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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그림들/한국의화가 작품

이철수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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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수 판화와 에세이 2

 


누군가, 이 집에 사람 살 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혼자 오만하면 당연한 노릇
사람 살지 못하고 아무도 드나들지 않습니다.


깨어보니 아침입니다.
어제 아침과 오늘 아침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거기와 여기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매인 데 없는 마음에 집을 짓습니다.


다툼 없이 조용해지고 나 야
그 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마음에 비로소
조용한 소리!


조용하여 깃드는 것이 있 으니
좋은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 길에 눈 비 바람 다 맞고 사는 낡은 부도 하나.
없으면 허전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남을 이기고 쉽게 살기를 꿈꾸다
이제 고요한 존재가 되기를 꿈꿉니다.
그도 욕심입니다
막돌이, 제자리에서
그저 막돌로 살아가는 일이 어려운 것을 알겠습니다.



꽃들은, 혼자 조용히 제 꽃을 제가 피워내는데
사람은, 실없는 이름을 다투느라 소란스럽습니다.
이름 없는 꽃이 어디 있는가?
하는 이도 있지만 이름은 사람이 지어낸 손가락질일 뿐입니다.
꽃 한송이 환히 피어나는 것, 이름 때문이 아닙니다.
진면목은 이름보다 먼저 있습니다. 이름 없이 흔한 것들이
한꺼번에 꽃피어 흐드러지면 그도 장관입니다.
세상에 이름 있는 꽃이 과연 있기는 한가?



눈에 보이는 몸뚱이가 마음을 가려서
마음은 정작 어려운 물건이 되는 것처럼,
눈에는 움 직이고 형상 있는 것이 먼저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새떼를 버리고 빈자리를 보아야 한다니 그도 어려운 노릇입니다.
하지만,그림 그리는 흰 종이가 본래 바탕이듯 허공이 본래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마 음 두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그놈 잡아다 구워도 먹네!



멀고 깊은 자리는 힘들여서 천천히 찾아들어야 깊은 줄 압니다.
그 깊은 데를 차를 달려서 보고 오면 허탕입니다
언제고 다시 가야 합니다.
그렇게 다녀오는 것에는 밟을 답(踏)에 조사할 사(査) 를 써서는 안됩니다.
상선암.
어디나 그 이름 자리는 깊습니다.
거기 이르는 길이, 호젓하고 조용했습니다.
그 자리 일러주시던 이는 지난 봄날 이승 떠났습니다.
다비장,소나무 향기,그 깊은 데 화엄사 언저리 꿈 같습니다. 스님!
그이, 그 깊은 자리로 혼자 가셨습니다.


밖에서 지붕선만 보아도 집에 든 마음을 알겠습니다.
창이 커서 방이 춥겠고 등뼈가 길어 식구가 많고 입이 여럿이라 살림이 넉 넉치 않겠습니다.
공부하는 이들의 집이라 아무것 없고 좌복 위에 사람만 앉아 있습니다.
그 집이 허리가 휘도록 애를 쓰고 공을 들이는데
봄날 꽃소식은 환하게 밝고 사람의 마음 소식은 캄캄하면
억울하고 원통합니다.


너는 여기 있으니 ‘잡’ 소리를 듣지 않는구나.
논밭에 들어 있으면
너도 별수 없는 잡초라 ‘잡놈’이 되는 것이지. 세상 은 그렇게 어렵습니다.
욕 없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잡’ 없는 세상이 갈수록 멀어지는 듯합니다.
대승사 제일 높은 자리 산신각 아래, 마른풀 열매가 바람을 타고 있었습니다.
다시 가보지 않았으 나 그 일가가 거기서 여전히 살고 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적 없이 적적한 자리에 잠시 다녀 간 사람이
무슨 소리를 들었다 하니 마른풀이 실없다 하겠습니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
그대가 내 소리를 들었다 하시는가?


해 전에 성전암에 다녀왔 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사람 떠나간 흔적을 찾는다 하였더니
그 자리에 피고 지는 꽃나무도 웃 고 나이 먹어 의젓하신 나무들도 웃습니다.
자네 왜 걸음하였는지 다 알겠다 하는 기색들이십니다.
뭐 볼 게 있다고 헛걸음을 하시는가? 하는 말씀을 꾸중처럼 듣다가 그 산을 내려와,
길게 뻗은 아 스팔트를 달리다 이런 솔밭 등성이 하나 만났습니다.
그 자리도 물어오시는 바가 있습니다.
―어 이! 성전암 다녀가는 그대는 누구신가?
―알고 가시는가?
―모르고 갑니다!


당간에 내걸린 누더기 한 벌도 일자불설(一字不說)이라......
한 말씀도 아니라지만
―오늘은 누더기에 입이 생겼습니다.


누구나 제 살아온 껍데기 를 버리고
이렇게 이승을 떠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옛적 달마가 동으로 오셨다더니 이제 소문만 남았습니다.
다시 오시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조주의 뜰에 천년 묵은 잣나무 아직 푸릅니다.
다람쥐들 드나드는 것 보니 잣도 벌었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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