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서울대교구 이영춘 신부입니다..
역사신학을 전공하였고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총무로서
한국천주교회사 관련 사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요즘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
인터넷 상에서
구노가 앵베르 주교와 친구 사이였고
그의 순교를 슬퍼하면서
아베 마리아를 작곡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신자들에 의해 널리 전파되고 있어
이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의 진원지는
대구의 김길수라는 신자가
한국천주교회사 강의를 하러 다니면서
신자들의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본래
한국천주교회사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지만
구수한 경상도의 입담과 함께
말재주가 뛰어나
여러 수녀원과 전국 곳곳에서
유명세를 치르는 강사 중 한 명이 되었는데
신자들에게 감동적인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이런 이야기까지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구노가
한국 순교자들을 위해 작곡한 성가는
가톨릭성가 284번 <무궁무진세에>라는 곡이고
가사를 보면
앵베르 주교만이 아니라
병인박해까지의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파리의 외방선교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참고로
앵베르 주교와 구노가 친구 사이였다고
그럴듯한 이야기로 포장하고 있는데
앵베르 주교는 1796년에 태어나 1839년에 순교하였고
구노는 1818년에 태어나 1893년까지 살았습니다..
앵베르 주교와 구노의 나이 차이는 22살이고
앵베르 주교님께서 순교하셨을 때
구노는 겨우 21살이었는데
어찌 같은 신학교 동기동창이라고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지어내어
순교자를 현양하는 것이 아니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한국 신자들 모두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는지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귀 인터넷 방송국에서도
여러차례 인용한 바 있다고
신자들이 알려줘서
이 글을 올립니다..
가입인사를 하고 기다렸지만
자유게시판에 글을 쓸 수 없다고 나와서
이곳에 올리니까
읽어보시고 지우시든지 하십시오..
다만
잘못된 내용을
무책임하게 언급한다면
교회에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지함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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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라우렌시오 엥베르 주교(1796-1839년)
성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Laurent Joseph Marius Imbert) 주교의 세례명은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또는 라우렌시오)이며,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이다. 그는 1796년 3월 23일 프랑스 남부 액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앵베르가 태어난 지 몇 달 후에 카브리에(Cabries)의 라보리(Labori)로 이사하였고, 앵베르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그 자신은 총명할뿐더러 기도나 공부에도 열심이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묵주 만드는 법을 배워 공부를 하는 한편, 나이 많은 부친의 생활에도 보탬을 주었다고 한다.
그가 마음속에 동방의 포교지방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액스 대신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그래서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옮겨가 공부한 후, 1819년 12월 18일에 성품성사를 받고 곧 중국의 사천(四川)으로 파견되었다. 앵베르 신부는 12년 이상 사천에 머물렀다. 그는 중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혔으며, 모든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던 중 1836년에 조선의 제1대 교구장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주교가 사망하자 곧 주교품을 받고 조선의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 해 12월 17일 중국 대륙을 건너 몽고의 서만자(西灣子)에 머물고 있던 그는 마침 조선 사신의 수행원으로 동행한 교우 조신철, 정하상 등의 협력을 얻어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의 교우들은 처음으로 주교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실로 조선 교회가 설립된 지 53년만의 일이었다.
3개월 동안 조선말을 배운 앵베르 주교는 고백을 듣고서 성사를 줄 수가 있었다. 그는 이미 조선에 와 있던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함께 지방을 순회하기도 하고,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외교인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는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교회는 오랜 재난을 겪은 후 주교를 맞으면서 재생하기 시작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스러운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항상 허약하고 병든 몸으로 매우 바쁜 생활을 하였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삼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 무한히 괴로운 것은 박해로 말미암아 신입교우들의 신앙이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는 사실이었다.
드디어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자 앵베르 주교는 박해가 퍼지기 전보다 더 많은 교우에게 성사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여, 교우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리지 않고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러는 동안 사태는 점점 위태롭게 되어갔고, 배교자들의 자백으로 3명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배교자 김여상은 관헌들과 짜고 주교를 유인하려고 하였으며, 주교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스스로 자수의 길을 택하고, 다른 두 신부들도 주교의 권고를 받아들여 즉시 관청에 자수하도록 하였다. 포청의 옥중에서 세 선교사는 서로 만날 수 있었다. 주교는 여러 번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며 두 신부들과 함께 옥중의 고초를 이겨냈다. 조선 정부는 그들이 절대로 배교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마침내 대역 죄인이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에 처하도록 판결을 내리고, 처형 장소는 한강변의 새남터로 결정하였다.
사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자 세 선교사들은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가마를 타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 이르자 군사들은 선교사들의 옷을 벗긴 다음 손을 앞가슴으로 결박하고, 겨드랑이에 긴 몽둥이를 꿰고, 화살로 귀를 뚫고, 얼굴에 회를 뿌린 다음 군중의 조롱과 욕설을 듣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 한 군사가 장대 위에 기를 올리고 또 다른 군사는 사형 선고문을 읽고 나서 수형자들을 무릎 꿇린 다음 열 명 가량의 병정이 달려들어 칼질을 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성직자들을 3년 만에 잃게 되었다. 앵베르 주교는 1839년 9월 21일에 순교하였으며, 그의 나이는 43세였다. 그는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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