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크래식

[스크랩] 포스터 / 금발의 제니

조용한ㅁ 2015. 6. 15. 19:57

Jeannie with the light brown hair

포스터 / 금발의 제니

Stephen Collins Foster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
I dream of 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
Borne, like a vapor, on the summer air:
I see her tripping where the bright streams play,
Happy as the daisies that dance on her way.
Many were the wild notes her merry voice would pour,
Many were the blithe birds that warbled them o'er
Oh! I dream of 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
Floating, like a vapor, on the soft summer air.

2.
I long for Jeanie with the daydawn smile,
Radiant in gladness, warm with winning guile;
I hear her melodies, like joys gone by,
Sighing round my heart o뭙r the fond hopes that die:
Sighing like the night wind and sobbing like the rain,
Waiting for the lost one that comes not again:
Oh! I long for Jeanie, and my heart bows low,
Never more to find her where the bright waters flow.

3.
I sigh for Jeanie, but her light form strayed
Far from the fond hearts round her native glade;
Her smiles have vanished and her sweet songs flown,
Flitting like the dreams that have cheered us and gone.
Now the nodding wild flowers may wither on the shore
While her gentle fingers will cull them no more:
Oh! I sigh for 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
Floating, like a vapor, on the soft summer air.


한송이 들국화 같은 제니 바람에 금발 나부끼면서
오늘도 예쁜 미소를 보내며 굽이치는 강 언덕 달려오네
꿈결같은 제니의 노래소리에 작은 새도 가지에서 노래해
 아~~~~~~~~~~~  한 송이 들국화 같은 제니
금발 머리  나부끼며 웃음짓네.

Roger Wagner Chorale

 

Jussi Björling, tenor (스웨덴) 

 

Jussi Björling, tenor (스웨덴)  

 

Isaac Stern, violin

Columbia Symphony Orcheastra

Milton Katims, cond.

 

Tony, Roy & Johnny

All 3 in "De Capton Races",

Roy Clark does "Beautiful Dreamer",

Johnny does "Way Down Upon The Swanee River",

Tony Orlando Does "I Dream Of Jeannie With The Light Brown Hair",

All Joining in on "Oh Susanna"
This is most fitting with Johnny's Home Place for these songs in this 1976 Christmas Special.

 

포스터 (Stephen Collins Foster, 1826.7.4~1864.1.13)

 

 

미국 작곡가 포스터는 24살의 나이때 19살의 ‘금발의 제니’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얼마 못가 포스터의 낭비벽으로 파경에 이르렀다. 가족과 이별한 포스터는 아내 제니를 그리워하며 시를 쓰고 거기에 곡을 붙였다.
"나는 금발 머리 제니의 꿈을 꾼다. 그 머리는 여름바람의 아지랑이 같다. 제니는 반짝이는 시냇물을 따라 뛰논다. 춤추는 들국화처럼 제니는 행복하다."

미국의 슈베르트라는 포스터는 이 노래를 짓고 38살의 나이로 죽었다. 이 노래는 ‘금발의 제니’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소개됐지만 사실은 제니의 머리 색깔은 금발이 아니었다. 이 노래의 제목은 ‘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이니까 그의 머리는 ‘엷은 갈색’이다.

 

펜실베이니아주 로렌스빌 출생. 소년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이고 14세 때 처녀작 《티오가 왈츠》를 작곡하였다. 1841년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1주일 만에 중퇴하고 음악교사 H.쿠퍼의 지도 아래 베토벤 음악을 연구, 그때부터 가곡을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1844년 《창문을 열어다오, 사랑하는 이여 Open the Lattice, Love》를 출판하였으며, 그 무렵에는 친구들과 함께 합창단을 조직하여 많은 가곡을 제공하였다. 1848년 《오, 수재너 Oh! Susanna》가 100달러로 팔린 것에 자신을 얻어 가곡작가의 길을 택하게 되었으며 그 후 《시골 경마(競馬)》《고향 사람들 Old Folks at Home》《벤조를 뜯어라》(1851) 《주인은 차디찬 흙속에 Massa’s in the Cold, Cold Ground》(1852) 《켄터키 옛집 My old Kentucky Home》《금발의 제니》《올드 블랙 조 Old Black Joe》 등의 작품이 E.P.크리스티악단 및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 등에서 불리어 유행함으로써 그의 이름은 미국 전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남북전쟁(1861∼1865)의 영향으로 그의 작품에 대한 인기가 떨어지고 가정생활의 파탄도 있어 혼자서 뉴욕으로 떠나 거기서 37세라는 젊은 나이로, 빈곤과 괴로움 속에 죽었다. 그의 사후 2개월 만에 유작 《꿈꾸는 가인(佳人)》이 출판되었다. 출판된 그의 작품은 모두 188곡으로 이에는 풍부한 시정(詩情)과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선율 속에 깊은 애정과 인간성이 표출되어 있으며, 유럽적인 감각과 함께 남부 흑인의 생활이나 민요의 영향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미국민요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의 작품은 현재 전세계에서 애창되고 있다. 1939년에 그의 전기적 영화 '그리운 스와니'가 제작되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스와니강 Swanee River'를 Stephen Collins Foster(1826-1864) 자신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 강의 본래 이름은 'Suwannee River'이며 Florida주의 화이트스프링을 끼고 흘러 멕시코만으로 들어간다. 1950년에 포스터 민속 문화 기념관(Stephen Foster Folk Culture Center)이 건립된 곳도 Suwannee River가 흐르는 White(Sulphur) Springs이다. 미국 원주민들이 치료에 효능이 있는 샘으로 여겨 신성시하던 곳이다. 1700년대 까지만 해도 이 유황천에 질병 치료를 위해 온갖 환자들이 모여 들었다.

