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글/시

늑대야 늑대야 / 허홍구

조용한ㅁ 2015. 4. 17. 11:43

 

 

 

늑대야 늑대야 / 허홍구 

 


남자는 모두 도둑놈, 늑대라며
늘 경계를 하던 동창생 권여사로부터
느닷없이 소주 한잔 하자는 전화가 왔다

 

"어이 권여사 이젠 늑대가 안 무섭다 이거지"
"흥 이빨빠진 늑대는 이미 늑대가 아니라던데"
"누가 이빨이 빠져 아직 나는 늑대야"
"늑대라 해도 이젠 무섭지 않아
나는 이제 먹이감이 되지 못하거든"

 

이제는 더 이상 먹이감이 되지 못해
늑대가 무섭지 않다는 권여사와
아직도 늑대라며 큰소리치던 내가
늦은 밤까지 거나하게 취했지만
우리 아무런 사고 없이 헤어졌다

 

그날 권여사를 그냥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아- 나는 아직도 늑대가 분명하다
 

 

아지매는 할매되고 / 허홍구

 

 

염매시장 단골술집에서
입담 좋은 선배와 술을 마실 때였다

 

막걸리 한 주전자 더 시키면 안주 떨어지고
안주 하나 더 시키면 술 떨어지고
이것저것 다 시키다보면 돈 떨어질 테고
그래서 얼굴이 곰보인 주모에게 선배가 수작을 부린다
"아지매, 아지매 서비스 안주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주모가 뭐 그냥 주모가 되었겠는가
묵 한 사발하고 김치 깍두기를 놓으면서 하는 말
"안주 안주고 잡아먹히는 게 더 낫지만
나 같은 사람을 잡아 먹을라카는 그게 고마워서
오늘 술값은 안 받아도 좋다" 하고 얼굴을 붉혔다

 

십수 년이 지난 후 다시 그 집을 찾았다
아줌마 집은 할매집으로 바뀌었고
우린 그때의 농담을 다시 늘어놓았다
아지매는 할매되어 안타깝다는 듯이
"지랄한다 묵을라면 진작 묵지"
 

 

 

 

총알보다 빠르다 / 허홍구  



여자 홀리는데 날쌘 친구가 있었다.
우리들은 그를 총알이라 불렀다

총알이 점찍어 둔 여자를
내가 낚아 챈 일이 있고부터
친구들은 나를 번개라 불렀다

3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대폿집에 몇이 모여 옛날을 이야기 하다가
지금도 총알보다는
번개가 더 빠르다고 강조하였다

총알이란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이젠 우리들 보다 훨씬 더 빠른
세월이란 놈이 있다고

우리는 벌써
여섯 고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부음을 받고 / 허홍구 

 

-먼저 간 인월스님에게 

 


이른 봄날
눈부시던 목련은 기별도 없이 가고
내 동갑내기 스님 인월은
무거운 몸뚱이 벗어놓고
급히 떠났다는 전갈이다

 

분별없는 중이 되겠다며
깎은 머리도 기르고
작업복에 땀을 흘리고
때로는 세상에 취해 비틀거리기도 하더니

 

남아있는 몸뚱어리와
땅 바닥에 내려앉은 꽃은
그 흔적을 지우며
묵언법문중이다

 

내 몸이 곧 나인 줄 알았다가
그것마저 내 것이 아닌 줄 알겠네
모두 다 홀랑 벗어 던지고
가볍게 떠나야 할 때
나는 어찌 꽃잎으로 갈까

 

진흙 투성이의 맨발로  

 

 

 

뭐가 이렇노 / 허홍구

 

 

독립 유공자 후손 잘사는 것 봤나?
못 봤심더.

*매국노 후손 못사는 것 봤나?
못 봤심더.

*양심적인 사람 잘사는 것 봤나?
못 봤심더.

*허가 난 도둑 못사는 것 봤나?
못 봤심더.

*나라 팔아먹은 부정부패의 원흉 못사는 것 봤나?
못 봤심더.


씨이팔 뭐가 이렇노


소설가 송일호 씨와 술을 마시다가 나눈 얘기다
술로 속을 씻어 뱉어낸다
10년 묵은 대장장애가 일시에 없어졌다
참 시원타 
 

 

 

 

무서운 일 / 허홍구 

 

 

쌔임(선생님)요

/ 와 (왜)

 

결혼하면 마누라하고 꼭 같이 자야합니꺼?

/ 빌어먹을 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이 놈아 !

와, 같이 자는 게 싫은 기가 아니면 겁이 나나

 

그 기 아니고요

피곤할 때는 혼자 자는 게 훨씬 편한데....

그리고 여름엔 디기 더울텐데

 

/ 미친놈, 잠만 잘라고 결혼하나

그래, 니 말이 맞다

나도 오십이 훨신 넘어서야 알게된 일이지만

자기 싫을 때도 같이 자야하는 결혼이라면

오ㅡ 그건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사람의 밥이 되어 / 허홍구 

 

 

하루가 전부인
하루살이의 일생도
길바닥에 떨어져 밟히는 나무 이파리도
결코 가벼운 목숨이 아니오니

 

나, 작은 한 톨의 쌀로
이 세상 몸 받아 올 때
하늘과 땅, 밤과 낮
비바람이 있어야 했다

 

쌀 한 톨이 나를 키울 때,

 

농부의 손마디가 굵어지고
허리가 휘었다

 

작은 이 몸
이제 사람의 밥이 되어 나를 바치오니
부디 함부로 하지 말게 하소서
 

 

 

 

 

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 

허홍구 시인이 네 번째 작품집 '사람에 취하여'를 냈다.

시의 소재는 그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다.
환경미화원 '정씨 아저씨', 동창생 '권여사'에서부터 원로시인 '황금찬',
국회의원 '추미애' 등이 그의 '시적 먹잇감'이 된 이들이다.
시집에 실린 작품수는 77편이지만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과 한 제목
속에 여러 사람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을 감안하면 족히 100여명은
넘는다.

줄여 쓴 평전같은 시들은 시적 대상이 된 사람의 장점을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의 목표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따뜻하고 해학적인 것들이다.
'내 삶을 이끌어주시는 길라잡이' 백기완,'손도 한 번 안 잡았는데 놀랍게도
묵은 가지에 전기가 통'한 동갑내기 시인 손정우, '나무와 해라는 영혼이
만난' 화가 이목일, "지랄한다 묵을라면 진작 묵지"라며 면박주는, 이제는
할매가 된 염매시장 아지매까지 허홍구의 시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따뜻하다.
'마음으로 읽은 인물 평전'이라는 부제처럼 시인은 세속의 눈을 감고
오직 마음으로 그들을 읽었으며 결국엔 그 사람들에게 취하고 만 것이다.

"차마/ 꺾지 못하는/ 내 맘 속에/ 마지막 꽃 한송이"라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쓴 '그대'라는 제목의 시를 읽어볼까?
내가 혹시 허홍구의 그대는 아닐까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

 

허홍구 시인

 

대구출생 

 

시집

< 사랑 하나에 지옥 하나 > 
< 네 눈으로 나를 본다 > 
< 내 니 마음 다 안다 >

< 사람에 취하여 >
수필집 
< 손을 아니 잡아도 팔이 저려옵니다 >
 

'아름다운글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이 나를 스칠 때/이성선  (0) 2015.04.19
햇살에게 / 정호승   (0) 2015.04.18
동백꽃 지다 - 이승은  (0) 2015.03.30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 김용택 詩   (0) 2015.03.30
달빛편지  (0) 2015.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