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때론 이렇게 우아할 수 있는 날이 있어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음악회에 다녀올 수 있었다. 사계절 까페의 자암님이 특별히 조용한과 함께 가 보라면서 산울림님에게 전해준 티켓으로..... 내 생애 가장 순수한 감동으로 끝없이 쳐 대던 박수, 박수. 박수..... |
돈 코사크 남성합창단 내한공연
VIP석 100,000원/R석 80,000원/S석 60,000원/A석 40,000원/B석 20,000원
전설의 “돈 코사크”남성합창단
Don Kosaken Chor -Wanja hlibka
천둥번개와도 같은 그들의 음성!!
단원 14명에 지휘자 한사람 도합 15명이 만들어내는 장중한 하모니는 벨칸토식의 발성이라든가 성악의 문법적인 이론과는 거리가 먼 전대미문의 아카펠라로 뿜어대는 러시안들의 크로테스크한 창법에 청중들은 그저 박수를 쳐대는 수밖에...
2008년 첫 내한공연을 관람했던 한 관객은 위와 같은 소감을 올려주었다. 일제 강점기에 항일 독립군의 애창곡이었던 스텐카 라진과 선구자를 앙코르곡으로 들려준 이 두곡은 닮은꼴이 많아서 많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며 눈시울을 적시게 하였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솔리스트들의 천둥번개와도 같은 14명의 음성은 200명의 합창단 소리의 볼륨까지 끌어내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최고의 성악과 합창을 들려주었고, 2009년 4월 또 하나의 감동으로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돈 코사크 합창단 창단 유래>
첫 리허설은 1921년 그리스의 억류자 수용소에서 시작되었으며, 세상과 분리된 채 코사크는 그들의 조국에 대한 노래를 부를 시간이 많았으며 합창단원들의 가슴은 향수병과 그들의 삶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이 불가리아로 이송되었을 때 합창단의 회원은 엄청난 수로 증가를 했으며 합창단은 이미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세르게이 야로프는 그의 합창단과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 교회’에서 일요일마다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어 기뻐했고 평일에는 교회와 그들 자신을 위해 일했다. 1922년 소피아에서 열린 제1회 정기 연주회가 큰 성공을 거두자 이를 계기로 해서 돈 코사크의 생애가 시작되었다.
프랑스 제조업자가 세르게이 야로프와 그의 합창단에게 자신의 공장에서 일을 하라고 제안했을 때, 그들은 프랑스로 향했지만 오스트리아 빈까지만 도달했다. 여기서 세르게이 야로프는 이들의 콘서트를 기획한 "Völkerbund"와 계약하였으며, 빈 호프부르크 궁에서 열린 첫 공연은 무대와 관객들의 기대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공연은 두 달 간의 오스트리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와 스위스로 이어졌으며, 이를 기점으로 합창단의 미래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또한 유럽의 유명한 극장들이 앞다퉈 야로프와 합창단을 초청하였다. 1924년 독일에서의 첫 공연을 시작으로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로 이어졌으며, 부다페스트에서 ‘100회 기념 콘서트’를 가졌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 1939년까지 베를린에서 거주하였던 합창단은 그 후 미국공연에 대한 제안을 받고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기계문명의 나라 미국에서 투박하고 흙냄새 물씬 풍기는 러시아 민요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합창단의 우려는 예상을 빗나갔으며, 뜻밖의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계기로 전 단원은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때 그들은 멕시코, 쿠바, 중남미를 방문하였고, 할리우드에서 몇 개의 영화를 찍었다. 종전 후 그들은 연합군을 위한 공연을 하기 위해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돈 코사크 합창단은 야로프가 세상을 떠난 직후, 이들은 미국 레이크우드에서 합창단을 해체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멤버들은 그 이후에도 각자 음악의 길을 걸었다. 그 중에서도 미카엘 민스키는 돈 코사크 합창단에서의 활동을 바탕으로 하여 인상적인 공연을 펼치는 유명한 솔로이스트가 되었다. 그는 Hague 지역의 매우 열정적인 가수들과 함께 돈 코사크 합창단을 부활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약 1만회의 공연을 끝으로 해체하기 전까지 세계의 왕궁들과 수많은 대형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가졌다.
<라흐마니노프와 살리아핀의 전폭적 지지>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는 생애 마지막 25년 간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작곡 외에도 연주와 지휘, 러시아 음악가들과의 교류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는 1932년에서 1939년 중에 요양 차 방문한 스위스에서 매년 세르게이 야로프를 만나 음악적으로 지도한 바 있으며, 금세기 최고의 베이스인‘표도르 살리아핀’ 또한 이들 합창단에게 열렬한 지지를 표한 바 있다. 오페라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텔레스 배역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 살리아핀은 런던에서 열린 돈 코사크 합창단의 공연을 관람한 후 세르게이 야로프를 방문하여 한담을 나누고는 하였다.
