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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부게로

조용한ㅁ 2017. 1. 14. 22:31

윌리엄 부게로

극과 극의 평가를 오가다

레스까페(Rescape) 선동기

http://blog.naver.com/dkseon00/140055351774   2008.09.04

http://blog.naver.com/dkseon00/140055382582   2008.09.05

네이버 파워블로그 <레스까페>의 주인장인 선동기 님은 블로그에 올린 글과 그림을 모아 아트북스에서 <처음 만나는 그림>과 <나를 위한 하루 그림을 펴내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았습니다.


세잔에게 꼴통 중의 꼴통이라고 비난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돌프 윌리엄 부게로(Adolphe William Bouguereau, 1825-1905)입니다. 부게로를 존경했던 이국적인 그림의 대가 앙리 루소가 그냥 지나칠 수 없었겠지요. “미완성 그림만 그리는 주제에…” 앙리 루소가 세잔에게 던진 말이었습니다. 살아서는 화가로서 최고의 명예를 누렸지만 세상을 떠난 후 미술사에서는 흔적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묻혀버렸다가 다시 각광을 받고 있는 부게로의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어쩌면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벌써부터 저의 마음이 부글거리기 때문입니다.


비블리스 Biblis, 1884

물가에 탈진한 상태로 엎드려 있는 이 여인의 이름은 비블리스입니다. 그녀는 아폴론의 아들 밀레토스와 강의 신의 딸 카이네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오빠 카우소스와 함께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가 오빠인 카우소스를 남자로 좋아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동생으로부터 사랑의 편지를 받은 오빠는 놀라 집을 떠납니다. 오빠를 찾아 온 세상을 떠돌던 그녀는 마침내 탈진해서 쓰러졌습니다. 끝없이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본 요정들은 그녀를 마르지 않는 샘이 되게 하였고 비블리스 샘이라고 불렀습니다. 가없는 사랑의 끝에 죽음이 찾아온 그녀의 흰 몸은 그래서 더욱 애처롭습니다.

부게로는 자신의 이름 중에 아돌프를 쓰지 않아서 보통 윌리엄 부게로라고 불립니다. 프랑스 화가들의 이름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국내 자료를 보면 그의 이름을 부게로, 부궤로, 브케르, 브그르, 브그로로 표시를 하고 있습니다. 외국어를 한글로 옮기는 데 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고 보지만 그래도 정리를 하고 싶어서 그 이름에 대한 발음을 여기저기 뒤져보았더니 [boo-ger-oh]가 있더군요. 그래서 저는 '부게로'라고 표시하기로 하였습니다.


어린 도둑들 Little Thieves, 1872

담을 넘어 사과 밭에 가서 사과를 몰래 땄습니다. 언니가 먼저 담을 넘어와서 동생을 안아 내리는 중입니다. 동생은 아직도 긴장을 하고 있는지 얼굴이 붉습니다. 그러나 둘의 표정을 들여다보면 한두 번 해본 솜씨는 아닙니다. 화면 가운데 위치한 모델들의 자세가 너무 안정적이어서 불안감이 없기 때문일까요. 오히려 눈부신 맨발이 안타깝습니다.

음악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천재는 모차르트입니다. 부게로에 관한 자료를 보면 어려서부터 미술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서 모차르트와 같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와인과 올리브기름 상인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그는 처음 학교에 입학해서 받은 노트와 교과서의 여백에 수많은 그림을 그렸고 아이들은 그의 그림에 대해 늘 시끌시끌했던 모양입니다. 따져보면 저도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 페이지마다 그림을 그렸다가 맞은 기억이 많은데... 지금도 제가 아톰이나 타이거마스크, 황금박쥐를 잘 그리는 이유가 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자비 Charity, 1878

상징이 많은 그림들은 보기가 어렵습니다. 도상으로 이미 알려져 있는 것들은 쉽게 이해가 되는데 한 발만 더 내디디면 깜깜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여인이 발로 누르고 있는 돈통과 바닥에 뒹구는 동전들은 ‘돈 그거 별것 아니다’라는 상징입니다. 돈이 행복의 조건은 아니라는 것이죠. 반대편 발 옆에 있는 책은 지식을 뜻합니다. 책을 괴고 잠이 들었지만 아이에게 지식을 전하는 것은 온전히 어른들의 몫이기도 합니다. 열어젖힌 가슴은... 음식?

