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놀데(Emile Nolde)
실락원 (Paradise Lost: 1919)
제 목 : 실락원 (Paradise Lost: 1919)
작 가 : 에밀 놀데 Emile Nolde (1867- 1956)
크 기 : 캠퍼스 유채 (86.5cm X 100.5)
소재지 : 독일 제빌(Seebull) 놀데 미술관
에밀 놀데(Emil Nolde, 독일 1867-1956)
독일의 화가. 본명 에밀 한젠(Emil Hansen). 슐레스비히 출생. 슐레스비히의 조각학교를 졸업한 후 공업학교의 용기화(用器畵) 교사로 교편을 잡다가 회화 쪽으로 전향하였다. 뮌헨·파리·코펜하겐 등지에 유학하여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후 드레스덴의 브뤼케파에 참가했으나 곧 이들과 결별, 나치스의 탄압 후에는 중앙과도 교섭을 끊고 지냈다. 유채화와 함께 많은 수채화·판화는 현대 독일 회화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젊은 시절 목각공예를 습득하고, 한때 베를린에서 가구와 장식미술가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브뤼케 그룹 시절 얻은 목판화의 제작 방법은 그림에까지도 감정표현, 그것도 현실 사회를 넘어선 종교적 감정표현으로 이색적인 종교적 표현주의 회화를 구현해 나갔다.
분방한 공상, 대담한 형태의 데포르메, 불꽃처럼 타오르는 정동적(情動的) 색채를 특색으로 하는 그의 조형은 괴기한 인간의 가면, 원초적 자연, 꽃과 물체의 마술적 현현(顯現), 영혼과 광기(狂氣)와 신앙의 세계를 표현하였다.
놀데는 덴마크와의 국경선 부근의 북부 독일에 있는 Schleswig-Holstein 근처에 거의 평생동안 머물면서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못하고 고독한 작품 세계를 구사했다. 이런 놀데에게 그의 회화의 근원은 언제나 그의 고향이었으며 그의 집 근처에서 언제나 가꾼 정원의 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사랑하였고, 고향 근처를 그린 풍경화에는 언제나 바다가 존재하였다. 이런 모티브를 꾸준히 다루면서, 그가 추구하고자 한 작품 세계는 다음과 같은 놀데의 말에서 알 수 있다.
"나는 나의 작품이 단순한 좋기 만한 일시적인 흥미 이상이 되길 원한다. 즉, 나의 작품이 정신을 고양시키고 감동을 주며 관람자로 하여금 인생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하게 하고 싶다."
따라서, 놀데는 다른 표현주의자들이 시대정신을 지니고 사회적 문제를 주제로 다룬데 비해, 인간 본연의 본질성에 관한 문제만을 상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다루었다. 그가 자서전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심연의 정신, 종교, 그리고 정열을 표현하고 싶은 어쩔 수 없는 열정에 따라 작품을 제작한 것이며 어떠한 투철한 의지나 지식에 의하거나 어떠한 신중한 사고는 하지 않았다.
또한, 놀데는 원시 미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회화에 또 다른 원천을 발견하였다. 1910년부터 종종 민속박물관에서 스케치를 하고 남태평양 같은 미개지를 여행하는 등 원시 미술에 포함된 절대적인 진실과 그로부터 나오는 강력한 힘과 직접적인 표현에 사로잡혔다. 특히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와 물질이나 매체의 특성으로 인해 작품에 더해지는 신선함에 매료되었다. 단순한 형태로 된 원시 미술과 더불어 그에게 영향을 미친 홀더와 뭉크의 작품의 단순한 형태의 표현성으로 인해, 그가 표현하고자 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서 놀데는 형태들을 단순한 요소들로 분해했고, 넓은 지면에서 색채와 통합시켰다.
그러나, 놀데가 표현하고자 한 자신의 깊은 내면의 세계와 그가 평생 추구한 자연의 원천적이고도 근원적인 힘을 표현하기 위헤서 그에게 무엇보다도 적절한 회화의 매체는 색채(Color)였고, 보다 정확히 말해서, 앞에서 언급한 마네, 고호의 영향으로 알게 된 밝고 강렬한 색채의 표현력이였다.
"나는 나의 작품에서 색이 나로 인하여, 자연의 생성이 이루어지는 자연의 논리로써 캐버스 위에 펼쳐지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듯이 놀데는 고정된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색의 표현력 그 자체가 발휘되는 회화를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놀데의 그림에서는 윤곽선을 사용하지 않고 색의 덩어리 또는 색의 소용돌이로 나타나는 윤곽선으로 구성이 이루어진다. 또한 색의 물질적이고 유동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넓은 색면은 뉘앙스(nuance)가 풍부하고 시각적으로 최면적인 효과를 가진다. 따라서 이러한 색은 그 자체을 통해 놀데의 감정이 표현되는 하나의 상징물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놀데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는 방법으로 색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경험을 통한 새로운 재현적인 표현 방법을 구사하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이것은 바다, 구름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더욱 성공적이었다. 이 방법은 사물을 바라보는 하나의 새로운 방식, 즉, 'Noldean Way'를 확립하게 된다.
