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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수필.기타

아버지의 추억/김 훈

 

 

아버지를 묻을 때 나는 육군에서 갓 제대한 무직자였다. 벌써 30년이 되었다. 아버지는 오래 병석에 누워 계셨다. 병장계급장을 달고 외출 나와서 가끔씩 아래를 살펴드렸다. 죽음은 거역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그 언저리에 와 있었다. 아래를 살필 때, 아버지도 울었고 나도 울었다. 관이 구덩이 속으로 내려갈 때 내 어린 여동생들은 따라 들어갈 것처럼 땅바닥을 구르며 울었다. 불에 타는 듯한, 다급하고도 악착스런 울음이었다. 나는 내 여동생들을 꾸짖어 단속했다.

  ―요사스럽다. 곡을 금한다.

  내 아버지께 배운 말투였다. 여동생들은 질려서 울지 못했다. 아버지의 관이 내려갈 때 나는 비로소 내 여동생들의 ‘오빠’라는 운명에 두렵고도 버거운 충만감을 느꼈다. ‘오빠’라는 호칭은 지금도 나에게 두렵고 버겁다. 나는 그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지금은 한식날 아버지 무덤에 성묘가서도 나는 울지 않는다. 내 여동생들도 이제는 다들 나이 먹어서 울지 않는다.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3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어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울지 않았고, 우리가 울지 않는 세월에도 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람들이 울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내 아버지는 공회전과 원점 회귀를 거듭하던 한국현대사의 황무지에 맨몸을 갈았고, 비명을 지르며 그 시대를 좌충우돌했다. 그의 생업은 신문기자이거나 소설가였는데, 밥을 온전히 먹을 수 있는 노동은 아니었다. 그는 장강대하(長江大河)의 술을 마셨고, 이승만 정권, 장면 정권, 박정희 정권을 향해 활화산과도 같은 저주를 품어냈다. 폐지 수거하듯 매절원고를 몰아서 원고료를 잘라먹는 출판업자들과 외상값을 독촉하는 술집주인들, 호적초본을 떼어주면서 턱으로 사물을 가리키는 구청직원들, 껌을 씹으며 병실에 들어오는 간호원들을 그는 이를 갈며 증오했다. 그는 문협 이사장 선거와 예총 회장 선거를 증오했고, 신문 연재소설이나 대학 선생자리를 얻으려고 쇠고기 몇 근을 싸가지고 권력자를 찾아다니는 자들의 가엾은 몰골을 연민했으며, 소인잡배 들끓는 한국문단을 버러지처럼 경멸했다.

  아버지는 한 달에 두어 번씩만 집에 다녀갔다. 아버지가 오시는 새벽에 나는 주전자를 들고 시장에 가서 해장국을 사다드렸고, 아버지가 누운 방 아궁이에 장작불을 땠다. 새벽에 오신 아버지는 나에게 천자문을 써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어디론가 또 나갔다. 우리는 아버지의 행선지를 묻지 않았다. 우리가 셋방에서 이사를 할 때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며칠 후 복덕방에 물어서 찾아오곤 했다.

  “너희는 배산임수를 모르느냐?”고 아버지는 우리를 야단쳤다. 아버지는 돈이 생기면 장안의 술값을 다 냈다. 나는 아버지를 찾으러 나갔다가 술집에서 만난 적도 있었다. 홀 전체의 술값을 내는 아버지를 보고, 나는 언제나 좀 저래보나…며 숭앙했다. 상하이 임정에서 한 생애를 보낸 아버지는 김구의 기일이 되면 효창공원 묘소에 가서 술을 마셨다. 아버지는 땅에 쓰러져 “선생님 선생님”을 부르며 새벽까지 울었다. 청년 작가 김승옥이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발표했을 때 아버지의 문인 친구들은 우리집에 모여서 술을 마셨다. 그들은 ‘김승옥이란 녀석’의 놀라움을 밤새 논했다. 새벽에 아버지는 “우리들 시대는 이미 갔다”고 외치면서 울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담배를 배웠다. 다른 아이들이 권련을 피울 때 나는 아버지의 파이프를 훔쳐서 피웠다. 학교에서 파이프를 피우다가 선생님한테 뺏기고 벌을 섰다. 다음날 아버지가 학교에 와서 파이프를 받아냈다. 아버지는 그 파이프를 나에게 돌려주셨다. 그때 아버지는 말했다.

  ―학교에는 가져가지 마라. 너, 담배 줄여.

  아버지는 자상하지 않았고 가정적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난했고 거칠었고 늘 울분에 차 있었다. 아버지는 그 불모한 시대의 황무지에 인간의 울분과 열정을 뿌리고 갔다. 나는 언제나 그런 아버지의 편이었다. 아버지의 육신도 이제는 풍화가 끝나 편안할 것이다. 지난 한식 때 새로 심은 잔디가 잘 퍼져 있다.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

 
 

 

소설가 김광주(사진 왼쪽)와 그의 아들인 소설가 김훈.

