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글/시

김소연,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조용한ㅁ 2014. 3. 23. 23:50

 

 

 

 

김소연,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먼 훗날,

내 손길을 기억하는 이 있다면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떨리는 목소리로 들려줄

시 한 수 미리 적으며

좀 울어볼까 한다

햇살의 손길에 몸 맡기고

한결 뽀얘진 사과꽃 아래서

실컷 좀 울어볼까 한다

사랑한다는 단어가 묵음으로 발음되도록

언어의 율법을 고쳐놓고 싶어 청춘을 다 썼던

지난 노래를 들춰보며

좀 울어볼까 한다

도화선으로 박음질한 남색 치맛단이

불붙으며 큰절하는 해질 녘

창문 앞에 앉아

녹슨 문고리가 부서진 채 손에 잡히는

낯선 방

너무 늦어 너무 늙어

몸 가누기 고달픈 어떤 때에

사랑을 안다 하고

허공에 새겨 넣은 후

남은 눈물은 그때에 보내볼까 한다

햇살의 손길에 몸 맡기고

한결 뽀얘진 사과꽃 세상을

베고 누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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