부게로의 아버지는 대를 이어 그를 상인으로 키우고자 했지만 집안 사정이 급격히 나빠지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친척들 집에 맡길 수밖에 없었는데 결과를 놓고 보면 부게로의 인생행로가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를 맡아준 사람은 삼촌이었는데 그에게 그리스 신화와 고전, 라틴어, 역사, 그리고 성경과 관련된 주제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말등놀이 The Horse Back Ride, 1884

언니가 동생을 등에 태우고 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동생들하고 많이 했던 놀이입니다. 언니는 뭔가에 토라진 동생을 달래려는지 기꺼이 등을 내준 표정입니다. 동생은 언니의 옷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데 표정을 보면 아직 덜 풀린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벌떡 일어나서 동생을 떨어트렸는데 아마 화면 속의 언니는 그런 야만적인 행동은 하지 않겠지요.

삼촌의 도움으로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서 처음으로 그리기에 대한 수업을 받습니다. 훗날 부게로가 “어렸을 때 행복했던 기억은 없었지만 삼촌 집에 있었을 때는 행복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집안 분위기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삼촌에 대해서는 신부로도 되어 있고 큐레이터라고도 되어 있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큐레이터 신부님?


프시케의 환희 The Rapture of Psyche, 1895

정말 절묘한 보라색입니다. 프시케와 큐피드가 두른 보라색 천은 명암의 차이만을 가지고 화면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프시케는 언니들의 꾐에 빠져 잠든 남편 큐피드(에로스)를 불빛을 켜서 확인합니다. 크게 실망한 큐피드가 떠나버리고 프시케는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시어머니인 비너스(아프로디테)를 찾아가서 애원하고 비너스는 온갖 관문을 만들어 프시케를 방해하죠. 아마 이 장면은 마지막 관문을 넘다가 잠의 신에게 걸려 영원히 잠을 자야 할 순간 나타난 큐피드가 프시케를 안고 하늘로 오르는 장면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프시케의 표정은 안도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큐피드의 표정은 좀 딱딱합니다. 혹시 프시케를 떠날 때 자기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어서일까요. “의심이 자리 잡은 마음에는 사랑이 깃들지 못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르도에 있는 미술학교에 입학을 하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빠듯했던 부게로는 상표 디자인 같은 일을 합니다. 학교수업도 아침 이전에만 참석할 수 있었고 밤늦게까지 일을 했는데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나이를 생각해보면 그의 끈기와 근면성이 놀랍습니다. 물론 이런 그의 자세가 그가 아카데미 스타일 그림의 대가가 될 수 있었던 힘이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휴식 Rest, 1879

깨끗하지만 화려하지 않은 옷을 입은 엄마와 아이들 모습입니다. 엄마의 발밑에서 잠든 아이의 모습은 평화로움 덩어리입니다. 빤히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와 엄마는 참 당당해 보입니다. 특히 엄마는 부러울 것 없는 표정입니다. 멀리 보이는 교회의 종소리에 실려 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그럼, 세상 돈만 가지고 사는 건 아니거든...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한 부게로였지만 2등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천재는 다른가요. 졸업 후 파리에 있는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r-Art)에 입학하고 싶었지만 이때도 금전적인 문제가 그의 앞에 손을 번쩍 들고 길을 막아섰습니다. 그러나 그의 삼촌이 이때도 길을 막아선 문제의 팔을 꺾고 길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슈퍼맨 같은 삼촌입니다.


어린 거지 The Little Beggar, 1880

어린 거지 소녀의 퀭한 눈은 이제 그녀의 여린 몸을 지탱하는 것도 힘들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벌린 손은 돈을 요구하고 있지만 구부러진 손가락은 뭐든 손에 쥐어지는 것은 놓치지 않겠다는 표시처럼 보입니다. 소녀의 뒤로 칼날같이 서 있는 산들의 모습은 그녀가 처한 상황 같아서 섬뜩합니다. 이 아이를 위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삼촌은 그 지역 유력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주선합니다. 가격을 정가로 했다고 하니까 비싼 가격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33장의 초상화를 그리고 난 후 부게로는 900프랑을 손에 쥘 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도 바느질일을 해서 아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어머니는 항상 위대합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무서웠습니다. 이유는 뒤에 말씀드리도록 하죠. 드디어 부게로는 파리로 떠납니다.


