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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그림들/한국의화가 작품

박 창돈

» 박창돈 <호심(湖心)> 캔버스에 유채, 162 x 112cm 1990년대 ⓒ 박창돈
황금 노을이다. 붉은 노을이 내리기 전, 바다는 이렇게 황금빛으로 변하며 장관을 이룬다.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배에서는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고, 뒤에 보이는 두척의 배는 황포돛포를 활짝 펼친채 한가롭게 흘러간다. 서정적 정취가 돋보이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박창돈 화백의 고향은 황해도 장연, 주변 경관이 빼어난 몽금포와 장산곶이 지척인 곳이다. 유년기와 소년기를 그곳에서 보낸 후, 해주예술학교 미술과를 졸업한 다음해인 1949년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다. 그의 나이 22살 때였고, 팔순이 되도록 다시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장연은 백령도에서 불과 10Km, '새벽이면 고향집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이라 날씨 좋은 날에는 아스라히 보이는 곳이다. 차라리 보이지 않는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그리움이 덜했을지 모르지만, 인천에서 배를 타고 4시간 가면 손에 닿을 듯 보이는 곳이니 그의 향수은 다른 실향민들 보다 더 컸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눈 앞에 보이지만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바다를 그렸다. 황해도 앞바다에는 석도, 호도, 율도, 어화도 등 크고 작은 섬이 160개나 모여있어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한 곳이기에 작품의 명제를 '호심'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향에서 직접 그린 '진경'이 아니라 가슴 속에 남아있는 '추억'으로 그린 작품이기에 화폭 아래에 한무리의 백조를 그렸고, 백조의 날개짓은 고향으로 날아가고 싶은 그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해가 산봉우리 아래로 내려간다. 고기잡는 어부들이 그물을 거두며 구성지게 뽑아내는 '몽금포타령'이 귓가에 들리는 듯 하다.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드니
금일도 상봉에 임 만나 보겠네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임 만나 보겠네

갈 길은 멀구요 행선은 더디니
늦바람 불라고 성황님 조른다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성황님 조른다

바람새 좋다구 돛 달지 말구요
몽금이 포구에 들렀다 가소래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들렀다 가소래

달은 밝구요 바람은 찬데요
순풍에 돛 달고 돌아를 옵네다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돌아를 옵네다

» 박창돈 <풍요의 강변> 캔버스에 유채 145 x 97cm 2000년 ⓒ 박창돈

황해도는 농토가 비옥하고 벌판이 많아 재령평야, 연백평야 뿐 아니라, 소규모 평야들이 많다. 화가의 고향인 장연도 은율, 옹진과 함께 비옥한 농토가 펼쳐진 곳으로 황해도 곡창지대 중의 한 곳이다. 그래서 가을걷이가 끝난 후 벌이는 풍물굿이 옛부터 성행했다. '황해도 장연풍물굿'이라고 불리는 이 놀이는, 각 마을에서 출발하여 길놀이굿을 한 후, 씨뿌리기, 모심기, 김매기, 참새쫓기, 물고다툼, 가을걷이, 마당도리깨질 등의 농사놀이를 여러 마을 풍물패가 번갈아 연행할 정도로 웅장했으니, 장연에도 드넓은 평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작품의 명제가 '풍요의 강변'이니, 산 아래 짙은 노란색 부분이 일몰 전에 황금빛으로 변한 강물이다. 사진작가들이 일몰 때 강을 찍은 사진을 보면 이렇게 황금빛이다. 따라서 화폭 속의 황금빛은 상상속의 이미지가 아니라 화가가 어릴 때부터 봤던 실제의 이미지,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 땅에 흐르는 강과 가을걷이가 끝난 평화로운 벌판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향수> 일부

» 박창돈 <언덕의 노래> 캔버스에 유채 73 x 53cm 1990년대 ⓒ 박창돈

고향을 잃고 가족과 헤어진 실향민의 아픔과 한은, 다른 사람들이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깊다. 현재 생존해있는 실향민 1세대를 대략 170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70세를 넘긴 고령자가 대부분이다. 분단된지 6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들의 소원은 살아 생전 고향 땅을 밟고 피붙이 얼굴 한번 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많은 실향민들은 이산가족 상봉 때 소개되는 애절한 사연과, 헤어질 때 손을 붙잡고 차마 놓지 못하는 장면을 보며 통곡하는 것이다.

