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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그림들/한국의화가 작품

나 혜 석

*나 혜 석...   *

지금까지 나혜석은 그녀의 극적인 삶에 맞추어 단지 외연적 의미에만 국한된 채, 그 안에 내포된 진정한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다. 극과 극이 혼재한 그녀에 대한 서툰 지식은 근대 여성문화사의 한 선각자를 비극의 주인공으로만 삼아왔다. 최초의 여성서양화가, 최초의 여성소설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시대를 앞서 살아간 그녀에 대한 진정한 역사적·문화적 지식과 공유는 곧 한국 근대 여성운동과 근대미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새 천년 2월의 문화인물로 나혜석을 선정하였다. 나혜석이라 …, 참으로 가슴을 울려주는 이름이다. 그의 이름 속에는 영광과 회한이 서려 있다. 한마디로 극과 극이 혼재하여 다각적인 검토를 요하는 것이다. 그의 극적인 생애는 대중적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때문인지 그를 주인공으로 한 공연물이나 소설 같은 문예물도 적지 않다. 대중은 한 선구자의 비극을 만끽하면서 동정하거나 혹은 선망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나혜석이 20세기 한국여성사에서 획기적인 족적을 남긴 것만은 사실이다. 한마디로 나혜석 이전에 나혜석 없었고, 나혜석 이후에도 나혜석 없었다. 그의 독보적 발자취는 21세기에도 퇴색되지 않고 빛을 내고 있다.

나혜석은 누구인가. 근대기초의 여성 유화가이자 고희동·김관호 등과 더불어 1910년대 유화계의 선구자로 주목받는 인물이다. 특히 이들 남성 유화가가 모두 절필했을 때도 그는 유화의 붓을 들고 치열한 작가활동을 보인 전업작가였다. 게다가 그는 평양의 김관호에 이어(1916년), 서울에서 유화 개인전을 최초로 개최한(1921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뿐인가. 동경 유학시절에 이미 문학활동을 하면서 그는 문인으로서의 면모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1918년 《여자계》에 발표한 단편소설은 우리 근대 소설사의 서두를 장식하는 명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더 이상 열거할 필요도 없이 선구자 나혜석은 우리의 근대사에서 너무나 큰 존재다.

나혜석은 자신의 표현처럼 사건의 연속 속에서 살았다. 동경 유학, 열애, 애인의 요절, 기혼남과의 결혼, 애인 무덤에로의 신혼여행, 외교관 부인으로서의 만주생활, 부부 동반 세계 일주, 파리에서 최 린과의 염문, 이혼, <이혼고백서> 발표(1934년), 방황, 행려병자, 쓸쓸한 별세 등 파란만장한 52년의 인생.

나혜석 자신의 삶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과 같다. 하지만 전문적인 연구 성과가 미흡한 상태에서 지나치게 대중적으로 부각되어 스타 반열에 오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나혜석 예술세계의 본질이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술 외적인 부분으로 회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우려감을 낳기에 충분하다. 이에 나혜석 연구에서 몇 가지의 방해 요인이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솔직한 표현으로 연구자에게 주어진 현 단계의 과제는 나혜석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자료의 발굴과 정리와 같은 기초적인 작업이라고 믿고 싶다. 이 대목에서 중요하게 부상되는 사항은 기존의 학설(?) 혹은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무화시키고 바닥에서부터 허심탄회하게 총체적 재검토 작업을 수행해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혜석의 실체 파악을 위한 검토 사항은 대충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화려한 생애에 걸맞은 예술적 성과물을 남겼는가. 그는 어떻게 여성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페미니스트가 되었는가. 그는 여권운동가에 걸맞은 미술작품을 제작했는가. 현재 그의 작품이라며 유통되고 있는 유화들은 모두 그의 진작인가. 조선미전 출품작과 현존 그의 작품이라고 알려진 것들과의 수준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대표작 혹은 예술세계의 본령은 어떤 것일까. 소설가로서의 그는 과연 소설 문학사의 첫머리를 장식할 만한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3·1민족해방운동에도 참여했지만 과연 그의 민족의식은 어느 수준이었는가. 여타의 여류 명사들이 대부분 친일의 대열에 나설 때에도 그는 참여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나혜석의 항일정신과 독립운동 경력은 무엇 때문에 부각되어 있지 않은가. 말년에 경제력의 결여로 불행한 삶을 영위했지만 세상과 타협만 해도 경제력을 해결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과 선택의 폭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무엇 때문에 편한 길을 택하지 않았을까.

