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곡가 구노(FrancoisGounod)(1818~1893)의 아베마리아는
Solo, 합창,실내악,기악연주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곡으로 유명하다.
구노는 바흐 프렐류드 반주 위에 아름다운 아베마리아 선율을 작곡하였다.
화가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의 예술적 환경에서 어릴 때부터
음악 신동으로 불렸던 구노는 한때 사제가 되려고 신학공부를 했으며
그 기간동안 오직 성가 만을 작곡했던 독실한 카톨릭신자였다.
어린 구노가 빠리 외방선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닐 때
같은 반에 구노가 따라 갈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음악 천재’가 있었다.
두 사람은 아주 친한 친구였고 선의의 경쟁자였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할 나이가 되었다.
당연히 음악가가 되리라 생각했던 그 친구는 사제의 길을..
구노는 1843년 빠리 외방전교회 성당 악장으로 음악가의 길을..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사제가 된 친구가 빠리 외방선교회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구노는 그 친구가 몹시 보고 싶었는데
중국으로 발령받아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
신앙심 깊었던 구노는 그 친구를 위해 늘 기도했다.
오랜 사목 후에 휴가라도 오면
옛 추억을 나누며 차를 함께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어쩌면 자신이 친구가 있는 중국에 가서
동양 문물도 구경하며 친구가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스스로 위로하면서 기도하였다.
가끔 학교 게시판에는 붉은 글씨로
"순교" 라는 메모가 붙어있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평화 속에서 주님을 믿는
순박한 사람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슬프고 가슴 아프고..
그 친구를 생각하면 불안한 마음 없지않았지만
선교의 자유가 주어진 중국이기에 내심 안도했다.
어느날 게시판이 북적되어 가보니 그 친구 이름이 있었다.
다행히 빨간 글씨는 아니어서 안심했지만
내용을 읽어 본 구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친구가 "조선 대목구 주교"로 임명되어
죽음의 땅 "조선"으로 발령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구노는 눈 앞이 캄캄했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오기 힘들다는..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는..
차라리 순교하기 위해 조선으로 간다는 말까지 횡횡했던
바로 "죽음 만이 기다리는" 조선으로 들어간다니..
구노는 날마다 성모님께 그 친구가 제발 무사히 돌아와
단 한번 만이라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드렸다.
어느 주일 날, 학교 정원에서 산책을 하던 구노는
요란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삼종 시간도 아닌데 이렇게 요란하게 종이
울린다는 것은 뭔가 불길한 징조였다.
의례 그랬 듯이 순교자가 또 나온 것이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달음질쳐서 뛰어간 구노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게시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앵베르주교 조선에서 순교"..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서 있을수도 없었다.
구노는 정신없이 뒷 동산으로 뛰어갔다.
친구가 너무나 보고 싶었고
제발 살아와 달라고 매일 기도했었는데..
언제나 변함없이 자비로운 눈길로
우리를 내려다 보시는 성모상 앞에서 구노는
목놓아 울며 눈물로 성모송을 바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의 첫 주교이자 순교자인 자랑스러운 친구를 위해서
구노는 성모송 '아베 마리아'를 만들어 친구에게 바쳤다.
-103위 순교 복자 성화 (혜화동 성당 )-
이 곡이 후일 영광스러운 성인의 관을 쓰신
조선의 순교 성인 '성 앵베르 주교'를 기리며
조선 복음화를 위해 피 흘리신 순교자들에게 헌정된
조선을 위한 구노의 단 한 곡의 성가 아베마리아이다.
지구 반대편..인종도 모르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그 당시 서구인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미개한 나라 조선 땅에서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순교하여
하느님의 씨앗을 뿌린 성인 앵베르 주교는
서울 명동성당 대 성전 지하에 잠들어 계신다.
김대건신부님에 이어 한국 교회 두번째 신부님이신
최양업 신부님의 아버지시며 순교하시고 성인반열에 오르신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나란히...
-한국명 범세형(范世亨),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Imbert, Lurent Marie Joseph)-
주교로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모방,샤스탕 두 신부와 함께
1839년 기해박해 때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조선에 입국하기 전 중국 사천(四川)교구에서 10년간 사목하였던
앵베르주교는 조선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교황청에 의해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로 성성되어 그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조선교구는 먼저 입국한 모방, 샤스땅 신부와 더불어
교구설정 6년, 교회 창설 53년 만에 전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악조건속에서도 복음전파에 힘써 1839년 초 신자 9천 명을 넘었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려고 정하상등 네 명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박해로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어 곳곳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자
주교는 더 많은 교우에게 성사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교우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않고 모습을 나타내었다.
사태는 점점 위태롭게 되어 배교자들의 자백으로
3명의 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배교자 김여상은 관헌들과 짜고 주교를 유인하려하였고
앵베르주교는 이 사실을 알고 더 이상 전교할 수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자수하였고 동료 신부들에게도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라며 자헌을 권유하였다.
포청의 옥중에서 서로 만난 세 선교사들은
모진 형벌과 고문을 받으며 함께 옥중의 고초를 이겨냈다.
조선 정부는 이들이 절대로 배교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에 처하도록 판결하고
처형 장소는 한강변의 새남터로 결정하였다.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들은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군사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리며 모욕하고
군중들의 온갖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 장대 위에 기를 올리고 사형 선고문을 읽고 나서
수형자들을 무릎 꿇린 다음, 병정들이 달려들어 칼질을 했다.
이렇게 한국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잃었다.
1839년 9월 21일, 앵베르주교가 순교하였을 때 나이 43세였으며
그는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카톨릭사전, 한국 천주교회사, 하늘로 가는 나그네/ 김길수}
Ave Maria gratia plena
Dominustecum.
Benedictatu in mulieribus
etbenedictus fructus ventris tuis Jesus.
SanctaMaria, mater Dei!
Orapro nobis peccatoribus
nuncet in hora mortis nostrae.
Amen.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도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아멘..
구노의 아베 마리아..안드레아 보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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