비너스의 탄생 Birth of Venus, 1879

부게로의 작품 중에서 우리 눈에 익은 것 중 하나입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 같은 모티브를 가지고 그려졌는데, 높이가 300cm이고 너비가 218cm의 작품 크기이니까 실물은 대단하겠지요. 특이하게 남자 인어가 등장했습니다. 소라를 부는 남자들이 인어입니다. 이 그림에는 총 22명이 묘사되어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세어봐도 21명입니다. 그림을 보다가 손가락 구부려가며 사람을 센 것은 처음입니다. 아직도 1명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나저나 수염 난 남자도 인어일까요...?

청운의 꿈을 안고 시험을 봤는데 하마터면 입학시험에 떨어질 뻔했습니다. 100명을 선발하는 시험에서 그의 성적은 99등이었습니다. 시골 천재가 파리에서 한방 먹은 꼴입니다. 시작은 비록 99등이었지만 그의 재능과 근면함이 어디 갔겠습니까? 고고학, 고대의상학, 해부학을 배우면서 그의 성적은 점점 상승했습니다. 물론 파리에 오기 전 피코(Picot)의 화실에서 공부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부게로는 피코의 화실에서 잠 잘 시간이 거의 없이 노예처럼 일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그런 환경에 몰아넣은 듯한 느낌도 있습니다. 요즘 요행하는 말 있죠. “독하다 독해.”


맛만 봤어 Just a Taste, 1895

잠시 후 같이 먹자고 했는데 먼저 한 숟가락을 먹다가 걸린 걸까요? 표정은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눈은 미안한 듯, 약간 겁먹은 듯하지만 꼭 다문 입을 보면 뭘 그까짓 것 가지고 그러느냐는 듯합니다. 아이답습니다.

에콜 데 보자르에서는 매년 우수한 학생 10명을 선발해서 로마에 유학을 보내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입학한 3년째 그는 10명 중 3등의 성적으로 로마에 갈 기회를 잡았지만 국내 문제로 인해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10명 중의 7번째였습니다. 4년간 로마 유학 기간 중 부게로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대작들의 구성과 형태에 대해 집중했습니다. 유학 기간 중에도 그림에 대한 그의 쉬지 않는 근면성과 인내심은 계속되었고 친구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은 시시포스였습니다. 로마에 있을 때 가장 집중했던 화가는 조토였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미술사에서 진정한 천재는 조토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이유는 조토 이야기를 할 때 써보겠습니다. 지난번 로마에 갔을 때 조토의 이탈리아 발음을 듣고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조또, 조토의 이탈리아 발음입니다.


바스크 드럼을 든 집시 소녀 Gypsy Girl with a Basque Drum, 1867

무슨 억울한 일을 당한 걸까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입니다. 올려다보며 애써 참아보고자 했지만 결국 뺨으로 흘러내리고 말았습니다.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군요. 하느님은 여인의 눈물을 세고 계신다고 했으니까 소녀의 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은 큰일 났습니다. 어디선가 저 때문에 울었던 여인이 있다면 용서를 빌어야겠습니다. 눈물이 가득한 소녀의 눈,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로마에서 귀국한 부게로의 그림은 곧 사람들의 인기를 얻습니다. 세밀한 묘사, 특히 손과 발, 피부의 묘사는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냈고 살롱에서 그의 작품은 인기 있는 품목이었습니다. 아카데미 화풍으로 충실하게 그려진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사진처럼 정확하면서도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그림을 그리기 전 주제에 대해 완벽하게 공부를 하고 난 뒤 무수히 많은 스케치를 통해 얻은 노력의 결과입니다. 그냥 만들어지는 대작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기다림 Waiting 1902