Teddy Roosevelt도 다녀갔다는 유명한 유원지인 이곳에, 건축가 Mackey White가 설계한 전형적 남부 건물이 지어졌다. 포스터 기념 동백 정원(Stephen Foster Memorial Camellia Garden)도 꾸며졌다. 기념관 건립 이후 후손(포스터의 무남독녀가 3자녀를 낳아 증손, 현손 등 후손이 많다), 친지, 애호가 등 많은 사람들로 부터 기증품과 기부금이 답지하고 있는 중이다. 그 중에는 미국의 화가 Howard Chandler Christy가 기증하여 기념관에 걸려있는 그의 두 작품: 'Beautiful Dremer'와 'Many Happy Days I Squandered' 속에 포스터의 노래가 흐르고 있다.

이곳에는 포스터를 기리는 관광객을 실은 유람선이 떠다닌다. 역사가 짧은 미국으로서는 자랑스런 관광지가 아닐 수 없다. 해마다 이곳에서는 'Florida Folk Festival'이 열려, 고장의 민속과 생활, 전설, 민요, 춤 등 다양한 형식의 축제가 벌어진다. 중요한 연례행사로 2월이면 '금발의 제니' 선발 대회도 열린다. 음악적 재능이 있는 미인을 뽑아 장학금을 수여하는 행사이다. 대회명 '금발의 제니'는 그가 28세이던 1854년 작곡된 '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의 곡명을 딴 것이다.
"I dreamed of 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 로 시작하여 아름다운 여인을 꿈속에까지 그리워하는 서정적인 노래이다. Foster의 노래를 사랑하고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이 대회의 성격에 잘 어울리는 대회명이다.

지구촌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스와니 강, Swanee River'의 원곡명은 '고향의 옛 친구들 Old Folks at Home'이다. 이제는 스와니 강으로 더 알려져 있어서 'Old Folks at Home [Swanee River]' 로 표기한다. 이 노래는 미국 남부 출신의 한 흑인이 방랑 생활을 하며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다, 스와니 강가의 고향 사람들이 그리워 부르는 노래이다. Foster가 25세인 1851년에 작곡된 것이다. 이 악보는 13만장이나 팔리고,
영국에서 유행하여 세계로 퍼졌다. 크리미아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불렀고, 남북 전쟁 때는 북군, 남군 할 것 없이 애창하던 노래였다. Florida의 주가州歌가 'Swanee River'라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Foster가 이 노래의 곡을 먼저 만들어 놓고 가사를 붙일 때의 일화가 있다. 처음에는 South Carolina의 '페디 강'을 생각했다. 형 Morrison은 '야주 강'을 추천했으나 그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결국 두 형제는 미국 지도를 펴놓고 서정적이고 발음하기 부드러운 2음절 짜리 강을 찾기 시작했다. Morrison이 'Suwannee'를 찾았다. 두 형제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Swanee'로 줄여 2음절을 만든 후 가사를 고쳐 썼다. 음운(音韻)으로는 백조의 애칭으로 느껴진다. 그 덕에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으니 음파영동(音波靈動)을 실감나게 한다.

 

대표곡

01. 스와니강
02.Beautiful Dreamer
03. Home, Sweet Home
04. 매기의 추억
05. Camptown Races
06. My Old Kentucky Home
07. Nelly Bly
08. Old Black Joe

09. Jeannie With The Light Brown Hair - Al Jolson

 

Jussi Björling 유시 비욜링

 

 

Jussi Björling (1911-1960) in fact Johan Jonathan Björling, Born in Borlänge where you also can visit his museum and see him as statue in the center of town. He started already as child singing with his father and brothers. His first record as grown up was done in 1929. Sadly he died rather young in his summerhouse in the archipelagoes outside Stockholm. This recording is from 1949 and was recorded at the conserthall of Stockholm.