<언덕의 노래>는 그런 실향민의 아픔과, 꿈에서라도 고향을 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그린 작품이다. 기차길도 막히고, 뱃길도 막히고, 자동차 길도 막혔으니, 어두운 밤에 말을 타고 달려서라도 새벽 어스름에는 고향집엘 도착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화가는 화폭 아래 집들을 그 옛날 고향을 떠날 때의 형태인 초가집으로 표현했고, 화폭 위에는 오랜 세월을 상징하는 조선백자 달항이를 떠오르는 해 대신 그렸다.

» 박창돈 <정(靜> 캔버스에 유채 53 x 73cm 1990년대 ⓒ 박창돈

초가집은 어린 시절의 정겹던 추억이 담겨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고 오리떼들만이 마당을 서성일 뿐이다. 세월이란 이런 것일까? 기억 저편에 있던 추억은 이렇게 세월 속에 사라진 것일까? 밤이면 들려오던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도,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도, 동생들의 칭얼대던 울음소리도, 이제는 다 사라졌을거라는 화가의 애절하고 쓸쓸한 생각이 화폭을 감싸고 있다. 화가는 이 작품에서는 조선백자 달항아리를 어둡고 희미하게 표현하여,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지고 있음을 암시했다. 오랫동안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온 화가의 아픔이 아련하게 나타난 작품이다.

» 박창돈 <소녀의 꿈> 캔버스에 유채 80 x 116cm 2000년 ⓒ 박창돈

고향을 이야기 할 때 빠질 수 없는 부분이 풋사랑의 추억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벌개지면서 가슴이 설레이던 순수한 감정이었기에, 풋사랑의 추억은 아름답다. 그래서 화가는 고향에 갈 수 없는 아픔이 깊어질 수록, 풋사랑에 대한 기억과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며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소녀도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을거라는 희망과 함께, 물동이 속에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인 피리부는 소년으로 그려 넣었다. 비록 세월이 흘러 기억이 아득해도, 풋사랑은 영원히 변치않는 고향의 추억임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 박창돈 <운해(雲海)의 일출봉> 캔버스에 유채 145 x 97cm 1990년대 ⓒ 박창돈

동해의 해돋이를 이렇게 장엄하게 그린 화가가 있던가? 아침 해가 솓아 오르는 구름 밭을 이렇게 웅장하게 그린 화가가 있던가? 오랫동안 화폭 속에 우리 민족의 원초적 정서를 표현하고 싶어했고, 그런 노력을 끊임없이 지속했던 박창돈 화백이기에 그려 낼 수 있는 작품이라해도 과언이 아닌, 화가의 득의작이자 대표작이다. 더우기 칠순을 넘긴 나이에 완성한 작품이니, 그림을 향한 그의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리나라 고유의 진경산수화를 만들어 낸 겸재 정선 역시 칠순이 넘어 그린 작품에 득의작과 대표작이 많으니, 나이가 들 수록 보다 근원적인 것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지기 때문이리라.

» 박창돈 <해돋는 천지> 캔버스에 유채 162 x 112cm 2000년 ⓒ 박창돈

이 작품 역시 칠순이 넘은 나이에 완성 시킨 대작으로, 역사성, 민족성, 회화성을 모두 갖췄다. 말을 타고 사냥하는 모습에서는 고구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웅대한 기상이 느껴지고, 해돋는 백두산 천지에서는 화가의 간절한 통일염원을 엿볼 수 있다. 여백이 있는 듯 하면서도, 광화문, 석탑과 같은 민족의 문화유산, 소나무와 초가 마을의 향토적 정취 그리고 백두산 천지까지 그려넣음으로써 남북한 전체의 풍광을 담았으니, 남북한 어느 미술관의 현관에 전시되어도 부족함이 없을 훌륭한 작품이다.

그렇다. 갈 수 없는 고향은 화가 박창돈 그림의 원천이었고, 그는 실향의 아픔과 한을 민족정신과 역사정신으로 승화시켜, 한국현대미술사에 흔치 않은 서사적 작품을 남겼다. 부디 그가 고향을 갈 수 있는 그날까지 건강을 유지하여, 또 하나의 웅대한 서사적 작품을 그릴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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