200개가 넘는 그의 그림을 보던 중 가장 제 맘에 드는 그림이었습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나와 있지는 않지만 화사한 얼굴과 약간 들뜬 듯한 입가의 미소를 보면 아마 사랑하는 사람이겠지요. 기다림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부게로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일군의 작가들로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합니다. 공격자는 인상파 화가들이었는데 선봉은 드가와 세잔이었습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잠깐 이유를 뒤져볼까요. 19세기 초부터 르네상스 대가들의 미학적인 규범에 맞춰서 새로운 형태를 발전시키고 그것을 공식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주제는 역사나 문화 쪽에 기울어져 있었고 작업을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다시 도제가 도입되었고 미술에 대한 교육 역시 예전 도제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어린 거지들 Little Beggars, 1890

전편에 이어 다시 구걸하는 어린아이들입니다. 뒤에 선 언니의 모습에는 삶의 피곤함이 묻어 있지만 동생은 야무진 얼굴입니다. 한 성질 할 것 같습니다. 구걸을 원하는 손가락도 애처롭지만 유난히도 큰 엄지발가락이 마음을 쓰리게 합니다. 그나저나 앞의 소녀는 부게로의 전속 모델이었을까요? 참 많은 작품에 등장합니다.

규범화되어 있다 보니까 당연히 개인의 창의성보다는 표준화된 기술만 강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 이런 제도에 대한 불만이 젊은 화가들로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인상파가 등장한 것입니다. 인상파의 탄생을 기존 체제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인상파들이 소위 꼴통이라고 부르는 체제가 바로 부게로가 대장인 아카데미파입니다. 그런데 광의로 보면 아카데미파는 어느 시대이든 주류를 일컫는 통칭이기도 합니다.


응석 A Little Coaxing, 1890

꼬마가 뭔가 필요한 것이 있는지 언니에게 응석을 부리는 중입니다. 언니의 얼굴이 환한 걸로 봐서는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하나 남은 노란색 오렌지를 넘보는 것 아닐까요? 언니의 손등에 묘사된 힘줄을 보면서 부게로의 테크닉에 감탄하고 감탄했습니다.

이 두 흐름과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세잔이 부게로에 대해서 막말을 한 것은 이미 소개를 했고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부게로와 앙리 마티스입니다. 부게로가 지도하던 학생 중에 앙리 마티스가 있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아카데미즘에 입각한 그림 그리기는 끈기와 인내를 요구합니다. 당시 아카데미즘을 추종하는 화가 중에서 부게로만큼 학생들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도록 독려한 스승도 없었다고 하는데 마티스는 얼마 못 견디고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부게로는 처음부터 마티스를 격려했지만 마티스의 연약함이 문제였습니다. 화가 난 부게로는 마티스에게 말합니다. “너는 원근법을 다시 배워야겠다. 그러나 먼저 연필 쥐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어. 그렇지 않다면 결코 그림을 그릴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듣는 마티스 참 기분 나빴겠습니다. 그러나 인상파들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드가와 그의 친구들은 고요하고 부자연스러운 외모가 그려진 그림을 보면 “부게로 같다”라는 말로 비웃었습니다.


공부는 어려워 The Difficult Lesson 1884

또랑또랑한 아이가 단정하게 앉아서 책을 보다가 모르는 부분이 나온 모양입니다.. ‘이게 뭐죠’ 하는 듯한 눈이 너무 귀엽습니다. 예술학교에 처음으로 여성을 입학시킨 부게로의 경력을 생각하면 어린 소녀의 책을 읽는 장면도 여성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파리의 살롱은 연간 30만 명이 찾는 곳이었습니다. 살롱에 그림이 걸리고 그 그림이 팔린다면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부게로의 그림은 살롱에서 인기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의 명성은 영국까지 알려졌고 금전적으로도 부유해졌습니다. 드디어 그는 몽파르나스에 큰 집과 화실을 장만합니다.