나혜석이 남긴 예술적 성과는 적지 않다. 초기의 선구자답게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쌓았다. 문학의 경우, 문학사가들의 문헌 탐구에 의해 그의 실체가 거의 드러나 있고, 그 평가 또한 뛰어나다는 중론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처녀소설이 발굴되지 않고 있으며 새롭게 추가될 다른 문헌자료도 잠자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미술작품의 경우는 대표성을 띨만큼 출처가 확실한 작품이 없어 아쉽다. 그는 생전에 소품전의 2백 점을 포함하여 3백 점 이상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들 전시 출품작 가운데 출처를 명확히하는 현존 작품은 단 한 점도 없다. 이 점이 바로 지하의 나혜석 자신이나 후학들이 갖는 불행이다. 그가 직접 출품했던 조선미전의 경우, 비록 흑백 도판에 의한 판단이라 한계가 없지 않지만, 수준만은 탁월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나혜석 미술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제일 정확한 자료는 이들 도판뿐이다.

나혜석의 실체를 찾아서

나혜석 작품의 특징은 무엇보다 대상을 적확하게 드러내려는 사실정신에 짜임새 있는 구도와 숨결이 있는 질감 표현, 그리고 견고한 화면 구성이다. 그는 화면상 어느 한구석도 소홀히 다루는 법이 없다. 강약을 적절히 구사하는 가운데, 변화감을 주기도 하면서 안정된 구도를 세심하게 구축시키려 했다. 확실히 조선미전 출품작의 품격에 비해 이른바 현재 나혜석 유화작품들은 기량이 떨어지는, 한마디로 수준 미달이 대다수라고 보고 싶다.

명확한 기준작이 부재한 가운데서 그 누구도 자신있게 나혜석 작품의 진위를 단정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가짜 작품이 횡행하는 형편에서 마냥 도외시할 수만도 없는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혜석 작품이라고 알려지고 있는 모든 작품들에 대해서 총체적인 재검증의 기회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화가 나혜석은 그 이미지에 손상을 입고 있다고 믿어진다. 자신의 대표성을 지닐 만한 작품은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고 겨우 태작이거나 위작들만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조선미전 출품작이 입증하고 있는 기량에 버금가는 유화작품의 유존례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존 작품만 가지고 나혜석의 미술세계를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필자의 소신이다. 이런 점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지하의 나혜석은 억울한 경우의 작가라 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한마디 첨언할 것은 현존작의 이른바 족보에 관한 문제다. 대부분의 이들 그림은 미술시장이 형성된 70년대 이후에 세상에 출현된 것들이다. 게다가 출처가 신빙성 있게 알려진 작품도 거의 없다. 한마디로 상인들에 의해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물밑 거래된 상품들이었다. 단 한 점의 작품에 대해서도 본격적인 검증작업이 수반된 예가 없었다. 관련 논문의 부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느날 어물쩍하게 근거 제시도 없이 나혜석의 작품이라고 도록에 게재된 것들이었다. 누구 하나 책임있게 논증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또 하나의 불행이었다. 나혜석 작품이라고 세상에 새롭게 내놓을 때는 설득력 있는 논고가 반드시 첨부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나혜석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 누락시킬 수 없는 것은 여권운동이다. 그는 글과 실천을 통해서 여성해방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과감하게 개척했다. 이의를 제기할 필요도 없이 여성운동사에서 나혜석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의 주장처럼 미술작품에도 페미니스트 요소가 담겨 있는가. 지금까지의 정설은 페미니스트 나혜석과 화가 나혜석의 위상은 별개라고 주장되어 왔다. 여기서 필자의 견해를 미리 내놓는다면, 나혜석은 미술에서도 페미니스트 요소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혜석은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다음해(1919년)에 《매일신보》 지상을 통해 연말연시의 세시풍속에 대한 소묘를 연재했다. 나혜석기념사업회 주최의 국제심포지엄(1999년)에서 필자가 처음으로 이 새로운 자료를 소개하여 각광받았던 바로 그것이다. 여기 그림을 보면 가사노동에 전념하고 있는 현실 속의 여성상이 집중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초기의 조선미전 출품작 가운데는 역시 가사노동에 열중하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 여러 점 있다.