얼마 전 우연한 일로 소설가 김훈과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었다. 그는 기자에게 오랫동안 ‘작고한 소설가 김광주의 아들’로 기억돼 왔으나 어느 사이엔가 김훈을 떠올리면 김광주가 뒤따라 기억나게끔 바뀌어져 있었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간 뒤 화제가 자연스럽게 그의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문학기자 초년병 시절 기자는 홍은동 산 중턱에 있던 김광주의 집을 두어 차례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때 김광주는 중앙일보에 ‘경천동지(驚天動地)’를 풀어 쓴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흔들리고’라는 제목의 무협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집은 겉보기에도 가난에 찌들 대로 찌든 흔적이 역력했고, 김광주는 병색이 완연한데도 원고에 매달리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가 쓴 ‘정협지’ ‘비호’ 같은 대하 무협소설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던 시절이었고, 아무나 맡을 수 없는 신문 연재소설을 계속해서 집필하는 작가의 모습은 아니었다.

기자에게는 그것이 두고두고 의문이었다. 더구나 해방 후 ‘문화시보’ ‘예술조선’ 등 잡지를 발행하는가 하면 한동안 경향신문의 문화부장·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했고, 오랜 세월 문단 술꾼들의 술자리 중심에는 항상 김광주가 호기롭게 버티고 있었으니 말이다. 김훈은 그 까닭을 ‘술-병고-가난’의 악순환으로 풀이했다.

하지만 김광주의 불우한 말년은 그의 지나온 삶과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광주는 1910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의사를 지망했던 듯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남양의대에 입학하지만 중도에 그만두고 귀국해 1932년 문단에 데뷔한다. 처음에는 시를 썼지만 이듬해부터 소설로 방향을 바꾸었다. 몇 년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 것은 아마도 중국문학을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공부를 중단하고 만주로 간 김광주는 한동안 김구 휘하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도 했다. 김광주는 해방 후부터 본격적인 소설을 썼지만 1960년에 들어서면서 중국소설의 번역 번안에 매달리더니 마침내 독자적인 무협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무협소설은 꽤 오랫동안 김광주만의 아성이었다.

그러나 그처럼 많은 베스트셀러를 내놓고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당시 출판계의 관행이었던 매절 풍토 때문이었다. 저자가 일정한 원고료를 받고 판권을 팔아넘기면 책이 아무리 많이 팔려도 저자에게는 아무런 소득도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나 그의 생활 형편을 갈수록 어렵게 한 것은 술이었다. 그 자신이 술을 즐기기도 했지만 그의 주변에는 항상 술꾼들이 들끓었다.

방송작가 유호, 연극연출가 이해랑, 시인 김관식 등 이웃의 술꾼들도 그렇지만 멀리서 홍은동 산꼭대기까지 찾아오는 술꾼들도 부지기수였다. 중학교·고등학교 시절 거의 매일 술심부름을 도맡아야 했던 김훈은 그 무렵 김관식이 술에 잔뜩 취해 아버지뻘의 김광주를 가리키며 ‘쓰레기 같은 무협소설만 쓰는 작가’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을 때 가장 서글펐다고 회고했다.

차츰 건강이 나빠지던 김광주는 1960년대 후반 암 판정을 받지만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할 정도로 가세는 기울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석의 그를 문병한답시고 찾아온 손님들은 술판을 벌이기 일쑤였다. 김광주가 홍은동 집에서 숨을 거둔 것은 73년 12월 17일이었다. 63세였다. 그보다 두어 해 전 고려대 영문학과 4학년이던 김훈은 집안 형편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학교를 자퇴하고 군에 입대해 있었다. 그가 아버지의 부음을 들은 것은 병장으로 만기제대를 불과 며칠 앞둔 때였다.

김훈은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와 장례준비를 서둘렀으나 집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상객은 많았으나 부의금을 내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외상으로 마련한 술과 음식만 축내고 돌아갔다. 아버지를 매장할 묘지를 구해야 했으나 수중에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어렵사리 묘지를 물색해 사정을 설명하고 묘지 값을 할부로 갚아 나간다는 조건으로 매장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장례를 치른 후 이듬해인 1974년 2월 한국일보에 입사한 김훈은 13개월 만에야 묘지 대금을 완납할 수 있었다. 그는 ‘세상에 아버지의 묘지를 할부로 구입한 아들이 또 있겠느냐’며 허탈하게 웃었다. 김훈은 그의 아버지 김광주를 가리켜 ‘어지러웠던 한 시대의 대표적인 피해자였다’고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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