뚝을 박듯 그렇게 다부지게
불기둥을 박고 그들을 쏘아라

노동자의 절단된 팔이 되어 기다리는 불, 농군의 굶주린 얼굴이 되어 기다리는 불, 죽음으로써만 끝장이 나는 신화가 되어 기다리는 불 앞에서 도망칠 길이 있을까? 없다. 그 앞에서 할 수 있느 일은 그 불에 몸을 던지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노래다.
이렇듯 준렬한 시를 쓰면서도 그는 부끄러운 것이다.

차마 부끄러워
밤으로 찾아든 고향
달도 부끄러워 숨어 버렸나
보이는 것은 어둠뿐
들판도 그대로 어둠으로 팔리고
어둠으로 보이는 것은 농민의
농민에 의한 농민을 위한
허수아비뿐이다.

그는 쓰고 있다. 세 겹으로 네 겹으로 갇혀 그는 쓰고 있다. 모든 것은,

내 탓이다라고
서투른 광대의 설익은
장난 탓이다라고
어설픈 나의 양심 탓이다라고
미지근한 나의 싸움 탓이라고

그는 모든 것이 자기 탓이라고 쓰고 쓰고 또 쓰고 있다. 움푹 패인 주먹밥 위에, 주먹밥이 덜어진 눈물 위에, 눈물 같은 눈물 위에, 환기통 위에 뼁끼통
위에, 시멘트 바닥에 허공에 천정에 벽위에 식구통 위에 감시통 위에 침 발라 손가락으로 발가락으로 혓바닥으로 마르도록 벗겨지도록 피나도록 쓰고 있다.
일본 후쿠오카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간 동주의 시가 잡히지 않아 나는 오래 몸살을 앓아 왔다. 그런데 나는 이 시인의 이 시를 읽으면서 이건 영락없는 이건 영락없는 동주의 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난 너무 미지근하게 살았어
그런 미지근한 시를 쓰고 죽다니

동주는 감옥에서 아마도 이같은 말을 뇌까리며 숨을 거둔 것이 아닐까? 양심이 피를 닮고 싸움이 불을 닮고 자유가 시멘트 바닥에 응집된 피 같은 꽃을 닮고 응집된 곷이 죽음을 닮고 있다는 것을 알 때까지는 번질 수 있을 때까지는 참아야 한다고 동주는 뇌까리고도 뇌까렸던 것이 아닐까?

온몸으로 죽음을
포옹할 수 있을 대까지는
칼자루를 잡는 행복으로
자우를 잡을 수 잇을 때가지는

참아야 한다며 저 멀리 북간도에 계시는 어머니를 부르고 또 불렀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동주의 죽음은 지나간 추억이 아니다. 정신대에 끌려가 죽어 돌아오지 dskg는 수십만 명 이 땅의 꽃들의 죽음도 지나간 추억이 아니다. 전태일, 김상진, 김의기, 김종태의 죽음은 결코 결코 지나간 추억이 아니다.

그들은 오로지
굶주림의 한계를 알고 싶었을 뿐
그들은 오로지
어둠의 깊이를 보고 싶었을 뿐
결코 죽음으로 간 것은 아니다
결코 죽음으로 간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모든 것이 혁명도 그렇듯이
한 나무의 열매가
한 종자의 붙힘에서 비롯되었음이
그들의 죽음 또한
그들의 죽음 또한
한 나무의 열매를 위하여
하나의 씨앗이 되고자 했을 뿐
한 나무 생명을 키워 주는
재가 되고 거름이 되고자 했을 분
한 나무의 성장을 지속시켜 주는
피가 되고 살이 되고자 했을 뿐
부리가 되고자 했을 뿐

그렇다
그들의 분신은
존재로 향한 모험이었고
그들의 할복은
칼로 깎아 세운 자유의 성채였다

얼굴도 모르는 이 시인아, 너는 나의 꽃이다. 영혼이다 피다 육신이다. 나도 너처럼 꽃을 닮고 피르 닮고 삶의 절정인 죽음을 닮고 싶다나, 넌

죽어서는 안 된다
살아 남아야 한다
살아서 어둠을
불살라 버려야 한다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