대개 동 세대의 화가들이 누드화나 박제화된 인물상 등을 그릴 때 나혜석은 일상 속의 일하는 여성에 주목하여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비록 초보적 단계일지는 모르겠으나, 작가의 페미니즘 요소를 간취할 수 있다. 하기야 유화 초기에 대부분의 남성화가들이 좌절하고 절필할 때 나혜석의 전업작가적 활동은 그 사실 자체만 가지고도 여권 신장에 일정부분 역할을 했다고 본다. 전문가로서의 여성이 갖는 사회적 역할은 비중 있게 검토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나혜석의 시대는, 여성은 전문가라기보다 현모양처로 가정이나 지키고 있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던, 남성 중심 사회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도 있다. 나혜석은 일찍이 이렇게 갈파한 바 있다.

“우리 조선 여자도 인제는 그만 사람같이 좀 되어 바야만 할 것이 아니오? 여자다운 여자가 되어야만 할 것이 아니오? 미국 여자는 이성(理性)과 철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불국(佛國) 여자는 과학과 예술로 여자다운 여자요, 독일 여자는 용기와 노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그런데 우리는 인제서야 겨우 여자다운 여자의 제일보를 밟는다 하면 이 너무 늦지 않소? 우리의 비운(悲運)은 너무 참혹하오 그래.”(《學之光》12권, 1917년 4월호)


나혜석의 민족의식에 대한 재평가

나혜석의 자주정신과 민족의식은 동경 유학시절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1915년 나혜석은 ‘조선 여자유학생 친목회’를 조직했다. 여성해방론과 항일의식을 주창했던 이 단체는 《여자계》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바로 이 잡지에다 나혜석은 <정순> <경희에게> <회생한 손녀에게〉(1918년) 같은 기념비적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이 단체에서 그는 김마리아·황애시덕 등과 같은 동지들과 뜻을 함께했다.

나혜석은 1919년 3월 3일 자금 조달과 동지 규합차 평양과 개성을 방문했다. 한마디로 3·1독립운동에의 적극적 참여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다음날 귀경한 나혜석은 모임을 더욱더 조직화하기로 하는 가운데 김마리아·황애시덕·박인덕 등과 함께 간사로 피선되었다.

 

 

 

 

                                            자화상

  

 

 

* 여류화가 나혜석 [1896~1948 ]... *
 

정월(晶月) 나혜석(1896~1948)은 수원의 명문가 딸로 태어나 진명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며 또한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화가이다.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큰대문 참판댁」의 4남매 중 셋째로 부유한 개명관료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신학문을 공부한 두 오빠 나홍석, 나경석과 아버지 나기정의 권유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 유학했다. 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에 반하여 학업을 중단하여 1년 간 스스로 돈을 벌어 학교를 마친 그녀는 서울로 돌아와 처음으로 개인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유화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힘썼고 초창기 「이른 아침」(早朝)과 같은 목판화로 민중의 삶을 표현하기도 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차례 특선과 입선을 하기도한 재능있는 화가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일본유학생, 우리나라 최초의 이혼녀, 우리나라 최초의 유럽 여행한 여성. 그녀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이처럼 정월 나혜석은 우리나라 근대화 시기의 대표적인 신여성이라고 해도 잘못된 표현이 아니다. 무엇이든지 몸소 실천해 보여주었고,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으로서 나타내어 사람들의 자각을 촉구했다.
김일엽 등 다른 신여성들처럼 여성들의 교육을 강조했으며, 초기에는 자유주의적 성격을 지닌 페미니즘을 내세우다가 점차 남녀성평등을 통한 자유연애, 개방 결혼과 독신주의 등을 주장하며 급진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작품 활동을 통해서 많은 여성들의 자각을 일깨웠으며 여성 운동과 그에 따른 편견을 바꾸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혼을 한후 그는 화실에서 일어난 화재로 그림을 모두 잃게 되고 또한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수덕사 등 여러 사찰을 떠돌아 다녔고, 해방 후에는 서울의 청운양로원에 맡겨졌으나 그는 걸핏하면 몰래 빠져 나왔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면 늘 기운이 솟아 오른다고 했던 나혜석은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그의 무덤은 어디 에도 남아 있지 않다.

  

                      

 

                                               나부

 

 

 

                                     깡깡

 

 

                                         금상산  만상정

 

 

 

                                                1924  만주 봉천공원

 

 

                                           1927   파리 풍경

 

 

                                           1927    블란서 마을 풍경

 

 

 

                                      1928  스페인 국경

 

 

                                          1933   인천 풍경

 

 

 

 

1933 선죽교

 

 

 

 1935 별장

 

 

1935 화령전 작약