잘못했어요 In Penitence 1895

손에 먹다 만 과자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혼나고 있는 이유가 짐작이 됩니다. 부끄럽고 무안한 아이의 표정과 얼굴을 가린 손짓에 웃음이 나오지만 뒷맛은 씁쓸합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문제는 가난이 부끄러운 짓을 하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부게로는 31살이 되던 해 마리와 결혼합니다. 마리와의 결혼 생활은 21년간 이어졌는데 둘 사이에 다섯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부와 명예를 얻기 시작하면서도 부게로는 자신이 가난했던 시절을 잊지 않았습니다. 가난하지만 가능성 있는 화가들을 지원했고 나중에는 빈민을 위한 재단도 설립합니다. 그의 그림에 가난하고 소외 받는 계층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들에 대한 따듯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게로는 적어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가한 어린 시절 A Childhood Idyll 1900

무릎에 팔을 괴고 풀피리를 부는 언니를 쳐다보는 어린 소녀의 표정이 압권입니다. 요즘 아역 배우들 못지않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손보다도 작은 발, 신기한 듯 자신도 모르게 번지는 입가의 미소, 화면의 가운데를 지나는 풀밭과 하늘이 맞닿는 선이 주는 안정감, 그냥 편합니다.

부게로의 나이 52살 때 아내 마리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 전해에 막내아이를 낳았는데 폐결핵과 임신 중의 합병증이 원인이었습니다. 갓난 막내아이 역시 두 달 뒤 엄마를 따라 세상을 떠납니다.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싶을 만큼 힘들었을 것 같은데, 아내가 죽던 해 12점, 그다음 해는 17점, 3년째 되던 해 23점의 작품을 그린 것을 보면 부게로는 더욱 그림에 매달린 것 같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난 그해 겨울 부게로는 제자로 12년째 그의 밑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40세의 미국인 엘리자베스 가드너와의 결혼 이야기를 꺼냅니다. 먼저 간 아내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게로의 어머니와 그의 딸이 반대를 하고 나섰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한술 더 떠서 자기가 죽기 전까지 재혼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라고 합니다. 이건 좀 심한 것 아닌가요? 착한 부게로는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를 했습니다. 그러나 2년 뒤 그는 엘리자베스와 비밀리에 약혼을 합니다. 결혼이 아니니까 맹세를 깨뜨린 것은 아니죠?


깨진 물항아리 The Broken Pitcher 1891

참 난처한 일입니다. 우물가에 넋을 놓고 앉아 있는 소녀의 발 옆에는 깨진 물항아리가 있습니다. 잘 들고 왔는데 물을 긷기 위해 내려놓다가 깨진 모양입니다. 깨진 독에 물을 붓기도 어렵고 걱정이 가득한 눈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없고... “살다보면 넋을 잃어야 할 순간이 얼마나 많은데 그때마다 마음을 내려놓으면 나중에는 마음을 들 수 도 없단다”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소녀에게는 아무 도움이 안 될 것 같습니다.

계속되는 무자비한 인상파의 공격에도 부게로는 평온했고 그가 추구하는 절대미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었습니다. 부게로에 대한 공격이 심했던 것은 그의 품성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공과 사에 있어서 항상 정직했고 솔직했으며 권력 남용이나 거짓을 혐오했던 그는 소위 타협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야기를 할수록 부게로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가 호색가라는 소문도 있었고 여성 누드를 그릴 때만 행복해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부게로가 여성을 좋아했던 것은 사실인 모양입니다. (여자 싫어하는 남자도 있습니까?) 그러나 그가 그린 그림 중 누드화는 10%도 안 됩니다. 이런저런 소문에 대해 부게로는 어떤 변명도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예술학교에서 여학생을 받게 된 것은 부게로가 처음 주장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저리 가, 에로스 A Young Girl Defending Herself Against Eros 1880

에로스가 가슴에 사랑의 화살을 꽂으려고 덤비는 것을 여인이 막고 있습니다. 에로스의 화살에 맞아 잠 못 이루는 밤이 얼마나 많은지 여인은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저렇게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알 수 만 있었어도 좋았었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세히 보니까 여인도 필사적으로 막는 눈치는 아니군요. 혹시 속으로는... 에로스의 포동포동한 엉덩이를 찰싹 때려보고 싶습니다.

71살이 되던 해 부게로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납니다. 어머니의 나이는 92세였습니다. 아들이 재혼하는 것을 막던 어머니였는데 좀 오래 사셨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부게로는 바로 엘리자베스와 결혼합니다. 20년을 기다린 대단한 사랑입니다. 엘리자베스는 화가로서의 생활을 접고 남편을 위하여 헌신하기로 합니다. 연설문이나 편지, 서류 작성 같은 비서일도 척척 해냈습니다. 엘리자베스 가드너가 남긴 작품을 몇 점 보았는데 부게로와 아주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게로 선생님 복도 많으셔!