 

스웨덴 출신의 테너 유시 비욜링은 카루소, 질리를 잇는 금세기 최고의 테너로 손꼽힌다. 북국적인 투명한 목소리를 지닌 그는 이태리 가수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지녔다. 그러나 뛰어난 음색의 아름다움과 독특한 매력은 많은 청중을 매료시켰다. 그는 고음역에서도 목소리가 변하지 않았으며 약음에서의 유연함도 훌륭했다.
그의 아버지 다빗 비욜링은 메트로폴리탄에도 등장한 테너였고 어머니 역시 성악가였는데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비욜링의 형제 올레, 괴스타와 함께 비욜링 남성4중창단을 조직해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그래서 그가 미국 무대에 선 것은 이미 9세 때의 일이었다. 그 사중창단은 한 멤버가 소프라노 소리를 낼 수 없게 되지만 않았어도 번성했을 것이다. 바로 비욜링의 목소리가 변성기를 지나 테너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의 지도를 받아 비욜링은 스톡홀름 음악학교에 1928년에 들어갔고, 1930년 6월에 로얄 스톡홀름 오페라 극장의 <마농 레스코> 공연에서 램프 불을 붙여주는 사람으로 무대에 올라갔다. 그의 공식적인 데뷔는 한 달 뒤에 <돈 조반니>의 돈 오티비오 역을 통해서였다. 몇 달 후에 그는 프라하, 드레스덴, 비엔나, 파리, 브뤼셀, 플로렌스, 런던 등의 주요 오페라 하우스에 데뷔했다. 그의 미국 경력의 시작은 1937년 로렌스 티벳이 리골레토 역을 맡았던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역을 통해서였다.
메트로폴리탄 데뷔는 1938년 11월 24일 <라 보엠>의 루돌포 역을 통해서였다. 그는 즉각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일 트로바토레>, <파우스트>, <가면 무도회> 등을 불렀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동안 스웨덴에 가서 6개월 동안 포병으로 근무했고 1945년에 메트로 돌아와서 <토스카>, <로미오와 줄리엣>,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마농 레스코>, <돈 카를로>를 불렀다.
메트와 1957년까지 노래하기로 했던 계약은 루돌프 빙과의 트러블로 인해 깨어졌다. 그 갈등은 돈 문제에 관한 것이었는데 루돌프 빙의 글에 의하면 "당신은 우리가 지불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많은 돈을 아주 쉽게 요구하는구려." 그러자 유시는 쉽게 걸어나가 버렸다.

많은 사람들은 1958년 3월의 콘서트가 빙과의 타협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뉴욕 타임스는 비욜링의 감동적인 연주회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손자들에게 유시 비욜링의 기량이 최선일 때 그의 노래를 들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게 될 것이다."
그 직후에 있었던 플로리다 여행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쉬라는 권유를 받았다. 다소 의기소침 해졌지만 그는 계속 자신을 몰아부쳤고 목소리는 여전히 힘있었으며 스톡홀름 오페라 극장의 다음 시즌에서 경이롭게 다시 컨디션을 되찾았다. 그러나 1960년 11월 9일 그는 자던 도중 죽었다. 그는 술을 너무 좋아했고 말년에 들면서 주량은 더욱 높아졌으며 건강을 돌보지 않았던 결과 일찍 쇠퇴해져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주 게으른 사람이었다고 한다. 오페라 공연 연습이 있으면 그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빠졌고 공연 거의 직전에 리허설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에도 그는 한 음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불렀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아무도 꺾을 수 없는 고집쟁이이기도 했으며 말수가 적고 완고하며 까다로운 사람이었다는 평도 있다.

그가 가장 주목 받았던 역은 <일 트로바토레>의 만리코였다. 그는 1939년에 그 역을 맡아 코벤트 가든에서 불렀으며 그는 그 공연으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에도 스톡홀름 로얄 오페라 극장에서 이 역을 공연한 바 있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이후 메트로폴리탄에 돌아왔을 때 가장 자주 맡았던 역은 <파우스트>의 파우스트 역이었다. 또한 <투란도트>에도 뛰어났으며 그가 남긴 전곡녹음은 오늘날까지 최상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악보에 있는 그대로를 충실하게 묘사했다. 외부의 이질적인 효과를 배제한 채 악곡 내부에서 그 곡의 특징을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리처드 모어의 말에 의하면 비욜링이 타계할 당시 그의 레코딩 스케줄에는 베르디의 <오텔로>와 바그너의 <마이스터징거>같은 레퍼토리들이 잡혀 있었다 한다. 그는 무거운 역으로 레퍼토리의 폭을 넓혀 나갈려고 계획했었던 듯 하다.
그는 모노에서 스테레오로 전환되던 시기에 죽었는데 몇 년만 더 살았어도 훌륭한 스테레오 녹음을 들여 주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준다.

출처 : 박연서원
글쓴이 : 박연서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