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그림들/외국의화가의 작품

Kathe Kollwitz (1867~1945):

조용한ㅁ 2008. 7. 28. 10:56

 

 

팔을 고인 자화상(1920년경)

 

Kathe Kollwitz (1867~1945): 미술의 기능과 역활을 사회 속에 제고시킨 작가로

20세기 현대미술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독일 출신의 판화가

(판화의 세계를  독보적인 위치로 끌어올려다는 평가를 받는) & 화가

 

 콜비츠는 흰색과 검은색의 작가였음에도 그녀의 판화 대부분은 딱딱한 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광선에 의한 명암의 대비만으로 완벽한 분위기를 연출하므로써 어떤 색채 그림보다

 훨씬 다채롭고 감각적이고 회화적이다. 그래서 잠재적 색채화가라고도 불리운다.

 

 

  

 

프롤레탈리아 미술의 선구자 혹은 어머니로 불리우는 케테 콜비츠는 주로
노동자와 농민등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진실을 과장없이 생동감있게 표현하는 작품 활동을

했지만 1백점이 넘는 자화상도 남겼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빗대어 내면풍경을
형상화한 자화상 또한 시대의 고통을 증거하는  현실 참여 작품이라고..

 

"자기 자신을 묘사하려는 이런 충동을 일종의 자기연민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케테 콜비츠의 자화상은 오히려 어떤 인생 그리고 또한 어떤 시대에 대한 답변이자 증언이며,

검증이요, 시금석에 더 가깝다."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자유주의적 기질을 가진 중산층 집안(법관이었던 아버지는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사회주의자외할아버지의 삶에 감동 받아 목수로 전직했다)출신이지만,

베를린의 한 달동네에 자선병원을 차리고 가난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한 의사 카를 콜비츠와의

결혼으로 노동자들의 삶과 진실에 눈 뜨게 되면서 현실 참여적인 작품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외할아버지 율리우스 루프(Julius Rupp)는 1846년 복음주의 신앙의 뿌리가 깊은 쾨니스베르크에

최초의 자유신앙  교구를 일으켰던, 이로인해 국가와 교회의 박해를 받았지만 자신의 신조를

끝내 굽히지 않았던 고귀한 품성을 지닌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한다.

 

 

 

 

 

 

1898

 

 케테 콜비츠의 작품의 전형이면서 당시 시대미감을 응축시킨 걸작으로 평가받는
초기 산업화 시대의 자본가와 수공업자들 간의 갈등을 기본 축으로, 석판과 부식동판기법을 사용해
4년(1893~1897)에 걸쳐 제작된 '직조공 봉기'(궁핍, 죽음,모의,행렬, 돌격, 종말의 6편으로 구성된 연작)
가1898년 베를린 미술대전에서 대상으로 선정되지만, 황제 빌헬름 2세가 콜비츠의 미술은
시궁창 미술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드레스덴에서 독일 최고의 미술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진가를 재확인했다고..

 

당시의 독일은  '노동자들도 인간이다' 라는 선언만으로도 혁명고무죄로 몰리던 때였다.

 

 

 

 

 

자화상/pen and brush with black ink(1900)

 

 

콜비츠는 당시의 '선진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이 나아갔던 방향과는 반대로

해체되지 않은 형상을 보존해 예술적 감성과 인간적 감성, 즉 동감이 일치되도록 하는 작품을

추구했는데, 예술을 위한 예술에는 반대했다고 한다.

 

 

 

 

Self Portrait with Hand on Forhead/etching&drypoint(1910)

 

 "묘사된 대상에 자기를 동일화시키려는 노력, 해체되지 않은 인간의 형상을 보존해

예술적 감정과 인간적 감정이 일치되도록 하려는 이러한 노력이 치열한 성실성으로부터 비롯된

예술의 위력을 한껏 발휘한다." 
 

 1912

 

 "예쁘장한 장식적인 미술에만 길들여진 있는 문맹자(?)들을 제외한다면, 콜비츠의 존재는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삶은 곧 투쟁의 현장이고 또 아름다움의 동의어였다.

히틀러의 만행에 반기를 들면서도 그는 미술가로서 시대를 중언했다. 개인적인 핍박은 얼마든지

감수해야 할 부산물이었다."

 

 

석판화(1919)

 

자신의 예술활동은 구제받을 길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일말의 책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 콜비츠는
지배계층에 봉사하는 미술이 아닌 항상 고난받는 인간의 편이 되어 민중미술가로 일생을 살았다.
 

 직조공 봉기 같은 어두운 시대를 증거하는  현실 참여적인 작품 활동을 끝없이 했던 이유는
빈곤과 병마와 죽음은 결코 노동자 개인이나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는 자각의 결과라고..

 

 강인한 모성같은 힘을 느끼게 하는..

 

 

 

 생각하는 여인(석판화/1920)

 

 "케테 콜비츠의 작품은  인간, 인간이 철처히 지배하는 인간이 중심인 작품이다.

본질적인 것, 느낌을 강렬하게 표출 시키기 위해 부수적인 것들을 모두 사장 시키는 구성 방식을 택한다.

해가 갈수록 작품은 무게가 더욱 가중 되었으며, 반면 선은 더욱 절제되었다."