놀데의 이러한 새로운 방법은 마네, 후기 인상주의로부터 발견되었으며, 원시 미술을 접함으로써 색채에 이국적인 마력을 부여하면서도, 그러한 것에 동화되지 않고 북구의 정신성을 표명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즉, 색채의 힘으로써 자연 이면에 감추어진 힘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이미지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러한 놀데를 일컬어 사우어란트(Sauerlandt)는 독일 민족예술의 개척자라고 일컬으며, 허버드 리드(H.Read)는 동방의 이국 취미와 북구의 정신성을 결합한 고딕 시대 이래 최초의 화가라고 일컫는다.
그러므로, <저녘의 늪 풍경(Marsh Landscape)>같은 놀데의 회화는 야수파 작가중 한 사람인 마티스(Matisse)의 작품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다. 마티스의 것이 완전한 통제된 균형과 질서에 의해 조절된 형식만을 위한 회화라면 놀데의 회화는 균형과 질서는 무시한 채 작가의 세계를 묵시적으로 암시하면서 생동하는 정서적 추이로 변형되었다.
놀데는 1913년에서 다음해에 걸쳐 오세아니아의 여러 섬을 순례하면서 원시 토속문화를 직접 체험하게 된다. 1914년의 [무희 그림이 있는 정물]에 나오는 무희는 그 여행 때에 어디선가 원주민의 춤을 보고, 급하게 화구 상자에 스케치했던 것을 뒤에 다른 정물과 조화시키면서 다시 작품화한 것이다. 흡사 정신이상자로까지 보이는 이 열광적인 여인들은 붉은 머리와 반라의 옷차림에서 더욱 생생한 운동감이 느껴진다.
놀데의 작품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1909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약 20여점이 넘는 종교적인 주제의 작품이다. 그의 종교화는 전통적인 기독교 도상을 과감히 탈피해, 표현주의자다운 화면을 구성하게 된다. 그는 사실적이면서도 무게 있는 그림으로 앙소르, 루오, 고갱과 더불어 현대회화사에서 손꼽히는 종교화가로 불리우게 된다.
1909년에 그린 [오순절]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한 북부 독일의 건장한 농임과 같은 모습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도 신앙의 깊은 체험을 함께 나누며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또한 사람들의 눈은 크고 선명히 그려지고 있다. 서구미슬에서 전통적으로 눈은 마음과 정신의 상징으로서 정신성을 강조할 때는 눈을 크게 그리는데, 이 방식이 여기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성령 강림제》(1909) 《그리스도의 생애》(1912) 《방랑자》(1910~1915) 등의 대표작이 있다.
데포르마시옹
자연을 대상으로 한 사실 묘사에서 이것의 특정 부분을 강조하거나 왜곡하여 변형시키는 미술기법.
데포르메라고도 한다. 원래는 변형이라는 뜻이다. 주로 회화에서 사용하며 특히 P.세잔 이후 문제시되었다. 본래 예술창조에는 몇 가지 서로 반대되는 의식의 방향이 상관적으로 작용한다. 이들의 가장 대표적인 요소로 생각되는 것으로는 ① 예술적 태도로서 주관 ·자아를 중심으로 할 것인가, 객관 ·세계를 중심으로 할 것인가 ② 예술능력으로서 감정표출을 주로 할 것인가, 직관 형성을 주로 할 것인가 ③ 예술수단으로서 모양을 중시할 것인가, 이념을 중시할 것인가 등이다. 그리고 이들 세 가지 요소를 조립함으로써 대략 8종류의 기본적인 예술 창조의 방향, 즉 기본유형을 생각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데포르마시옹이란 이들 유형 가운데서 어디까지나 사실을 근본으로 삼는 입장에서, 다른 여러 유형과의 차이를 표현기법상으로 본 경우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일 뿐, 다른 어떤 유형을 근본적으로 주장하는 견지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데포르마시옹이란 근대 이후에 한정된 기법이나 현상이 아니라 예술의욕 또는 예술의식의 방향이 사실로부터 다른 유형으로 이행할 때 인정되는 것이다. 그리스시대에 모방 기술의 의식으로 뒷받침되던 사실의 조각이 인체의 이상적 형상[典型]의 표현으로 발전하였을 때 거기에 당연히 데포르마시옹이 행하여졌으며, 또 17세기 플랑드르 ·네덜란드 ·에스파냐 등의 회화가 르네상스의 주지적 ·객관적 사실로부터 변하여 주정적(主情的) ·공상적인 바로크의 표출유형을 이룩하였을 때도 마찬가지로 그것은 명확히 제시되었다.
근대 이후 데포르마시옹이 주목된 이유는 인간해방적인 근대문화가 개성의 자유와 자아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추진하였으므로 예술에도 근대 자연주의의 사실에서 출발한 다른 여러 유형에의 분방다기(奔放多岐)한 개성적 전개가 집중된 때문이다. 즉, 자연주의에서 인상주의에의 유형전개, 또는 표현주의, 일부의 포비즘 ·입체주의 ·구성주의 ·초현실주의 등 사실에 의거한 모든 유형 대립이 여기에 나타나며, 데포르마시옹의 다양한 기법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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