<합창단의 재설립>
합창단은 해단 후 12년 만인 1991년, 당시의 오리지날 멤버였던 반야 흘리브카와 게오르그 팀첸코에 의해 재 설립되었다. 이들은 본래 합창단의 고전적인 레퍼토리에 더해 새로운 창립자들의 훈련 아래 새로운 음색과 폭넓은 레퍼토리를 갖추게 되었다. 가벼운 악기같은 음색으로 시작되는 솔로 파트부터 오케스트라와도 같은 장대함까지, 광범위한 소리의 스펙트럼으로 오리지널 팀의 진정한 후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적인 아카펠라 합창단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들은 함부르크 뮤직홀과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프랑크푸르트의 홀 등에서 라이브로 공연하며 그 외에도 매년 250개의 대성당과 콘서트홀에서 공연하고 있다.
독일 국영방송인 ZDF와 오스트리아 공영방송 ORF, 네덜란드 종합방송국 RTL, 베를린-브란덴부르크 방송국 RBB 등을 통해 이들의 공연이 방영된 바 있다.
<지휘자 소개 - Wanja Hlibka>
반야 흘리브카는 1948년 독일계 러시안 가정에서 태어났다. 17살 때 이미 그의 개인 초연 을 가졌으며 2년 후 세르게이 야로프와 계약하였다. 1967년 첫 순회공연 후에 그는 함부 르크에 있는 음악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투어 휴식 중에 학업을 지속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슈타른베르크에서 Josef Metternich 교수에 의해 받은 수업은 그의 목소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반야 흘리브카는 팀이 해산되기 전까지 돈 코사크 합창단의 단원이었으며, 공식적인 최 연소 솔로 연주자로서 스스로 새로운 돈 코사크 합창단 지휘자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세르게 야로프의 음악적 후계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재결성된 돈 코사크 합창단은 그의 지휘 아래 오리지널 팀의 레퍼토리에 더하여 더욱 폭넓은 레퍼토리와 정교한 음색을 갖추게 되었다.
♣ 2008년 4월 첫 내한공연 리뷰
그들은 정복을 입은 코사크인들 이었다. 북반구의 러시아인 들이었다. 지휘자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첫 지휘 비트에서 14명의 러시아의 강한 포르테의 성악적 소리로 세종문화회관을 압도 하면서 반음계적 진행으로 첫 곡 'Lord , have mercy on us' 가 연주되었다. 무반주 아카펠라였다.
14명의 이 아카펠라 남성합창단의 소리는 200명의 합창단 소리의 볼륨까지 끌어내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마 대다수의 맴버가 오페라 가수 출신이기 때문인 것 같다.
합창의 세계는 인간의 목소리로 오케스트라적 음악표현과 더불어서 기악이 할 수 없는 섬세한 인간의 목소리의 셈 여림과 톤, 그리고 가사가 주는 직접적인 내용의 전달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면에서 돈 코사크 아카펠라 합창단은 무반주로써 성악의 합창만을 감상하기에 충분했고 러시아적 음색과 음악의 로맨티시즘을 표현해 내기에 충분했다.
- 출처/ 돈 코사크합창단 내한공연 리뷰-작성자 테너 안광영
특히나 Midnight in moscow (모스코바의 밤) 과 Kalinka (칼린카) 에서는 돈코사크가 아니면 이 노래들은
절대로 못 듣겠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그만큼 완벽하고 독창자들에 실력이 대단하다는 뜻이다. 어제
가장 놀라웠던 성악가는 카운터테너 부분을 맡은 성악가였다. 지금까지 평소에 듣던 파퓰러 카운터 테너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합창단에 카운터 테너는 성량과 음색 자체가 달랐다. 그에 목소리는 정말로 눈물이 날 정도에 감성을 자극하는 목소리 였다.
공연이 끝나고 단원들이 퇴장을 했는데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박수를 치고 커튼콜을 했다. 잠시후에 지휘자와 단원들이 다시 나오고 앵콜곡을 부르는데 Stenka Razin 이였다. 역시나 돈코사크에 Stenka Razin은 최고였다. 러시아 전통에 테너와 베이스가 독창을 하고 합창단이 다시 받아서 부르는 그들에 음색은 말이 필요 없었다. 앵콜곡이 끝나고 계속해서 박수가 이어졌고 많은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들은 충분히 이런 대우를 받을만한 공연을 보여줬다.
그리고는 마지막 앵콜곡이라면서 한국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고 노래 제목은 '선구자'였다. 그때 관객들에 반응은 대단했었다. 잠시 후에 시작된 우리에 가곡 선구자를 한국말로 불렀다. 나는 이렇게 감동적이고 가슴을 파고드는 선구자는 처음 들었다. 테너에 독창과 합창단에 합창 그리고 카운터 테너에 간주는 완벽한 편곡이었고, 우리 가곡에 아름다움을 정말로 잘 표현했다. - elee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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