80살이 되던 해 그의 막내아들이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전처 마리와의 사이에 다섯 아이를 낳았는데 그중에서 네 명이 부게로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까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슬픔과 충격은 몇 년 전부터 앓고 있던 심장병에 결정타를 가했습니다. 826점의 작품을 남기고 부게로는 세상을 떠납니다.


사티로스와 님프들 Nymphs and Satyr 1873

이 작품도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것이죠. 사티로스는 허리 위는 사람인데 아래는 염소이고 머리에는 뿔이 있고 귀는 뾰족한, 호색한으로 알려진 말썽꾸러기입니다. 님프들에게 잡힌 건가요? 세 명의 님프는 물가로 잡아당기고 있고 왼쪽의 님프는 밀고 있습니다. 사티로스의 눈은 겁에 질려 있는데 그의 작품 중에서 흔하지 않은 역동적인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나 같으면... 그냥 따라가겠습니다.

부게로가 세상을 떠난 후 일어나는 일을 따라가다 보면 ‘이럴 수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우선 미술관에 있던 그의 그림들이 차근차근 벽에서 내려집니다. 인상파가 득세하던 때였으니까 아카데미즘의 대장인 그의 작품이 눈엣가시 같았을 것이고 당시 관람객들도 그의 작품에서 흥미를 잃었을 것입니다. 그의 명성과 업적은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비방 속에 묻혔으며 그가 세상을 떠나고 10년 뒤에는 백과사전과 역사 교과서에서조차 그의 이름이 사라졌습니다. 다만 그의 작품을 맹목적으로 비난하고 평가 절하하는 자료에만 그의 이름이 남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어린 도둑 Little Thief 1900

몰래 딴 과일을 손으로 감추고 있는 소녀의 얼굴을 보면 당황하거나 하는 표정이 아닙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훔친 것이 아니고 서리를 한 정도라고 보면 될까요? 뭐 이 정도를 가지고... 소녀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거친 맨발을 안아주고 싶습니다. 부게로의 작품에는 귀여운 도둑이 참 많습니다. 커서는 과일이 아니고 좋은 남자의 사랑을 훔쳤으면 좋겠습니다.

“렘브란트는 시대의 영혼을 잡았고, 부게로는 젊음의 영혼을 잡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 거장에 대한 찬사이지만 사후의 운명도 비슷합니다. 렘브란트가 1669년 세상을 떠난 후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이 사라집니다. 100년이 지난 1790년대가 되어서야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지만 경매시장에서는 영국왕립아카데미 초대 위원장을 지냈던 조슈아 레이놀즈의 작품이 렘브란트의 작품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될 정도였습니다.

1960년대부터 부게로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처음 관심을 보인 곳은 역시 경매시장이었는데, 3년 반마다 그의 작품 가격은 두 배씩 뛰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 경매에서 그의 작품 가격이 4배 이상 폭등하면서 그에 대한 본격적인 재발견 작업이 시작됩니다. 1차 세계대전부터 1980년대까지 유럽에서 부게로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흑백사진 속에 남아 있는 그림을 보는 정도였으니까요.


물결 The Wave 1896

바다는 여인의 고향이자 그 자체입니다. 끝없이 밀려오는 물결 앞에 여인은 정물처럼 앉아 있습니다. 움직임과 정지, 인간과 자연, 소리와 정적, 서로 다른 두 가지가 미묘한 조화를 느끼게 합니다. 조금 있다가 여인이 바닷물을 뒤집어쓰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을 이성이라고 하는 걸까요?

드가와 모네는 부게로를 “2000년까지 19세기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기억될 것”이라고 평했습니다. 부게로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냈던 드가였지만 부게로의 실력만큼은 인정한 것이죠. 신랄한 유머와 심미안을 가진 드가의 말이기 때문에 느낌이 좀 다릅니다.

극과 극의 평가 속을 오갔던 부게로 선생님, 돌아가시고 난 뒤의 일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살아생전 즐거우셨고 따듯했고 정직했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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