 

인간이 작품의 중심인 예술의 위력

 

 

 

 

 

 

1921

 

 

목판화

 

목판화/1924 

 

"약 1904년 이후부의 자화상에서는 점차 '단순한' 사적 요소가 자취를 감추고 그녀의 얼굴이

그녀가 작품에 등장시킨 가난한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닮아갔다는 점이다.

이때 점자 두드러져 표출된 특성을 단순화 시켜 말하자면 세련이나 감상이 배제된

묵직함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생활이 여성 노동자들에 얼굴 모습에 남겨 놓은 일종의 남성적인 면모가

그녀 자신의 얼굴 모습에도 각인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Self Portrait with Hand of Death/1924

 

케테 콜비츠는 일생동안 죽음과 대화했다고 그녀의 여동생(언니?)이 회고했는데,

특히 말년에는 오로지 그런 대화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그녀는 죽음, 죽는 것에 대해 두려워했지만 그러나 종말에 대한 갈망 또한 그만큼 컷다고..

 

 

 

 

 

1924

 

 

 1930년대 초

 

 

 

 

 

이중 자화상/동판화(1932?)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느낌을 주는..

 

 

 

 

 

목탄화(1934)/너무나 지쳐있는..

 

 

 

 

죽음이 부른다/석판화(1934~1935/'죽음' 연작의 8번째 그림)

 

고릴라 같은 동물적 면모를 자신의 얼굴 모습에 부각시킨, 고갱의 '타이티 사람들'을

연상 시키는 원초성을 지닌 작품으로 가공되지 않은 본질을 포착하여 그 특성을 새겨 넣은

탈 인생이 중압이 고요히 실힌 작품이라고..

 

 "죽는다는 것, 오, 그것은 나쁘지 않다.(1942년 12월의 일기에서)

 

 

 

 

 

Self-portrait in profile facing right /석판화(1938)

 

둔하고 내향적이고, 아무 광채도 아이러니도 고집도 없는 모습의 이 노년의 자화상은

콜비츠가 '늙은 사자'라는 이름을 붙였던 램브란트 후기 자화상과 비슷하다고..

 

  "어머니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삶 전체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아주 나이 든 사람은 내향적이고 무감각하다.

그렇다. 그러나 덧 붙인다면 이 내향적인 것은 아주 순수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어머니의 존재가 늘 그러했듯이."(케테 콜비츠)

 

 

 

 

 

 

 애도(1938~1939)/1920년에 석판화로 제작된 '생각하는 여인'의 모티브를 재수용한 부조 작품으로

우울한 심경이 밖으로 표출된 석판화와는 달리 생각과 비애, 정적과 침묵이 구체화된 작품이라고..

 

"늘상 그렇듯이 누군가를 묻고 애도하고 비통하게 울지는 않으면서 항상 내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내일이면 이러한 감정은 더 이상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자.모든것은 지나간다."(케테 콜비츠)

 

 

 

 

 

부모(블라슬루 프레드보�의 군인묘지에 세워진, 콜비츠가 무려 17년이란 생애를 쏟아부어

만든 조각작품)/공식적으로 전시된 사적인 기념비라고 할 수 있는(주문에 의해 제작된 작품이

아니라고) 이 조각 작품은 케테 콜비츠 작품들 중 예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그녀 자신에게는 아주 절실하고 필요했던 작품이었다고 한다.

 

케테 콜비츠의 아들도 1914년 제1차세계대전 중 전사했다.

 

"페터의 기념비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해야 한다. '새로운' 형식으로 표현할 생각은 없다.

내용이 형식이라는 말을 과거에는 늘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지만, 그 말이 진실이었던 적이

한번이라고 있었던가? 새로운 내용에 대한 새로운 형식이 요즈음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일기, 1917년 9월9일)

 

 

 

"사람이란, 불행을 겪기 전에는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것 같다. 순전히 자기 의지에 의해서

변신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변화란 더디게 일어나는 것인가 보다."

 

"나의 조각 작품은 단지 판화의 자리바꿈 아닌가?"(당시 콜비츠가 조각을 시작하는 것을

 애석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부모/석판화(1920)

 

1914년 제1차세계대전에 종군한 아들 페터의 죽음은 그녀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으로 작용하여,

포스트 '전쟁은 이제 그만!과  유명한 이 '전쟁' 연작 작품 등의 발표를 통해

반전 평화운동을 했다고..

 

 

 

 

 

부모('전쟁' 연작의 세번째 작품)/목판화(1922)

 

"그때부터 시작하여 나는 늙기 시작하여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더 이상 똑바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꺽여버렸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저 아래로 가고 있나 보다"(1917년 10월 12일 일기)

 

 

 

 

 

 

 "너희들, 그리고 너의 자녀들과 작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우울하구나.

그러나 죽음에 대한 갈망도 꺼지지 않고 있다.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게 줄곧 행운을 가져다주었던 내 인생에 성호를 긋는.

나는 내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이제는 내가 떠나게 내버려두렴. 내 시대는 이제 다 지났다."(케네 콜비츠)

 

 

 

    

 

 

 

 

 

 

  

 

자화상

 

 "이 세계에 가장 탁월하고 아름다운 판화를 남겨놓은 케테 콜비츠의 삶은,
지구상에 새겨진 가장 아름다운 판화이다."

 

 

 

글 출처:케테 콜비츠(실천문학사),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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