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그림들/외국의화가의 작품

마티스

조용한ㅁ 2008. 8. 23. 15:33

 
"예술가에게는 모든 것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볼 수 있는 용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마치 아이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평생토록 그렇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앙리 마티스는 1869년이 끝나는 날 밤에 프랑스의 북부에서 곡물상을 하는 아버지와 아마추어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에는 그림이 뭔지도 모르고 그렸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젊은 시절의 그는 자신에게 그림에 대한 소질이 있는 지 조차도 몰랐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재능을 늦게 발견하는 천재들이 많은가 봅니다. 여러분도 다시 한번 자신을 들여다 보세요. 여러분 자신 안에 있는 재능은 어떤 것인지…
18살이 되는 마티스는 법률학을 공부하여 법률시험에 합격한 후 법률 사무실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병으로 일을 그만두고 병원에 입원하던 중 같은 병실을 쓰던 환자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그림에 대한 욕망이 생겼다고 하네요. 참으로 평범하면서도 특이한 시작이죠.

1891년 파리의 에꼴 데 보자르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한 그는 처음엔 푸생이나 샤르댕 같은 보수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던 중 유명한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 후에 소개할 예정입니다. ) 에게 발탁되어 그에게서 그림을 배우게 됩니다. 드디어 자유로운 색채 화가로서의 길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책이나 수집하는 작품등을 통해 피사로나 시냑, 세잔, 고흐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인상주의자들이 보던 빛과 색채의 자유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죠. 당시에는 같은 야수파로 불린 드랭이나 블라맹크와도 교류하면서 강렬한 색채와 형태의 자유로움을 실험했습니다. 이들과 함께 시작한 이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었습니다.
특별히 1904년부터는 남부 프랑스에서 지중해의 찬란한 햇빛과 색채의 낭만에 젖어 들기 시작하자 그의 그림은 더욱 자유로와졌습니다. 이 때부터 유명한 그의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가히 색채의 해방이라 표현할 수 있는 그의 그림들은 물체 고유의 색을 부정하고, 화가가 느끼는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색채가 그의 캔버스 위에 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야수파 화가들 중에서 마티스만이 색채의 조화와 세련된 소묘력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성취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경쟁자를 꼬집어 낸다면, 단 하나 피카소를 들 수 있죠. 이 두 예술가는 반세기에 걸쳐 조심스레 우정을 지키고, 서로의 작품에 경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1945년에는 합동 작품전을 열기까지 했습니다.
노년에 접어든 마티스는 몸을 거동할 수 없게 되면서 색종이를 이용하여 새로운 기법으로 작품을 제작하게 됩니다. 특히 관절염과 내장 장애로 인해 거동조차 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병상에 누워 종이를 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8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색종이 그림을 통해 간결하고도 대범한 구획 속에서 고전적인 질서를 보여줍니다. 마티스의 색종이 그림은 색의 즐거움이 두드러지는, 그의 작품 세계의 완결이라고 표현될 수 있습니다.

 

달팽이]
수 없게 되자 가위와 색종이를 들었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색종이에 밑그림을 그리고 가위로 오려 그만의 독특한 색채의 조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순수한 색채의 색종이로 시작한 또다른 자유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가위가 연필보다 더 감각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천천히 휘돌아 나가는 색종이의 배열이 달팽이를 연상시킵니다.

 

음악]
음악이란 제목에 걸맞게 악보가 그려지고, 기타가 연주되는 듯 합니다. 마티스는 이 작품속에서 곡선과 직선의 하모니를 통해 화면속에서의 음악적 조화를 이루려 하였습니다. 이는 그림을 보며 음악을 느끼게 하겠다던 칸딘스키의 생각과 통하는 듯 합니다. 강렬한 색채 대비와 여성의 포즈가 인상적입니다.

 

 

붉은 실내]
붉은 색을 주조로 하여 그린 그림입니다. 그는 타는 듯한 붉은 색을 통해 순수한 관능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림의 뒤 오른편에는 자신의 작품 <파인애플>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티스는 쇠라나 세잔처럼 종종 자기의 작품을 화면에 등장시켜, 새로운 작품 속에서 또다른 조화를 꾀하였습니다.

 

 

댄스]
러시아의 무역상인 시츄키의 의뢰에 의하여 그려진 이 작품은 모스크바에 있는 저택의 계단을 장식하기 위하여 그려진 것입니다. 손을 맞잡은 5명의 댄서들의 포즈가 아라베스크의 문양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푸른색과 초록색, 붉은 색의 활기 있는 조화가 리듬과 생명감을 느끼게 합니다.

 

 

[빨간 조화]]
이 작품은 3차원의 공간을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탁자와 벽, 창문 그리고 오른 쪽의 인물이 모두 평면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식탁보의 무늬가 벽지의 무늬로 연속되어 있고, 음영이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휼륭하게 통일된 명쾌한 화면이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삶의 기쁨 ]
이 그림은 마티스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통찰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전면을 강조하고 더욱 대담하게 분할된 공간구성이 돋보입니다. 상징주의 화가이자 마티스의 스승인 귀스타브 모로의 영향인 듯 화면 전체로 흐르는 선들이 가로 2.3 미터, 세로 1.7미터의 대작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 더욱 환상적입니다.

 

 

호사 정숙 쾌락 ]
당시 마티스는 시냑의 [외젠 들라크루와에서 신인상주의까지]에 심취하였으며, 그와 함께 남프랑스를 여행하였습니다. 당연히 신인상주의의 점묘주의에 영향을 받았죠. 시냑의 점묘주의와 마티스의 강렬한 색채가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풍경화에 인물을 배치한 구성이 세잔의 <대수욕도>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푸른 모자를 쓴 여인]
오렌지 색, 초록색, 하늘색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색이 여인의 얼굴에 칠해졌습니다. 마티스는 이 그림에 대해 비평가들의 이해도 얻지 못하고, 그림 속 모델인 마티스 부인조차도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들은 화가로서의 재능은 인정하지만, 색채에의 새로운 해석을 노골적인 괴벽으로 간주해 버렸습니다.

 

[창]
스페인 국경 근처의 지중해 연안 마을에서 그려진 이 그림은 신인상파의 터치같은 붓터치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거친 점묘주의로 창 아래의 화분들과 꽃, 바다 위의 배를 그린 것이 상당히 평면적으로 보입니다. 화폭 속의 창, 그리고 그 창 속의 바깥 세상으로 우리의 시선을 움직여주는 구성이 순수하고 시원한 색채 만큼이나 독특합니다.

 

 

마티스 부인]
얼굴에 초록색을, 머리에는 파란색을 칠한 이 작품은 물체 고유의 색을 부정하는 마티스의 감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색채를 양분, 단면화 하여 교묘한 발런스를 추구하고 있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인상파 보다도 과감한 색채의 향연이 인공적이고도 묘한 깊이감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