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동백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 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散華)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배꽃과 복사꽃과 벚꽃이 다 이와 같다.
매화는 잎이 없는 마른가지로 꽃을 피운다
나무가 몸 속의 꽃을 밖으로 밀어내서 꽃을 품어서 나오는 듯이 피어난다
꽃 핀 매화숲은 구름처럼 보인다. 매화는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서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 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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